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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프고, 전 세계도 아프고

흐엉

by 너굴이

종합시험을 준비할 때는 늦여름/초가을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어요. 제가 캐네디언처럼 계절 상관없이 탱크탑에 룰루레몬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이 걸쳐 입기 귀찮아 대충 입고 다녀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했어요.


집에서 3-4분 거리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뽀로록 굴러 나와 집 앞에 당도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손발의 색깔이 하얗게 변하는 것 아니겠어요. 손가락 끝, 발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감각이 마비되는 증상이 점점 자주 나타났습니다. 도서관에 갈 때, 도서관에서 돌아올 때, 혹은 실내에 있다가 실외로 갑자기 나갈 때, 등등. 마치 <겨울왕국>에 나오는 엘사가 내 손과 발에 입김이라도 분 것처럼, 그렇게 삽시간에 사지의 끝이 잠시 얼어붙었습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거나 입김을 불면 오래 지나지 않아 '얼음땡'을 할 수 있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하루에도 2-3번씩 증상이 나타나다가 시험 날이 다가오니 4-5번, 6-7번으로 점차 빈도가 늘었거든요.


인터넷을 대충 두들겨보니 "레이노 증후군 (Raynaud's Syndrome, https://www.mayoclinic.org/diseases-conditions/raynauds-disease/symptoms-causes/syc-20363571)"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옵니다. 왠지 제가 겪는 증상인 것 같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시험이 목전이었으니, 병원은 나중에 가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당장 의사를 만나고 싶어도 캐나다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전에 작성한, "전문의 소개받기" 글 참조, https://brunch.co.kr/@boyish-aaron/28). 기다림의 미덕을 일상에서 깨칠 수 있게 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학교 병원은 더더욱 느려 터져서 환자의 자가 치유력을 길러 줍니다. 의사를 볼 수 있을 시점이면 이미 병이 나아있는 경우도 많거든요. 무튼, 저는 여러 가지 일이 바빴던 터라 일단은 의사와의 약속을 1달 뒤 언젠가로 잡아두었고, 그렇게 "레이노 증후군"은 제 기억에서 조금 잊혔습니다.






종합시험 oral exam까지 끝내고 최종 통과를 통보받던 날, 친한 친구와 버블티를 먹으러 갔답니다. 왜 하필 그때, 그런 일이 저에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칼로 무 자르듯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버블티 가게 앞 버스 정류장에서 얌전히 버스를 기다리던 저의 네 번째 손가락 마디를 꿀벌이 꾹 찌르고 생을 마감합니다. 참고로 저는 꿀벌을 괴롭힌 적도 없고, 버블티를 질질 흘려서 꿀벌로 하여금 내가 꿀단지를 들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작은 꿀벌은 제 손가락 마디에 살포시 앉더니 자기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침을 사용하여 저에게 자신의 존재를 남기는 이유 모를 행동을 한 다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죠.


생전 처음 벌에 쏘였어요. 진짜 짜증이 솟구쳐서 벌에 쏘인 손가락을 팡팡 치고 싶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아픈데 쓰다듬을 수도 없고, 얼음찜질도 한계가 있고, 동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저는 벌침뿐 아니라 모든 곤충/해충의 침에 약간의 알러지 반응이 있는 유형이었습니다. 모기에게 물려도 물린 부위가 벌겋게 돋아 오르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 종종 가려움에 시달리는 불쌍한 유형입니다. 이것도 병명이 있더군요. "스키터 증후군 (Skeeter Syndrome, https://my.clevelandclinic.org/health/diseases/23289-skeeter-syndrome)"이라는 증상입니다. 저런, 또 증후군이네요.


종합시험을 통과한 기쁨을 꿀벌이 남기고 간 독침과 즐겨야 했던 제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서럽기 그지없었죠. 카톡으로 이역만리에 있는 짝꿍에게 징징대봤자, 아픔이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독침은 아주 작았지만, 그 독이 제 몸에 작용하는 과정은 꽤 맹렬하여 한쪽 손은 물론이고 팔꿈치까지 부어올라, 며칠 동안 침대에 누울 때도 닿지 않게 조심해야 했답니다.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알러지 약을 복용하며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불어 터진 불가사리에서 밀떡볶이로 조금씩 변해가는 손가락을 보며, 약간은 안심을 했던 것이 시기상조였나 봅니다. 2차 감염이 와서 다시 팅팅 불어 터진 불가사리가 되고 말았죠.


