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 밖에 드릴 말이 없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 빌 뿐입니다.
2년짜리 코스웍이 다 끝나면 종합시험 (comprehensive exam)을 준비해야 합니다. 3년 차의 시작을 장식하는 중요한 과제인 동시에 박사과정 전체를 통틀어 처음 맞이하는 큰 산인 셈이죠.
한 학기에 수업을 꼬박 3개씩 들어야 한다는 요건은 지금 생각해도 소화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다른 학과 박사과정생들이 1-2과목만 소화하며 바로 연구에 돌입하는 것을 볼 때, '우리 과는 왜...'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관찰값을 보면 주로 사회과학/인문과학의 경우 코스웍을 마치고 연구에 돌입하게끔 설계된 편인 듯합니다. 소수의 경우 코스웍을 듣는 동안 본인만의 연구에 매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건상 쉬운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종합시험 준비를 위해 학과 내에서 조언도 구하고 지도교수와 면담도 거쳤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코스웍을 마무리했지만, 지도교수의 수업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왔던 첫 해에는 안식년이었기에 수업이 당연히 없었고, 2번째 해에는 지도교수가 맡을 줄 알았던 수업을 다른 교수 A가 맡았었거든요. 물론 수업의 학수번호는 제 주전공의 과목이었고 저도 그 수업을 듣긴 했지만, 문제는 해당 과목이 워낙 방대한 영역이라 교수에 따라 다루는 내용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도교수가 그 수업을 맡으리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어차피 박사과정은 자기가 알아서 연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도 제 연구주제와 관련된 수업은 한국에서 석사 때 들은 것이 좀 더 많았고, 박사과정에서는 주로 방법론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미나 수업 위주로 들었으니까요.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첫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들었던 수업보다, 제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주체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읽었던 논문과 데이터가 훨씬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연구에 바로 돌입할 수 있도록 코스웍 부담을 좀 줄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늘 들어요. 하지만, 큰 틀에서 내 연구 주제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시각이 필요하니 그런 것들을 함양할 수 있게끔 코스웍을 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아직은 제가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 않아 이 문제에 대해 저만의 답을 내리기가 조금 어렵네요.
하지만 코스웍과 별개로 지도교수의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은 조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다음으로 제 연구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이고 저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인데, 무슨 껀덕지가 있어야 저를 평가할 것 아닙니까. 아, 물론, 앞으로 숱한 세월 동안 제 괴발새발 쓴 글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줄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무언가 '공식적'인 지표가 있는 것이 모양새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다못해 추천서를 쓰더라도 "얘가 내 수업에서 얼마만큼 잘했고 어떤 학점을 받았는데"라고 나가는 것이 더 명확하지 "얘는 진짜 잘했는데, 정말 잘하거든, 아, 내 말 믿어보라니까"이라고 하면 말의 신빙성이 좀 떨어질 테니까요.
학과 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저의 첫 코스웍 2년은 이미 다 지나갔으니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밀어붙였습니다. 지도교수와의 수업을 제가 만든 것이죠. 대학원 과정에는 "Direct Reading"이라는 형태로 교수와 학생이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수업이 있습니다. 제공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겠다, 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종합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2년 차 여름방학 (5월-8월) 동안에 그 수업을 듣는 것은 무리일 테니, 일단은 종합시험을 3년차 1학기에 마치고 그 다음학기에 수업을 시작하자고 지도교수와 합의를 했습니다. 다음 화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들은 박사과정 수업 중 가장 뿌듯하고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었던 수업이었어요. 수업의 방향성을 잡는 것부터 제가 깊이 관여했고, 학생 모집, 리딩리스트 작성, 과제 구성, 등 전반적인 수업 개설 과정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답니다. 지도교수는 크게 강압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학생이 가져오는 제안이 적절해 보이면 오케이 사인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폭풍 같았던 마지막 학기 수업을 마치고 바닥까지 방전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느라 5월을 다 보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울어재끼며 과제를 해댔으니 회복에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이란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어요.
앞서 종합시험의 구성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https://brunch.co.kr/@boyish-aaron/85).
다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시험은 3과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과목은 주전공 과목으로 이뤄집니다. 시험형태는 Writing down 3문제를 택하거나 혹은 writing down 2문제 + Qualifying paper 1문제를 작성하는 것인데, 보통은 이 Qualifying paper를 다음 큰 산인 연구계획서 및 디펜스에 활용하라는 조언을 많이 듣습니다. 아무래도 시험은 시험인지라 답안을 작성하고 나면 휘발되는 측면이 강하지만 페이퍼는 써 놓으면 어떤 형태로든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여 저도 두 번째 옵션을 선택합니다.
