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입국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첫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안식년이긴 해도 종종 연구실에 나온다는 판다곰 교수와 캐나다에서의 첫 만남을 가졌어요. 무슨 말을 나눴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서울에서 봤던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띠고 대뜸 던진 이 말 한마디는 아직 생생히 기억합니다.
"My goal is to make you happy here."
저는 동양인의 신비로운 미소를 입에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습니다. 어떤 (미친) 지도교수가 학생의 행복을 우선시하겠습니까. 실적에 집중하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판다곰의 그 말이 100% 진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말을 처음 꺼낼 때에도 진심이었고, 쭉 진심이었고, 앞으로 저뿐 아니라 어떤 학생이 와도 똑같은 진심으로 똑같은 말을 할 겁니다.
판다곰선생은 그 이후 제가 이 여정을 헤쳐나가는 데에 있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웃기지도 않지만, 1년 차 (훈련) 과정을 지배한 느낌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유학을 나오는 데에 성공했고, 초심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앞으로의 일은 제가 계획한 대로 잘 이뤄질 것이라는 청운의 꿈을 꾸고 있었거든요. 얼마나 그 꿈이 푸르렀냐면, 이제 막 박사 시작한 주제에 박사 마치면 또 무슨 일을 벌여볼지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니까요. 아하하, 지금 생각하니 진짜 어이가 없네 ㅋㅋㅋ
제 대학원 생활 첫 2년 동안 소중한 집이 되어준 곳은 대학원생들만 지낼 수 있는 기숙사였습니다. 전체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되니 인종과 국적 상관없이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큰 다이닝 홀에서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같이 하고 각종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다 보면 하이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착각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갖가지 공식/비공식 행사가 많았는데 그 덕분에 캐나다 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Gala Party가 있었고요. 영화에서나 봄직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애들이 입고 나타납니다. 9월부터 돌아가는 학기에 맞춰 한 달에 한 번씩 굵직한 모임/파티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9월은 친목 도모 행사 겸 welcoming party, 10월은 Halloween party, 11월은 Thanksgiving, 12월은 Christmas/Holiday season 및 종강 기념 파티, 등 아주 다채롭습니다. 1월이 되면 새 학기 및 신년 축하 행사, 3월은 가장 큰 규모의 founder's club 행사, 4월은 종강파티 등등, 1년 내내 공식행사만 해도 이 정도였어요. 나중에는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친한 무리와 각종 친교와 정서를 도모합니다. 같이 이 도시를 탐험하거나, 각종 학교 문화/스포츠 행사에 참여하거나, 술 먹고 클럽을 가거나 (대학원생도 노는 건 똑같습니다), 테니스 치고 수영장 가고, 해변에서 야간 음주와 모닥불 파티를 즐기고, 다음날 해장으로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거나 주말에 만두 빚거나, 등등. 정말이지 모임을 만들자면 끝도 없이 만들 수 있을 환경이었어요. 꼭 친한 친구들이 있어야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차를 빌려서 스키리조트로 놀러 갈 때는 거의 3-40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단이 움직이기도 했고요.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 때문에 친하지 않아도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저 수다를 떨 기회가 있거나 하면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어요. 혈기왕성한 남녀가 모여있으니 각종 로맨스도 넷플릭스 시리즈 저리 가라 싶을 정도로 매일같이 시즌을 바꿔가며 29금 버전으로 생성됩니다. 그 덕분에, 그리고 이 도시의 성향과 맞물려서, '(남녀사이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 ㅎ
인연이란 휘발성이 강한 것이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와 비슷한 직업/생각/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졌다가도,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생기면 언제든지 멀어지는 것이 사람 간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숙사에 살면서 인종과 국적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도시나 나라로 떠난 경우도 많고 연락을 잘하지 않아 지나간 인연이 되었지만, 그때의 저를 외롭지 않게 해 준 그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수위를 넘나드는 제 영어 실수에 웃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저의 이야기,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제 넋두리들을 다 들어준 친구들은 그때 그 시절의 한 토막으로 머물러 있네요. 그들 덕분에 낯선 환경을 낯설다고 느낄 새 없이 무사히 안착했습니다. 어디에 있건 다들 잘 살고 있길, 그저 건강히 자신의 삶을 잘 가꿔나가고 있길 바랄 뿐입니다.