급한 대로 Walk-in clinic을 찾아갑니다. 대기시간만 무려 4시간을 호가하는 곳이지만, 손가락이 이러다가 터지고 말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의사는 제 설명을 듣더니 2차 감염이 의심된다며 항생제를 처방해 줍니다. 학교 병원에 예약해 둔 의사 면담도 있긴 하지만, 의사를 영접하기 귀한 곳이다 보니 일단 만났을 때 바짓가랑이 잡고 궁금한 것 다 물어봐야 합니다. 손 끝 발 끝이 하얗게 변한 사진을 보여줬더니, 의사가 약간 신난(?) 목소리로 외칩니다.


"Oh, you have Raynaud's!! (너 레이노 증후군 있구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대충 자가진단해도 아주 삐꾸날 확률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결론을 의사 선생님들은 싫어하시겠지만요.


레이노 증후군을 특별히 걱정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필욘 없답니다. 이게 별다른 원인 없이 생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primary case),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제 답을 듣더니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말 끝에 한 가지 단서를 남기면서요. "기저 질환이 원인이고 증상으로 나타나는 레이노 증후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제가 드라마 주인공이었다면, 이런 것을 두고 복선이라고 하겠죠? 시청자 모두는 알지만 나만 모르는 뭐 그런 것.






학교 병원 예약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독일병정처럼 차가워 보이는 의사에게 레이노 증상을 설명했더니 여러 가지 피검사를 시킵니다.

피검사 결과는 포털을 활용해 환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어 굳이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 면담을 다시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피검사를 했지만, 모두 결과가 정상이었고 의사가 다시 연락을 해 온 경우는 없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인상과 손이 차가웠던 그 의사는 본인이 먼저 2번째 면담을 하자고 요청해 왔고, 다시 만난 그 얼굴에서 약간의 머뭇거림을 발견합니다.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만 몇 가지 수치가 조금 이상하니, 확인 차원에서 검사를 더 해보자고 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가 약간 후회를 합니다. 피를 몇 병이나 더 뽑아갔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흑.


얼마 지나지 않아 피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온통 빨간색입니다. 정상 범위를 넘어선 결과에 red flag로 표시를 하는데, 여기저기 시뻘건 깃발이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차가운 인상의 의사는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합니다. 당최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자기 지식으로는 알 길이 없으니, 전문의 (specialist)를 소개해주겠다고요. 지금에서야 이곳에서 산 세월이 꽤 되어 각종 전문의도 만나고 어느 정도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지만, 당시는 전문의에게 의뢰된다는 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때였습니다. 대체 피검사 결과가 어떻기에 전문의까지 봐야 하는 거지, 언제 볼 수 있다는 거지, 싶었죠.


때는 11월을 향해 가고 있었고, 저의 종합시험은 진작에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산을 넘은 기쁨을 만끽하기는커녕,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경제학과 수업을 청강하고 있던 저는 여전히 도서관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답니다. 의뢰했다는 전문의 클리닉에서는 연락이 오질 않고 (그땐 몰랐지만, 전문의에게 의뢰를 하면 아주 급하지 않은 이상 평균 4-6주, 길게는 3개월까지 걸립니다), 제 속은 바짝바짝 타기 시작했어요. 한국이었다면, 리뷰를 참고해 가며 원하는 의사를 찾을 때까지 병원 쇼핑이라도 할 수 있지,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곳 상황이 너무도 답답하더라고요. 하루는 수업 숙제를 제쳐두고 피검사 결과를 한 번 직접 분석해 보기로 합니다. 구글링과 의학 저널 논문을 뒤져가며 알 수 없는 단어들과 수치를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이제야 이야기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요즘같이 ChatGPT가 아주 쉬운 언어로 잘 설명해 주는 시절도 아니었고, 오로지 구글링과 의학 저널에 실린 논문만 의존하여 제 피검사 수치를 해석하다가, 어느 순간 공포가 턱 하고 밀려왔습니다. 아직도 기억나요. 도서관 한가운데에서, 옆에는 제 친구가 이런 상황을 1도 모른 채 본인의 공부를 하고 있고 제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일에 몰두한 그 순간, 저 혼자 실체 없는 공포와 마주하며 손이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춰야 했던 그날을요.