Qualifying paper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이 과목을 채점할 교수와 2-3차례 면담/의논을 통해 리딩리스트를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학생 스스로 리딩리스트를 만들고, 해당 논문과 연구를 섭렵한 후 이를 기반으로 페이퍼를 작성하는 것이지요. 아직은 데이터가 없을 테니 주로 기존연구 검토의 형태로 많이 접근합니다. 이 부분은 크게 어려움 없이 시작했고 작성 및 제출까지 까다롭지 않았던 것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이 페이퍼를 채점할 교수와 관련하여 또(!) 예상하지 못한 에피소드가 생기지만, 다행히 종합시험 단계에서는 아직 그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평가내용은 모두 수긍할만한 수준이었어요. 물론 고쳐야 할 부분이 많고 부족한 점이 많이 지적되었지만, 시험은 시험이니 회생불가능한 "진정한 찐따"인지 발전의 여지가 있는 "찐따"인지만 잘 가려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Writing down 형태로는 주전공 코어 과목과 세부과목을 치기로 합니다. 여기서 제 종합시험 드라마의 서막이 올라가는데요. 코어 과목은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수업이고 나름 준비를 많이 했었기에 자신이 없진 않았어요. 공부할 때에는 압도되는 느낌이 있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 전형적인 루트를 보여준 과목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세부과목이었어요. 앞서 지도교수가 수업을 할 줄 알았는데 다른 교수 A가 했다는 그 수업, 기억나시나요? 네, 그 과목이었습니다. 지도교수와 교수 A가 회의를 합니다 (보통 종합시험 문제를 낼 때 해당 분야와 세부과목을 맡은 교수들끼리 협의하여 문제를 냅니다). 지도교수의 과목으로 시험을 볼지, 교수 A의 과목으로 볼 지. 수업을 들은 것은 교수 A의 수업이었으나 제 연구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지도교수 버전의 수업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 A의 수업은 제 박사논문에 유의미하게 쓰일 것 같지 않았고, 이왕 해야 한다면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을 공부하여 시험 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저는 수업도 듣지 않은 과목을 혼자 공부해서 시험을 치겠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물론 지도교수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1년의 절반을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며 5대양 6대주의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란 어려웠습니다. 큰 방향을 잡아주고 몇 가지 책을 추천해 줬지만, 그 이후에는 제가 맨땅에 헤딩으로 이 과정을 헤쳐나간 기억이 나네요. 이 세부과목이 마지막까지 어마어마한 불안을 안겨줬답니다.
한편, 거주 공간에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살던 기숙사에서 이사를 나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지요. 짝꿍은 당시 1년짜리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가게 되어 어떤 형태로든 둘 다 이사를 나가야 했어요. 첫 2년 동안 제 집이 되어준 기숙사에는 여전히 많은 추억이 파묻혀있습니다. 그만큼 좋았던 곳이고 짝꿍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니 의미가 각별하지요. 하지만 코스웍 과정이 끝나면서 점차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필요한 재료로 아무 때나 제 입에 맞는 식사를 준비할 수 있고, 주변의 소음이나 파도로부터 차단되어 오롯이 혼자 집중할 그런 공간이요. 다 같이 지내는 대형 기숙사는 아무래도 방음에 취약하고 기숙사 생활의 특성상 오며 가며 마주하는 인원들이 너무 많았기에 제 에너지 레벨이 낮을 때에는 이 조차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사를 나온 곳은 캠퍼스 내 다른 기숙사였습니다. 제가 주로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가까워 좋았습니다. 일단은 원베드룸으로 짐을 옮기고 나니 새삼 저 만의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조용한 침실이 반갑더군요.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짝꿍은 자잘한 짐을 제 공간에 둔 채, 비행기를 타러 갑니다. 2년 차 내내 24시간을 같이 붙어있던 사람의 존재가 한순간에 사라지니 기묘했습니다. 그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오니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먼지가 나풀나풀 내려앉는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혼자 있는 공간이 고요했습니다. 침대 머리맡에 둔 짝꿍의 장난감이 어딘가 의연해 보이기까지 했죠. 대학시절 내내, 자주 내려가진 않았지만 부모님 댁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마다 시큰해지는 눈을 감추고자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나이가 좀 더 드니 오히려 쾌활하게 인사를 하는 편이 나도 상대도 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억지로라도 농담을 던지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늘 돌아서서 눈을 비비며 역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헤어짐을 잘 못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짝꿍을 보내고 나니 시험 날짜가 거대한 현실감으로 다가왔어요. 그로부터 약 한 달 정도는 미친년 널 뛰듯이 지낸 것 같아요. 