처음부터 이 기숙사를 들어오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저 혼자 '운명'이라고 느낄 만한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숙사 라운지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예쁘게 앉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뉴욕 인턴쉽을 가기 전까지 성인 피아노 학원에 출근 도장을 찍었었는데, 그 이후로는 유학 준비다 뭐다, 바빠서 다시 시작할 엄두를 못 냈어요. 캐나다에 가면 어디서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기숙사에 도착한 첫날 라운지에 그것도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니! 누군가 바다 건너 먼 길을 온 저에게 큰 선물을 내려준 것 같았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두들겨댔어요. 그러다 보니 피아노 박사 전공하는 친구와 친해지기도 했고요. 기숙사에서 우리끼리 만든 house concert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제가 너무 시끄럽게 두들겨서 소문이 난 건지 교장(기숙사 사감이 아닌 principal이 있습니다)이 직접 founder's dinner에서도 연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어요. 기숙사 연중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라 식전 연주는 주로 음악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이 맡는데, 머글인 저에게도 그 기회가 오다니.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캠퍼스에 살면 각종 학교 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아는 사람만 아는 예쁜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기숙사에서 가까웠던 덕에 혼자 바다 보러 자주 내려가기도 했고요. 고즈넉하니 사람도 많지 않아서 통나무에 누워 낮잠 자기 참 좋았습니다.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 분위기답게 학교 체육시설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유학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복싱을 배우고 있었던 터라 여기서도 계속할까 싶었지만, 아직 주변 지리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몰라 잠시 접어두기로 합니다. 대신 국제대회 규격으로 드넓게 뻗은 수영장을 보고 너무 기뻐서 꺅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수영장은 내 거야, 히히.
전반적으로 훨씬 건강한 패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침/저녁은 기숙사에서 제공되니 한국에서처럼 바쁘다는 이유로 식사를 소홀히 할 일도 없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죠, 심지어 운동량도 늘렸죠. 한국에서의 패턴에 비하면 정말 훌륭한 변화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수면장애가 생겼습니다. 원래도 야행성 기질이 있어 늦게 잠들고 잠드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한번 잠이 들면 잘 깨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밤사이 최소 3-4번 깨거나, 잠을 자고 있어도 주변의 작은 소음이 다 들리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아침엔 늘 머리가 무거웠어요. 처음에는 비가 많이 오는 이 도시 특유의 기후 때문에 몸이 적응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양상이 너무 길어지니 조금 이상했어요. 그렇게 또 다른 패턴의 수면장애가 서서히 생깁니다.
캐나다에서 병원이라니.
제가 잘 모르는 시스템이라 조금 꺼려졌지만 학교에서 운영하는 클리닉을 가보기로 합니다. 몇 가지 문진을 하던 의사는 약처방을 해주고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어요. 하지만 약 이름이 졸피뎀이라서 그냥 먹지 않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정신과 약물에 대한 불신은 아니었고요. 다만, 신경전달 물질에 영향을 주는 약을 이 시점에 먹는 것이 조금 꺼려졌습니다. 한국에서 나올 때 각종 약을 예방적 차원에서 처방받아 왔었는데요. 게 중에는 두통이 매우 심할 때 먹는 약이 있었습니다. 수면 장애가 반복될수록 두통도 심해지기에 혹시나 하고 그 약을 먹었었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느낌. 수업 시간에 집중을 1초도 할 수 없었고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조금 멍청하게 들렸어요. 제가 먹은 약 성분을 살펴봤더니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주는 약이더군요. 늘 먹던 약이 아니라면 제가 사전에 잘 알아보고 먹었어야 했는데, 아는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것이라 방심한 제 잘못이었습니다. 매주 리딩과 과제가 벅찬데 생활리듬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약 복용은 뒤로 밀려나고 수면장애는 제 친구가 되어 갑니다.