왜 그러지 말았어야 했냐고요? 그날부터, 저의 불안과 공포 회로가 가동되었기 때문이죠. 참고로, 의학 저널에 실린 논문은 대부분 특이 케이스를 다루거나 대규모 연구를 통해 전반적인 추이를 보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케이스에 해당하면 생존율은 얼마고, 예후는 어떻게 나타나며, 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앓는 병은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 -라는 결론이 의학 논문의 포맷이죠. 일반적인 경향이나 확률을 알려주는 연구, 혹은 대단히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이라 연구 가치가 있는 연구들이 논문에 게재될 테니, 저 같은 머글이 그런 정보를 얻어봤자 무서워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생존율", "예후", "중대한 합병증"과 단어로 점철된 정보를 얻어낼수록 머릿속에서는 부정적 사고회로가 마구마구 돌아갑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제 상태에 대한 의사의 소견을 못 들었는데, 피검사 결과지만 갖고 얄팍한 지식 검색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 아니겠어요. 내 케이스가 어디에 해당되는지도 모르면서, 걸릴 수 있는 모든 병의 마지막을 설명한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턱이 없었죠.


매일같이 전문의 클리닉에서 올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별일 아닐 거야"라는 마음과 "큰 일이면 어떻게 하지. 짐 싸서 한국 가야 하나"라는 마음이 싸웁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전문의 병원에서 연락이 옵니다. 1월 초로 첫 진료가 잡혔어요. 무려 6주 만에 온 연락이었습니다. 캐네디언 친구에게 물어보니 6주 정도면 아주 느린 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바보같이 이 말에도 약간 덜컥 내려앉는 제 심장이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전문의 소개를 받을 일이 있으면 반농 반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연락 안 오는 거 보니 내 상태는 별 것 아닌가 보다"라고요. 네, 맞아요. 아무리 기다림의 미덕을 가르치는 캐나다 의료 시스템이지만, 응급환자일 경우 꽤 신속하게 대응합니다. 만약 전문의에게서 연락이 빨리 오지 않는다면 - 내가 대기 명단에서 누락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 나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로 삼을 순 있어요. 물론, 이곳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실수를 많이 하는지, 심각한 케이스임에도 환자를 누락시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경우가 없진 않다고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짝꿍과 보내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갑니다. 매일같이 자그마한 기온 변화에도 수시로 변하는 손 끝 발 끝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졌어요. 크리스마스에도 반팔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오키나와에서는 따뜻한 기후 덕에,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신조를 지닌 짝꿍 덕에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지냈습니다.


각자 캐나다와 일본에서 새 학기를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저는 또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문의와의 면담이 잡혀 있는데, 얼른 빨리 의사를 만나 이 불안의 정체를 알고 싶다가도,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렇게 날은 또박또박 흘러서 의사를 보는 날이 왔죠.


호빵을 좋아하실 것 같이 생긴 호호 할머니 의사는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벽안의 눈이 그렇게 따뜻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대충 이력을 검색해 보니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의료 활동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제 나이보다 긴 시간, 해당 진료과목을 담당하신, 찐 전문가였죠. 초진이라 그런지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문진과 신체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네가 어느 케이스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네. 신체 현상으로 나타나는 징후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지만 내가 궁금하니 피검사와 몇 가지 검사를 좀 더 해보자. 다만, 네가 많이 걱정하는 걸 잘 알겠으니, 다음 약속은 최대한 빨리 잡아줄게."


오랜 경력의 전문의를 만났지만, 그녀도 제 케이스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가장 빠르다는 다음 약속은 3주 뒤로 잡혔고요.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그 해 1월부터 한국에 들어갔던 4월 초까지는 제 인생에서 역대급의 불안과 공포를 안고 지냈던 시기였습니다. 수 차례에 걸친 피 검사과 전문의와의 면담 결과, 저는 자가면역질환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자가면역질환은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메커니즘이 똑같습니다. 자가항체를 보유하고 있고, 이 자가항체가 병원균이 아닌 환자의 몸을 공격합니다. 즉, 면역체계에 어떤 이유에서건 교란이 생겨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나를 지켜야 할 내 몸속의 세포가 되려 나를 공격하는 아이러니가 자가면역질환입니다.


두 번째 면담 날, 각종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면서도 뭔가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는지 할머니 의사가 코끝을 자꾸 찡긋거립니다. 현재로서는 자가면역질환 중에서도 발현될 병이 크게 2가지로 예측되는데 본인은 그중에서 A에 좀 더 무게를 두겠다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방 차원에서 미리 약을 먹는 것도 좋겠다고 권유해 주셨죠. 저는 묻습니다. 만약 A가 아니고 B로 발병되는 경우, 지금 예방 차원에서 먹고자 하는 약이 똑같이 예방 효과를 가지냐고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고 하시네요. 저는 약을 복용하는 것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겠다고 말한 뒤 병원을 나왔습니다.


