brunch

오늘은 다시 오지 않으니, 우리, 후회 없이 살자

by 너굴이

한국에서의 시간도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제약으로 더디게 흘러만 갔습니다.


전신 스캔에 준하는 결과를 신속하게 듣기 위해 갖은 우여곡절을 헤치며 이역만리를 날아왔는데, 한국이라고 해서 처음 겪는 전염병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 스캔(?)을 해 볼 수는 있었습니다.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고 생전 처음 CT도 찍고요. 어차피 종합시험을 마친 후 한국에서 병원 투어(?)를 다닐 계획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학병원 급으로 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앞선 화에서 캐나다 할머니 의사는 저에게서 자가면역질환이 악화된다면 발현될 수 있는 병을 A로 본다고 하신 점, 기억나시나요? 물론 할머니 의사는 현재 A라고 확진을 한건 아니었어요. 그저 저의 상태가 경증인 데다 피검사 결과가 여러 가지 방향을 말하는터라 확진이 어렵고, 이렇게 초기에 잡아내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특정 질환이 발병하더라도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저를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하셨어요. 현재 병증이 상당히 약하고 초기에 전문의를 보아 다행이라는 점은 한국 의사도 반복한 말이지만, 그는 병명에 대해 할머니 의사와 이견을 보입니다. 현재로서는 A가 아니라 B에 가깝다는 것이었어요. 할머니 의사는 예방 차원에서라도 약을 먹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한국의사는 B의 경우 해당 약은 효과가 없을 것이며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 해도 본인은 지금 약을 처방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부작용을 감수할 만한 이득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검사, 결과 듣기, 또 검사, 또 결과 듣기, 또또 검사, 또또 결과 듣기,라는 지난한 과정은 6주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전문의와의 면담을 마치며 '일단은 크게 치료해야 할 단계가 아닌 것으로 보이니, 내년에 보자'는 말에 눈물이 찔끔 솟아오르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다 키워서 (물론 공부를 좀 오래 하긴 하지만) 외국까지 훨훨 날려 보낸 딸이 다시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어 돌아오니 엄마아빠는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을까요.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관리 잘하면 된다, 유병장수 시대다' 등의 말로 웃음을 나누기도 하지만, 당시 저희 집 분위기는 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희귀 질환이 내 아이한테 있다고는 하는데, 이건 뭐 약을 먹을 일도 아니라고 하고 수술을 해서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의료 기술에서는 치료제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막막하셨을까요.


저는 졸지에 불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지나 불확실성이 심리에 미치는 엄청난 파급효과는 제가 직접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같은 일이 부모님께 발생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보기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있는 엄마는 본인의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리다 저를 떠올리고 탈수가 될 정도로 눈물을 쏟기도 했다고 하고요. 종교가 없는 아빠는 당신 나름대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이런저런 노력을 하셨을 겁니다. 모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들은 이야기일만큼, 당시 두 분은 제 앞에서 당신들의 걱정과 불안을 일절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괜찮다'는 말로 저를 다독이기 바빴습니다. 아직도 볼 때마다 조금씩 울컥하는 구절 역시 당시 엄마가 저에게 보내주셨던 메시지였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기적처럼 괜찮아질 날이 올 거다.

무너진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으면 좋겠다.


외면하고 있었지만, 내 가슴이 무너졌던 적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석사 지도교수님을 뵙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서 한국에 잠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번도 말씀한 적 없었던 본인의 박사과정 생활에 수반되었던 역경을 나눠주셨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괜찮아지셨을 것으로 믿는다, 는 제 질문에 "응, 그래"라고 답변하시던 교수님. 괜찮아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과정에서 너굴이가 헤쳐 나가야 할 여러 가지 과정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던 교수님. 헤어지는 자리에서 저를 안아주시며 괜찮다,라고 해주시던 눈에 물기가 어린 것을 더 이상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역으로 잽싸게 들어옵니다. 코로나 덕분에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덕에 울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을 선생님도, 지나가는 행인도, 볼 수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길.

까만 창문에 비치는 제 눈동자가 그렁그렁합니다. 제 이야기를 남에게 전할 때에도 눈물 없이 전할 수 있었는데,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시간 그곳에 있었어야 할 선생님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려 자꾸 눈물이 흐릅니다. 지금 내가 겪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그런 시간을 겪었던 사람 앞에서 꼴사납게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차마 눈물 한 방울도 볼로 흘려보내지 못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죽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다고 회상하는 그 얼굴에, 지금은 괜찮으시냐는 질문 밖에는 할 말이 없었어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이왕 겪어버린 것, 인생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긴 하더라"는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지요.