규칙적으로 먹고 자야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닥치는대로 시험준비에 매진했어요. 잠자고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부에 쏟아부었는데, 하루에 입 한 번 안 떼는 날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힘들다고 투정 부릴 새도 없이 그저 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죽었다' 생각하고 한 달만 버티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결론이 정해진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긴 합니다만, 짐작하시듯이 종합시험은 잘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저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과에서 종합시험에 실패한 "훈련 과정 조기 탈락자"의 사례가 잊을만하면 들렸기 때문이지요. 가장 최근의 케이스는 저도 아는 사람이었기에 불안은 더더욱 극대화되었습니다. 그 사례를 두고는 말이 많았어요. "훈련자의 능력 부족이다"는 주장도 있고, "코치(지도교수)가 미친놈이다"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답안을 본 적도 없고 그 지도교수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저로써는 이 상황을 판단할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였지요. 그저 "떨어질 수 있다"라는 명제에만 과하게 집중하여 제 불안회로를 무한가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화에서 제 어려움을 지도교수에게 넌지시 전달해 줬던 little bird, 기억하시나요. 같은 과 선배였던 그 little bird는 이번에도 "그 시험에 떨어질 리가 없다," "만약 네가 그렇게 형편없다면 판다곰선생(저희의 지도교수)이 미리 말을 할 텐데 그런 게 아니지 않으냐," "더 찐다 같았던 친구도 통과했다," 등의 말로 저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단 한 건의 부정적인 사례에 온 마음을 빼앗겨버린 저로서는 확률의 개념을 다르게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에게 일이 생기면 100프로, 안 생기면 0프로"라는 마인드로 말이죠.
시험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매우 절박했다는 기억은 납니다. 그저 방대한 양을 읽고 요약하고 기출문제에 맞춰 모범답안을 작성해 보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수업을 듣지 못한 채 혼자 준비해야 했던 세부과목 때문에 아무리 준비를 해도 자기 효능감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불안해졌어요.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데 아직 읽을 논문은 이렇게 많단 말이야...??'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도서관에 앉아 20oz 커피를 하루 2잔씩 들이켜고, 연구실에서 혼자 밤을 새우고 새벽 4-5시에 귀가를 해봐도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악몽을 꾸는 것은 디폴트입니다. 크나큰 벌레가 뛰놀고 저는 늘 살인자나 귀신에게 쫓기며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가뜩이나 예민한 저였으니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음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식욕이 뚝 떨어져 눈에 띄게 살이 빠진 탓에 얼굴이 보기 안타까워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어쩌면 결과가 나쁘지 않았기에 "아깝다"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내 노력이 부족했어"라며 모든 원인을 저에게 돌리고 있겠지요. 결과와 상관없이 잘할 것이라 믿고 시작하는 것과, 잘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시작하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 그것 하나만 믿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생항로를 나아가는 것 아닐까요. 시험 준비를 해 나갈수록 확신이 조금씩 더해졌고, 마지막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불안감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직도, 불안회로의 스위치가 꺼지지 않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한 꼭지라도 더 머리에 집어넣으려 도서관에 앉아 있던 날들이 생생합니다.
드디어 시험날이 밝았습니다.
비장하게 초콜릿을 잔뜩 준비하고 학과 사무실로 향합니다. 시험은 비어있는 교수 연구실에서 학과 랩탑을 사용하여 홀로 답안을 작성합니다. 총 2과목을 작성해야 하고 한 과목 당 2시간이 주어집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제공되며 그중 가장 자신 있는 문제를 골라 답안을 작성하면 됩니다. 제가 준비했던 문제가 보이는 순간 신나게 자판을 두들깁니다. 약간의 흥분이 더해져 타이핑이 아니라 드럼 두들기는 수준으로 쳐 댑니다. 중간중간 초콜릿을 입에 까 넣으면서 기억력이 오롯이 작동하길 바랍니다. 4시간 동안 도합 15-16페이지를 작성하고 USB에 답안을 저장합니다. 첫 번째 답안은 나름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 번째 답안에서는 좀 더 깊게 들어가야 했을 부분을 시간 제약의 문제로 약간 대충 넘어가긴 했으나, 일단 제출합니다.
학과 사무실에 USB와 랩탑을 돌려주니 제 답안을 출력하고 도장을 찍어 줍니다. 4시간이 호로록 지나갔는데, 왜인지 모르게 후련하다는 느낌보다는 허무하다는 감정이 가슴께를 지배합니다. 이 4시간을 위해 그렇게 불안에 떨고 나를 믿지 못하는 나날을 보냈단 말인가. 짝꿍과 친구에게 필답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늘도 꾸리꾸리했네요.