이미 몇 달에 걸쳐 불안과 고민, 자가분석과 공포의 시간을 거쳐온 터라, 자가면역질환이 있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첫 피검사에서 red flag가 떴을 때 구글링과 의학 논문을 통해 대충 알고 있던 상황이었고, 초진 때 어느 정도 전문의의 소견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확정'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겠지요. 담담히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최종 진단 결과를 카톡으로 알렸습니다. 오히려 초진이었던 1월 초에서 재진 날짜인 1월 말까지의 기간 동안 추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고통스러웠고, 확정을 받은 날에는 오히려 '그런가 보다'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희귀 질환을 대하는 이 이야기는 앞서 종합시험을 준비하던 때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불확실성을 대하는 저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오히려 불안 회로를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저에게 해가 되는 상황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종합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떨어질지 모른다'라는 가정법적 상황에 매몰되어 저를 참 힘들게 했었죠. 이번에도 똑같았습니다. '언제 악화되어 죽을지 모른다'라는 가정법적 상황이 제 머릿속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매일을 보내며, 사실과 점차 동 떨어진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확진'을 받으면 어느 정도 수용이 되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생각하면 과도한 불안과 공포가 낳은 신체화 현상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정말 몸이 좋지 않아서 크고 작은 증상이 나타난 것일수도 있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2월에서 4월 초까지. 꼬박 2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생전 처음 죽음의 공포를 피부로 느낍니다.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즉, 대규모 연구이든 극단적인 케이스가 실렸든, 의학 저널 논문을 보면 모두 생존율을 논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생존율을 크게 낮추거나 예후가 좋지 않은 병에 걸릴 확률을 논하고 있지요. 저에게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단어에만 매몰되어 그 모든 논문의 결과를 마치 저에게 일어날 일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죠.


무서웠습니다. 이 질병이 악화되면 숨을 쉬기 어렵다는 둥, 시력을 잃는다는 둥, 심장에 피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둥, 그 모든 말들이 무서우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주 극단적인 케이스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죽음이라는 실체없는 대상보다 통증이 더 무서웠어요 (저는 아픈 걸 정말 싫어합니다 ㅠ). 이 즈음 만나기 시작한 제 상담가는 당장 구글 검색을 멈출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지요. 사람들은 큰 병에 걸리면 바로 '죽음'을 떠올리지만, 말기암 환자라도 단계가 있고 그 단계에서 우리에게는 미약하나마 선택의 여지가 늘 있다고. 당시에는 이 상담가를 갓 만난 시점이라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도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었어요. 상담가는 "네 말을 토대로 생각하건대, 지금 케이스가 중대하지 않고 그 질환을 갖고 있어도 여명을 다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글 검색을 멈추지 못했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지식 습득'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죠. 알아볼 만큼 알아본 다음에는 구글 검색이나 논문을 읽는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제 몸은 이미 불안의 정도가 역치를 넘을 때 생기는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력의 힘을 강조하며 '노오력'만으로 모든 것을 다 헤쳐나갈 수 있다는 투로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과정에서 정신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이다지도 클 수 있음을 매일같이 확인했습니다. 그 당시 제 뇌에서 일어났던 뇌파와 호르몬 변화를 어디 연구 용역하고 싶을 정도로요. 초진 날, 할머니 의사가 문진을 하는 과정에서 "식도염은 없니"라고 하던 시점부터 식도염이 생겨 아직까지 달고 삽니다 (의사 왈, 식도염은 자가면역질환의 주요 증상이라고 합니다). 갈비뼈 아래쪽이 어느 날부터 불편하길래 이것저것 검색했더니 비장이 커져서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가면역질환에 있어 비장 비대증은 흔한 증상이라고 하네요). 비장비대증이 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질환에 대해 또 빠삭하게 공부(?)합니다. 이 문제로 초음파를 2번이나 받았습니다만, 둘 다 해석이 달라서 저에게 혼란만 안겨주었죠. 한 번은 연골이다, 또 한 번은 칼슘석회화로 봐야 한다, 등. 한국에서 의사를 만날 때에도 두 전문의의 말이 달라서 혼란과 걱정만 가중시켰습니다. 한 명은 비장 비대증이다, 한 명은 그냥 갈비뼈다,라고 했거든요 (이후 몇 년에 걸쳐 수 차례 검사를 받았지만, 그 부분은 정말 연골이 반대쪽보다 조금 큰 것일 뿐이었습니다).