모두가 불나방처럼 좇아가는 행복은 찰나에 머무는 것이고요.






의사가 먼저 약을 먹을 이유가 없다고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했다고 하니, 한국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한 발 먼저 걱정하는 경향이 있는 엄마는, 박사를 그만둬야 하면 걱정 말고 그만두라고 하셨지만 (저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뭔가 문제와 해결책의 무게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굳이 박사를 그만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 댁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매끼를 간절한 기도를 섞으며 만드셨을 겁니다), 혼자가 아닌 상황에서 지내다 보니 다행히 불안이 많이 내려갔어요. 어렵게 어렵게 1-2kg 정도를 찌웠지만, 예전 몸 같진 않았습니다. 엄마는 자꾸 어릴 때 장군감이었는데(네?!) 살이 너무 빠져버려 보기 안쓰럽다는 말을 반복하셨죠. 저는 뭐, 예전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저 세월이 감에 따라 수반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는 비행 편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제 마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어요. 바다를 넘나드는 두 나라의 전문가들이 현 상황에 대해 '비교적 괜찮다, 대응 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어느 정도 다음 행보를 정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제 삶의 터전이 있는 캐나다로 돌아가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논문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논문, 조금 늦어질지도 몰라요. 늦어지면 다행이게요. 못 쓸지도 모르죠.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 어쩌면 유일한 -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결의가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휘몰아치는 외부의 소용돌이와 상관없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일상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점을 깨달은 자의 말이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석사 지도교수님께 캐나다로 돌아간다는 인사를 남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답장에는,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몇 마디 말과 저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진심이 꾹꾹 눌려 담겨 있었어요. 힘들면 안 해도 된다, 세상에 죽을 고통을 이겨내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없다,는 말씀과 함께요.






당시 코로나로 인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준비해야 할 서류가 매우 많았습니다. '반드시 캐나다에 들어와야만 하는 이유'를 이민국에 소명하기 위해 학과와 학교에 공식 레터를 요청해야 했고요. 당시 한국에서 반출 가능한 마스크 개수에 제한이 있어 그것도 맞춰서 준비해야 했습니다. 캐나다 공항에 내려 거주지로 갈 동안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 지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보다는 덜 엄격한 지침을 전달받았지만, 이 역시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였어요. 대중교통은 이용이 금지되어 있었고, 짝꿍은 그즈음이면 자가격리를 하고 있을 예정이었거든요.


여차저차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잘 돌아와 자가격리를 마친 후, 저는 짝꿍과 캐나다 국내 여행을 계획합니다.

Inter-provincial travel, 즉, '주'를 넘나드는 여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 않았던 관계로 Alberta의 Banff와 Jasper를 가기로 합니다. 아무리 국내여행이 금지되어 있진 않지만, 자가면역질환도 있는 마당에 사람과의 접촉을 늘려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백신이 나오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짝꿍과 저는 자동차 여행을 계획했지요.


Lake Louise는 어릴 적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유키 구라모토라는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음반의 타이틀이기도 했고, 그의 음악을 주야장천 들었던 저로서는 캐나다에 온 이후 레이스 루이크의 실물을 영접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다만 학교 생활이 바빠 엄두를 못 내었는데,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는 가치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오늘 하라, 는 신념이 강해지고 있었거든요. 내가 짧게 살 지, 길게 살 지 모르지만, 할 수 있었는데 사소한 이유로 하지 못하는 우는 더 이상 범하지 말고 살아가자는 마음이었습니다.


끝없이 뻗어진 고속도로의 저 너머 크나큰 설산이 자리 잡고 있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캐나다 전체가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지만, 각 Province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여주더라고요. 여름의 중반이었지만 어딘가 서늘한 그 도시를 여행하면서 겨울엔 절대 못 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레이노 ㅠㅠ). 그러다 보니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과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있다는 감각이 더욱더 뚜렷해지더군요.