당시에는 '왜 이러지'라는 생각만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수면장애는 제 내면 깊숙이 박혀있는 불안의 방증이었을 겁니다.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절대 명제가 제 의식의 방에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박사과정에 막 들어왔을 뿐,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니까요. 그 과정을 '생존'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나중에 언급할 이야기이지만, 제 상담가도 이 부분을 지적했었어요. 너는 왜 "survival"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냐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저는 이 '훈련과정'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인식한 겁니다. 모순적이게도 캐나다에서의 삶이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유학을 나오게 되어서 한시름 덜었고, 이제 내 할 일만 또박또박 해 나가면 된다며 마음을 놓던 그 시점이었습니다. 당시의 제 답답함을 심리학을 전공하던 친구에게 털어놓았었는데요. 그는 제 고민을 다 듣고 망설임 없이 이렇게 툭 던집니다.
"You are stressed by not being stressed enough"
아, 이 말을 대체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에서처럼 늘 동동거리면서 살지 않는 이 잠깐의 시간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제 마음이 불안에 잠식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첫 학기 수업은 3과목을 들었습니다. 방법론 수업 2개, 미국정치 수업 1개. 방법론 수업은 필수 과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미국정치 수업은 그냥 학점을 채우기 위해 선택했습니다. 지도교수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고 커미티 멤버로 생각하고 있던 교수도 수업을 개설하지 않는 터라, 그나마 관심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미국정치 수업을 택했어요.
수업에서 유의미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늘 느꼈지만, 제 나름대로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간 리뷰도 좋았고, 첫 학기 성적도 나쁘지 않았거든요. 아, 물론 박사 과정에서 알파벳/숫자로 매겨지는 성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교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부분이에요. 아무래도 특정 연구의 전문성을 기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수화된 성적이 개별 연구자의 전문성을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점수화된 성적을 보고 '내가 바닥은 아니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삼았던 듯 합니다.
물론 아직 한국인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불과 1-2달 전까지 한국에 있었는데 그 마인드를 버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죠. 당당하게(당당한 척) 손을 들고 발언을 이어나가면서도 속으로는 각종 질문이 요동칩니다. '내 답이 답이 아니면 어쩌지, 저 교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등등. 맞아요. 지금 생각하면 하등 쓸모없는 생각입니다. 그 수업의 교수가 맞다고 생각하는 답을 맞혀봤자 뭐 하겠습니다. 제가 리딩을 하면서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맞는 나의 답을 찾고, 그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능력을 배워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만, 당시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니, 몰랐어요.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저렇게 초연한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훈련을 거쳐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제 연구주제 - 즉 저의 깜냥이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 방대한 정치학의 내용을 제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 학자와 교수들 역시 자기 분야에 있어서만 전문가일 뿐이거든요. '내가 바로 전문가올시다'라고 주장하려면 그 특정 영역을 골라서 찜하고 침도 좀 발라놓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아직 수업을 겨우 따라가는 '학생' 입장에서는 자기가 무슨 연구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에 있는 모든 것을 섭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한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일이 생길 때 자책이나 자기혐오로 이어지기 쉬워요. '공부한다는 사람이 이것도 모르다니'라는 식의 자기 비하 프레임을 씌우기 마련입니다. 저도 한동안 이 프레임에 갇혀서 저를 콕콕 찔러대다가 비로소 제 연구 주제가 잡히고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인 다음에야 이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미국정치 수업을 괜히 들었나 봅니다. 제 내면의 목소리에 오랫동안 영향을 일으킨 사건이 생겼거든요.