걱정이 태산이니 몸에서 소비하는 에너지가 응당 많겠지요. 물론 입맛이 없으니 먹는 것도 줄었고, 당연히 눈에 띄게 살이 빠졌습니다. 그래도 빵빵한 볼살이 늘 있던 편이었는데, 아래턱의 라인이 다 드러났지 뭐예요.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하니 병원에서는 또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시킵니다. 이것도 지금에서야 아는 것이지만, 갑상선 호르몬이야말로 컨디션에 많이 좌우되는 부분이라 (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2-3주 간격으로 측정해도 수치가 꽤 다를 수 있더군요. 당시의 스트레스 레벨을 생각하면 갑상선 호르몬이든 코르티솔 호르몬이든 정상 범위에 있을 리가 없는데, 마침 또 검사 결과가 비정상이니 제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겠어요. 살이 빠지는 것도 갑상선에 문제가 있어서 빠진다고 생각하고 말았지 뭐예요 (아니었습니다. 살은 그냥 빠진 거였어요).


그 외에도 소소하게 손가락의 모세혈관 확장증이 진행되면서 거스러미가 찢어져 헌다든지, 어지럽다든지, 손톱에 생전 처음 보는 이상이 생긴다든지, 뭐 기억하자니 자잘하지만 당시에는 저의 불안만 가중시켰던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진짜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 증상이 생겼을 수도 있죠. 특히 모세혈관 확장증은 할머니 의사도 면담 때마다 확인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진행 정도를 알 수 있는 척도이긴 합니다. 나머지 일은 그저, 하필 그 시점에 생겨 나를 더 무섭게 만든 일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당시에는 레이노 증후군, 체중 감소, 식도염, 모세혈관 확장증, 심하게 타는 추위, 등 이전에 없던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니 더 불안했을 겁니다.






박사과정 첫 3년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전에도 제 삶은 야행성의 삶이었습니다. 저혈압이 있어서 오전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든데다가 정말로 해가 져야 효율이 오르는 타입이었습니다. 때문에, 각종 큰 시험을 앞두고 수면 패턴을 맞추느라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대학원에서는 무수히 많은 데드라인을 앞두고 꼼짝없이 밤을 새우고 수면 패턴이 흐트러지는 일의 연속이었죠. 혼자 살면서 먹는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젊음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이겠죠. 이제와서 크나큰 후회를 했습니다. 수면장애나 치우친 식습관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는 것은 굳이 의학 논문에서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알죠. 마치 내가 겪는 일이 과거의 내가 잘못 살아서 벌어진 일처럼 느껴져,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안타깝지만, 수면의 중요성을 절절히 느끼면서도 밤에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불을 끄는 순간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할까 봐 겁이 났거든요. 매일같이 어슴프레 해가 뜨면 그제야 약간의 안도와 함께 잠을 청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려앉은 저녁 어스름과 칠흑 같은 밤이 두려웠어요. 여권과 비상연락망, 그리고 제 증상을 적은 쪽지를 늘 머리맡에 두고 잤습니다. 일본에 있는 짝꿍이 하루에도 2-3번씩 전화를 하고 틈틈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혼자 집에 있는 그 상황에서 온 집안을 잠식하는 저의 불안과 공포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어요.


서서히 상실감이 몰려왔습니다.

왜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겨울 스포츠는 물 건너간 일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만). 외부 온도 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타나는 레이노 증후군이 제 신경을 긁었어요. 실제로 레이노 증후군은 말초 혈관이 일시적으로 크게 수축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에, 레이노 증후군이 나타난다 해서 자가면역질환이 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원인 질환이 심해져서 레이노 증후군이 더 빈발할 순 있지만요). 당시에는 레이노 증후군이 나타나면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몸을 둘둘 감고 나가봐도 습기 가득한 찬 바람에는 장사가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겨울 스포츠, 추운 지방으로의 여행은 이제 포기하고 살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해 버렸어요. 좋아하는 수영조차 이제는 굿바이구나, 손가락 끝이 차가워질 수도 있고 건반을 두들기다 보면 손톱이 상하게 마련인데, 피아노도 이제 조심조심 쳐야 하는구나, 등등. 일상에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 없고 과도한 상실감에 사로잡힙니다.