레이스 루이크를 여러 번 와 봤던 짝꿍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관광지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관광객이 없었던 밴프와 재스퍼는 저희가 독차지하고 왔습니다. 주변 사람이 나오지 않게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북적이는 레이스 루이크는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청아한 호수만을 보여주었고, 짝꿍은 저에게 "나중에 와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짜증 내면 안 돼, 너굴아" 라며 신신당부합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싶었던 레이스 루이크는 생각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옥색 빛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침 비가 와서 구름과 햇빛, 그리고 호수의 절묘한 조화를 보진 못했지만, 괜찮았어요. 다음에 또 오면 되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마침 코로나 특수(?)로 호수를 끼고 있는 호텔의 객실을 반값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덕에, 레이스 루이크는 지겹도록 보고 왔습니다. 아침에도 나가도 낮에도 보고 밤에도 나가도 비 맞으면서도 보고 해가 떠도 보고, 등등. 짝꿍은 자꾸 저한테 "아... 너굴이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주차장이 미어터져 새벽 6시에 와도 보기 힘들다는 Moraine Lake 역시,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 마냥 편하게 들어갔습니다. 오후 2-3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이쯤이면 이제 예상하시겠죠? 짝꿍은 또 "늘 이런 게 아냐, 이번이 정말 특수한 거야" 레퍼토리를 반복합니다. 저는 뭐, 그저 그의 입에 조용히 간식을 넣어줄 뿐이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또 한 번 이사를 준비합니다.

여전히 학교 내 기숙사이지만 가족 중심의 주거단지로 옮기기로 했어요. 캠퍼스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고, 같은 렌트비로 훨씬 더 큰 공간을 쓸 수 있는 곳이었지요. 유일한 단점은 대기만 2년 정도 걸린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1년 전 waitlist에 등록을 해두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어요. 아마도 이 역시 코로나 특수(?)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캐나다에 머물던 유학생들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숙사 대기명단 인원이 빠른 속도로 빠진 것 아닌가 추측합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아서 기존 기숙사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새로운 기숙사로 이사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요.

1년 전, 지금의 기숙사로 이사 올 때만 해도 혼자만의 공간을 가진 것에 기뻐했었는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은 집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짝꿍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밤마다 공포와 싸워야 했던 기억이 그 집과 물아일체가 되어 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았던 환경, 오래된 가구, 자주 고장 나던 가전제품 등은 그저 부차적인 이유였을 겁니다. 종합시험을 준비하면서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제가 내뿜는 에너지가 그 집에 스며들었을 것이고, 아무리 햇살이 기분 좋게 비쳐 들어와도 희귀 질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저를 밝힐 수 없었을 거예요. 공간이 마음이 들지 않다 보니 별의별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서 빨리 새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더랬습니다.


새 기숙사는 가구가 없는 unfurnished 형태라 초반 정리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대로 집을 꾸미며 이것저것 사 모으는 과정이 재미가 쏠쏠했어요. 캐나다에서는 계속 캐리어 가방에 의존해서 기숙사를 전전했었고, 한국에서도 제 취향을 반영한 공간을 가진 적이 없어서 부모님 댁에서는 부모님의 취향에 맞추고, 빌트인 오피스텔에서는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았을 뿐이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색깔과 느낌대로 내가 살 공간을 채우는 것은 꽤 감성 충만한 경험이자 저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겠다는 이메일에, 석사 지도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안전망(safety net)을 촘촘하게 짜라고. 배우자, 지도교수, 친구, 의사, 상담가, 제도적 도움, 등 각각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지만, 단 하나의 요소로는 안전망 전체를 짤 수 없다고 하셨어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활용하여 제 요구에 맞게 안전망을 촘촘하면서도 두텁게 짤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래야, 내가 언제든 바닥으로 떨어질 때 안전망이 작동하여 바닥과의 충돌을 줄여주거나 혹은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을 막아준다고요. 그 조언을 받잡아, 그 해의 여름과 가을을 모두 안전망을 짜고 테스트하는 데에 시간을 썼습니다. 다가올 겨울에 대비하고 조금은 바뀌어버린 제 삶의 일부를 미리 보기 하는 마음으로요.


무엇보다 여행, 이사, 집 꾸미기와 같이 삶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일에 골몰하다 보니, 나에게 희귀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잊는다기보다는, 시나브로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매사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았던 짝꿍이 곁에 있었던 것도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매번 'if'에 기반하여 시작되는 저의 걱정과 불안을 잠재우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말과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전에는 생각지 않았던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타인에게 정서적 의존도가 높아진 것은 아닌지. 내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별 것 아닌 상태를 과대 해석하여 비련의 여주인공인 척하고 있는 건가. 내가 짝꿍에게 혹은 부모님에게 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등등.