그즈음, 짝꿍도 본인의 종합시험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그 과는 3과목 모두 에세이로 작성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짝꿍은 해외연수를 간 곳에서 원격으로 첫 번째 에세이를 마무리하던 중이었죠. 목표는 연수 프로그램 시작 전 에세이 제출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짝꿍의 랩탑이 말썽을 부립니다. 3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화면이 흔들리는 중증에 시달렸거든요. 마지막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데드라인은 다가오는데, 기계가 그 모양이니 짝꿍도 스트레스 적잖이 받았을 겁니다. 제 집에 두고 간 랩탑이 눈에 들어오네요. 아직 oral test가 남았지만, 저의 필답고사를 마친 주말을 활용하여 일본으로 랩탑 배달을 갑니다. 2박 3일을 위해 캐나다에서 일본으로 날아가는 돈지랄을 했지만, 온몸 가득 허무함에 절여져서 혼자 집에서 쭈굴 대느니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기분 전환할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비싼 랩탑 배달을 마치고 오니 oral test 날짜가 잡혔네요. 1주일가량 준비할 수 있어 제가 제출한 답안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에 골몰합니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지요. '이제 한 단계 넘었으니 오럴 테스트만 잘 보면 되겠다' 라는 마음이 아니라, '혹시 내 답안이 형편없어서 오럴테스트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어쩌지'라는 부정편향적 생각에 치우칩니다. 그러다 보니 또 매우 열심히 오럴테스트를 준비하죠. 물론, 열심히 한 경험은 좋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열심히' 만으로 이 과정을 기억하기엔 여러모로 마음이 아픈 경험입니다. 어차피 불확실한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텐데,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서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해 스스로를 많이 괴롭히고 종래에는 나를 상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하간 1주일 정도 끊임없이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oral test 날이 왔습니다. 지도교수랑 전공과목 chair를 담당하는 교수 배석 하에, 2시간 정도 문답 시간이 이어졌어요. 지도교수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여 좀 버벅댔지만, 시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화기애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다들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고, 질문도 제가 미리 준비한 질문 위주로 나왔습니다. Qualifying paper를 채점한 교수는 참석하진 않았지만 질문지를 Chair 교수에게 보내 대신 질의하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질문이 더 나왔고 아주 아름답진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보완하면 되겠다'라는 선에서 페이퍼도 무난하게 넘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대단히 괜찮아서 통과시켰다기보다, '진짜 찐따'는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특정 기준만 넘으면 그냥 통과되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같은 단계였다고 생각합니다. 네, 좀 많이 어려운 필기시험이요.
잠시 밖에서 대기하는 시간 5분을 거치고, 다시 구술 시험장으로 소환되어 종합시험을 잘 통과했음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습니다. 이로써 2년 차 여름방학에서부터 3년 차 첫 학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모든 단계를 지나고 나니, '그러지 말 걸' 이라는 가벼운 마음이 드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이 과정을 지나치게 과하게 받아들여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2년 차 코스웍과 종합시험은 조금 가볍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물론 이 단계부터 슬슬 훈련장 퇴소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불안이 더해질 수 있음은 잘 알지만, 그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었어요. 물론 확신을 억지로 빵 굽듯이 만들어 입으로 집어넣을 순 없지요. 확신을 가지려면 자기 효능감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 많았어야 했는데, 저의 경우 종합시험을 치르기 직전 2년 차 코스웍은 자기 효능감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시간이었고, 종합시험과 관련해서도 주변의 실패 사례에만 골몰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어떤 결과를 하나의 원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죠.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졌기에 그에 따른 자기 확신이 수반된 측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에 와서야 지난 세월 다 겪고 얻은 것도 있고 배운 것도 있으니 이렇게 멋있는 척 이야기할 수 있다고 치지만, 그 좁다란 빨대 같은 과정을 통과할 때에는 불안이 몰려오든 확신이 오든 그저 그 단계를 거쳐갈 수밖에 없었겠죠.
박사과정의 첫 번째 큰 산을 넘은 것을 축하한다며 지도교수는 어디 가서 좀 쉬든가 놀든가 하고 오라는 덕담(?)을 건네죠. 그렇지 않아도 짝꿍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낼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음 학기에 진행할 Direct Reading도 틈틈이 준비하면서요.
언젠가부터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던 것을 애써 무시합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날씨 탓으로 돌렸어요. 그 동안 많이 힘들었고 살도 빠졌으니 단순히 체력이 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면서요.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자, 또 다른 드라마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