식단과 운동에 대한 강박도 조금씩 생기고 있었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 보자고 필라테스와 요가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양파를 싫어했지만 면역력을 키우는 데에 좋다고 하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 2달 동안의 식단은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늘 일정했습니다. 마치 그것만 먹어야 살 수 있을 것처럼요.


실제로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엔 나다니기 힘들어졌고, 멘탈도 정상이 아니니 연구에 제동이 걸린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다행히 지도교수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 이런 개인적 고민을 털어놓는 일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일단은 종합시험을 끝낸 것에 만족하고, 몸 상태를 지켜보면서 다음 스텝을 생각하자고 말하더군요. 당시는 박사과정 3년 차 2번째 학기이지만, 제 연구와 관련된 일은 거의 못하고 있어 죄책감이 커지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이 마음가짐이 더 큰 긍정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앞선 화에서 코스웍을 마치고 종합시험을 마칠 동안 지도교수 수업을 듣지 못한 상황을 말씀드렸죠. 제공되지 않으면 내가 개설한다는 마음으로, Direct Reading이라는 것을 만들어 관심 있는 학생들 몇몇을 모아 지도교수의 지도 하에 수업을 진행합니다. 미쳐 돌아가는 정신상태와 하루가 멀다 하고 골골대는 몸과 달리, 이 수업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수업 실라버스를 만들었고, 제 관심사를 반영한 수업이었으니 재미없을 리가 없지요. 다만, 몸과 마음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수업준비를 하고 참석할 때를 제외하고는 칩거하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밖에 나갈 때마다 나타나는 레이노 현상을 보는 것도 스트레스였거든요. 각종 방한 용품을 이때부터 사재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장갑을 껴도, 스노우 부츠를 장만하여 신어도, 외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다 못해 말초 혈관이 수축해 버리는 상황은 제 해결능력 밖이었어요. 당시 점점 바깥출입을 꺼리게 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3월이었을까요. 짝꿍이 일본에서 캐나다로 잠시 들어옵니다. 그리고 곧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봉쇄조치를 취하죠. 부랴부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수업이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바람에 짝꿍은 한국으로 일단 피신(?)합니다. 외국인 신분이기에 일본에서건 캐나다에서건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규모 확진이 이어지더니 짝꿍이 있는 일본에서도 단체 확진 소식이 들려 제 불안을 가속화합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도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해 버렸죠. 학교 내 모든 시설이 닫혔고, 도서관, 연구공간, 체육시설, 등 모든 것이 무기한 폐쇄였습니다.


저도 한국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캐나다에서 호호 할머니 의사를 잘 만난 덕분에 여러 피검사를 할 수 있었지만, 뭔가 20%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전신을 스캔해서라도 문제가 있을지 모를 부위를 찾아 보겠다는 생각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합니다. 하지만 당시 전 세계는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던 시점이라 패닉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한국행 직항 항공편이 취소되더니, 미국 경유 항공편으로 바뀌기를 5-6차례 반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항공편이 바뀌면 그냥 취소하고 캐나다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항공사에서 인천직항 특별기를 띄운다는 소식을 짝꿍이 알려줍니다. 평소의 비즈니스석에 준하는 가격으로 이코노미석이 팔리고 있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전혀 아니었어요. 고객센터 안내원과 통화하기 위해 전화기를 3시간 붙잡고 있었고,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좌석을 확정합니다.


한국을 다녀오겠다는 제 말에, 할머니 의사는 몸조심하라며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아직 어떤 바이러스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화장실도 가지 말고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마스크는 2시간에 한 번씩 교체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007 작전의 요원이 된 마음으로 아주 철저하게 소독약과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준비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도 지방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갈 방법이 요원하여, 마침 서울에 있던 짝꿍이 저를 인천에서 대전으로, 아버지가 저를 넘겨받아(?) 대전에서 집으로 태워갑니다.


평소 같으면 빨랐겠지만,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이해서일까요.

한국 대학병원에서의 검사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거의 6주에 걸쳐 이 검사 저 검사를 받고, 겨우 최종 진단(?)을 받을 수 있었어요. 문제는 그 최종 진단이 호호할머니 의사의 진단과 달랐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병을 내가 갖고 있단 말인가 - 저는 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불안회로의 끝은 어떤 결론으로 매듭지어질까요.

다음주에 또 이어나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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