위의 질문이 아주 제 마음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다른 관점으로 이 현상을 바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커졌어요. 좁게는 배우자, 가족, 나아가 친한 친구와 선생님, 그리고 주변 지인들로 확장할 수 있겠지요. 그들에게 기댈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제 영역과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쬐끔은' 독립적인 인간 유형입니다. 어차피 탄생하면서 모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상, 나는 '나'이고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저의 독고다이 정신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슬픔과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는지, 어차피 죽는 그 순간까지 번뇌의 연속일 이 삶 속에서 찰나의 소소한 행복을 나눌 사람이 있는지 여부가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이지만, 이왕이면 좀 더 재미있게 사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재미와 기쁨의 순간을 공유할 사람이 많을 필요도 없고, 정말 2-3명만 있어도 내 삶이 더 충만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제 몸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자 친한 친구들에게는 간단히 언급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아무래도 저는 추위를 많이 타게 되었고, 같이 야외활동이라도 할라치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언젠가부터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선호해 온 탓에 말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제 상태를 알리는 족족 상대방이 눈물을 흘려 되레 제가 당황하는 일이 연달아 생깁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는 제가 말하는 내내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저를 보다가, 다른 날 다른 친구와 제 이야기를 하다 울음이 펑 터졌다고 하고요. 저와 가장 친한 선배는 (little bird) 제 말을 가만히 듣더니 붉어진 눈시울을 끝끝내 감추지 못했습니다. 말이 없어진 선배를 대신하여 아내분이 의사는 괜찮은 사람이냐고 물었을 정도니까요. 원래 손이 컸던 그 선배와 언니는, 간단히 덜렁덜렁 놀러 간 저희 손에 portable heater며 이것저것 잔뜩 안겨 줍니다. 아... 아니,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ㅠㅠ


이미 초반부터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던 지도교수 역시 전적으로 지지를 표합니다. 제 상태를 학과에 보고할 필욘 없지만, 나중에 혹시 모를 잡음(?)을 줄이기 위해 학과장을 찾아가 건강 상태를 간략히 공유합니다. 지금 당장 중대한 결함이 생겨 연구를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엔 앞 일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때 가서 "있잖아, 나 몸이 좀 불편한데 ㅠㅠ 그래서 논문 좀 늦어질 거야 ㅠㅠ"라고 했을 때 성과 위주로 돌아가는 우리 학과가 이러한 '결함'을 쌍수 들고 환영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과장은 제 이야기를 다 듣더니 학교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알려줬습니다 (그 교수가 저에게 해준 말과 행동 중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등록절차가 까다롭긴 했지만, 덕분에 학교가 제공하는 제도적 보호망 내에 속할 수 있었고 이후 중요한 도움을 여러 차례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일이 처음이 모호하고 어렵지 그 다음은 요령이 생겨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상태가 되지요. 안전망을 짜던 첫 해, 첫 겨울을 극단적으로 조심하면서 보냈습니다. 여름이 어서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다행히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기에 각종 수업조교 (TA) 업무나 학과 행사 등을 재택근무로 해낼 수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거나 완전무장을 한 채 나가곤 했는데, 재택근무 덕분에 그 겨울을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었어요. 만약 매일같이 출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레이노 증후군이 발생하는 것을 하루에도 여러 번 봤다면, 제 스트레스 지수는 꽤 높아졌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레이노 증후군이나 이따금씩 스치는 관절통에도 어느새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져서 무뎌진 측면도 있겠지만, 수없이 반복하면서 '악화되지 않으면 괜찮다'라는 명제를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에 불안도가 조금 낮아진 측면도 분명 있을 겁니다.


저의 노련한 상담가 역시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언어 문제로 겪는 정체성 혼란과 관련된 고민 때문에 찾아갔었는데, 건강과 관련된 중차대한 일을 겪는 바람에 상담 주제가 금방 바뀌었네요. 제가 극도로 무서워하고 있을 때,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현상의 본질만을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상담가, 이하 'ㅅ'] "죽음이 두렵진 않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병이 악화되었다는 가정 하에 무엇이 가장 두렵니?"

[너굴이, 이하 'ㄴ'] "일단 아픈 게 너무 너무 싫고 무섭고, 무엇보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워."

[ㅅ] "오늘 하는 일?"

[ㄴ] "내 연구, 운동, 여행, 하다못해 자유롭게 걷고 뛰고 보고 마시고 먹고 듣고 말하고 숨 쉬는 이 모든 행동들 말이야."

[ㅅ] "만약 네가 하는 연구를 더 이상 못하게 된다고 해보자. 수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치자. 그게 왜 무서워?"

[ㄴ] "몰라, 무서워. 그냥, 내가 내가 아닌 게 되는 것 같잖아."

[ㅅ] "너굴아, 너는, 네가 하는 일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냐 (you are not defined by what you do). 너는 그냥 너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태가 되든, 팔을 한 짝 잃든, 수영을 못하게 되든, 너는 그냥 너야. 그리고 그 모든 극단적 상황에서도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선택의 여지가 있어. 날 믿어. 선택의 여지는 늘 있어."


그렇습니다. 몇 년이 지나 그 시점을 돌이켜보는 지금, 늘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어찌 보면 싱겁게(?) 지나간 것 같은, 그렇지만 근본적인 원인 물질이 제거되지 않은 이 에피소드 이후, 제 삶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절대 밤을 새우지 않습니다. 피치 못해 그러해야 했다면 그저 시간 상관없이 충분한 수면을 취했습니다. 밤낮이 바뀌는 경우가 있어도 차라리 낮시간에 잠을 자버리기로 합니다. 제가 유연한 근무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상태라 이것도 가능한 일이겠지요. 여하간 무슨 일이 있어도 수면시간을 줄이진 말자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달고 살던 커피를 끊었습니다. 특별히 커피가 안 좋다는 연구는 없지만, 저의 경우 언젠가부터 카페인이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심장 박동수를 늘리는 경향이 있어 끊었습니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디카페인 원두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카페에서도 많이 구비하고 있어 약간은 밍밍한 커피 맛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쩌다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카페인이 제거되지 않은 원두의 맛이 이렇게 풍부했던가, 하며 놀라곤 합니다. 모순적이게도, 부족함을 통해 더 풍부하고 총 천연색으로 펼쳐진 감각을 느낄 기회를 얻습니다.


학부 시절 잘못 들였던, 종종 폭음을 하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습니다만, 음주 또한 끊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가볍게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경우는 생겼지만, 주로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소수의 경우로 한정 짓고 있습니다.


캐나다 의사는 세 가지를 피하라고 합니다. 담배, 경구용 여성호르몬, 그리고 스트레스.

담배는 피우지 않고, 앞으로도 피울 생각도 없어서 일단 제낍니다. 경구용 여성 호르몬 제제는 먹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먹을 생각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했더니, 가만히 생각하다 언제 졸업하냐고 물으시네요.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몇 년 더 걸린다고 했더니, 그저 '어쩌겠냐, 알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참, 태닝을 하거나 강력한 자외선 아래 무방비로 노출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태닝도 관심이 없고 강력한 자외선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선크림을 더 잘 바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임신할 계획이 있다면 미리 알려주어 상의해야 한다고 하시네요. 아무래도 여성 호르몬과 관련이 깊어 그런 듯합니다. 임신할 계획은 원래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 답했습니다.


원래도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운동의 비중을 늘립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짝꿍 덕에, 시간에 쫓길 때면 운동을 한 켠으로 미뤄두는 버릇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늘 할 일이나 공부를 다 못하더라도 운동을 미루지 않는다, 는 마음이 제 안에서 많이 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겁을 먹었던 것과 달리, 수영을 여전히 즐기고 있습니다. 수영장에서는 의외로 레이노 증후군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었고, 오히려 추운 날 야외에서 할 수 없는 운동이 많아졌기에 실내 운동으로서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식단에 좀 더 신경을 씁니다.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소화력이 떨어져 몇 년 전과 비교해도 먹는 양이 꽤 줄었지만, 워낙 먹성 좋은 짝꿍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경쟁심이(?) 생겨서 좀 더 먹게 됩니다. 이왕이면 건강한 식단을 꾸리려고 의식적으로 시간을 투자합니다.


방한 용품을 이것저것 사들입니다. 혼자 수축되는 말초혈관에게 그러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그저 따뜻하게 대해주는 수밖에요. 역시 눈꽃나라 캐나다라 그런걸까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정말 많았습니다.


추운 곳에 오래 노출되어 좋을 것이 없었기에 이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동차를 구입합니다. 제 손과 발이 얼지 않게 달려준 제 첫 차라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레이노를 물리치기에 가장 좋은 것은 짝꿍의 손이었습니다. 몸에 열이 많은 그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손이 따뜻합니다. 핫팩, 입김, 장갑, 등 그 어느 것도 그의 손을 잡는 것보다 신속하게, 쪼그라든 말초혈관을 확장시킬 순 없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 경험해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주 비현실적이지 않은 이상 가보고 해보고 먹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본업이 연구이니 연구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 넓디 넓은 세상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탐험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저와 가치관이 비슷한 짝꿍 덕분에 지금까지 기회가 닿는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생일을 중요하게 챙기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숱한 날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부턴 생일을 크게 축하하기로 합니다. 한 해를 잘 살아낸 것을 축하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잘 적응했고, 살아낸 오늘을 토대로 내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떤 날씨가 와도 내일을 따뜻하게 보낼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요.





keyword
이전 12화나도 아프고, 전 세계도 아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