미국정치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평소에도 여학생들 목소리만 잘 못 듣는 교수였습니다. 제 발표날이 되었는데 어쩐지 그는 수업을 마무리할 기미를 보이지 않더군요. 그 탓에 저는 20분간 말해야 할 내용을 10분 동안 매우 빠르게 말하고 마쳐야 했습니다. 한국어로도 그렇게 말하면 핵심이 전달이 잘 안 되는데, 가뜩이나 남의 나라 언어로, 첫 학기 첫 발표를 하다 보니 저도 긴장해서 발표를 망쳤습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수업 직후 피드백을 요청했더니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Most Asian women speak softly (아시아 여성들 대부분 말소리가 작지)".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제 미국 친구가 그 말을 듣고 저를 보며 눈이 똥그래집니다. 지금 같으면 인종차별로 학과에 보고해 버렸을 텐데, 그때는 그런 말을 듣고도 잘 몰라서 헤- 거리고 있었네요. 물론 그 교수는 악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순수하게 모두를 돌려까버리는 신묘한 능력을 갖고 있어 학과 내 많은 동료 교수들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음 발표 때에는 정해진 시간을 확보해서 나름 잘 마쳤지만 (그래서 그 교수가 잘했다는 의미로 윙크를 날렸지만), 이 교수는 제 기말 과제를 읽고 가차 없는 평가를 남깁니다. 내야 할 과제가 2개였는데, 하나는 어찌어찌 써냈지만, 두 번째 과제는 제가 생각해도 정말 '공들인 쓰레기'인 상태로 냈거든요. 첫 학기 기말 라이팅이 5개 정도 되다 보니 정말 정신력 싸움이 되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번째 과제에 우리의 Mr. 직설 교수는 이렇게 코멘트를 남깁니다.
"I don't understand why your final paper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your first one. Currently, your command of English is a problem (이 과제는 첫 번째에 비해서 왜 이렇게 그지 같아? 네 영어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와우. 제가 남이 던진 짱돌에 크게 처 맞고 오랫동안 허우적댄 적이 20살 이후 딱 3번이 있는데요. 이 사건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지도교수와 다른 학과 내 교수님께 이 이야기를 어렵게 터 놓았을 때, 두 분 모두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자기도 똑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시더군요 (두 분 다 native English speaker는 아닙니다만 학술적/일상적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미국정치교수의 성향이 원래 그러하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도 해주셨고요. 제가 아는 한 선배는, 그 미국정치교수가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가장 공평하게 모두를 돌려 까는 사람이며, 심지어 자기 논문을 꼼꼼히 읽고 코멘트 달아준 유일한 교수였다고도 했어요. 잘 생각해 보면, 이 미국정치교수는 제 거지 같은 기말 과제를 고통스러워하며 읽고 진심 어린 조언을 직설적인 형태로 내뱉은 것뿐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제 두 번째 과제의 완결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아니, 제가 지금까지 했던 과제 대부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과제를 위한 과제였고, 제 연구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죠. 지금처럼 내 연구를 한다는 생각, 즉, 본질적으로 다른 자세로 임했다면 모든 과제가 조금은 더 의미 있었을 겁니다. 영어가 부족하다면 proofreading을 거쳐서라도 냈겠죠 (그 이후에는 모든 과제를 원어민의 proofreading을 거쳐 제출했습니다. 쪽팔려서요). 그 교수의 직설적인 말은 둘째 치고, 결국은 내 과제가, 그리고 내 마음가짐이 덜해서 발생한 일이라는 생각이 컸습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주어진 리딩을 좀 덜하더라도 내 과제를 하는 데에 집중했을 겁니다. 훨씬 더 미리 시작하고, 과제와 관련해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등, 본질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분명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도 매주 수업을 똑같은 가중치와 중량의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1주에 8-900페이지나 되는 영어 논문은 제가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빨리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어야 하는데, 저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스타일 탓에 꾸역꾸역 참다가 퍼지는 미련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죠. 여담이지만 운동할 때도 비슷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몸을 다치다 보니, 이 나이 먹도록 자기의 한계도 모르고 이게 무슨 바보짓인가 싶더라고요. 이제 와서 고백이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것은 결국 내 줏대가 별로 없다는 뜻 아니었을까요? 지기 싫어서 끝까지 하는 것도 있지만, 어쩌면 저 스스로 중요함의 경중을 따질 안목과 기준을 갖지 못했으니 권위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도 지금의 깨달음을 갖고 가지 않는 이상 똑같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크겠죠. 결국 이 깨달음도 무수히 많은 맨 땅에 헤딩과 다치고 낫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러다가 저 만의 작은 동산(aka. 연구주제)을 찾게 되면서 같이 따라온 것일 테니까요.
이렇게 첫 학기가 얼레벌레 끝납니다. 미국정치 수업에서 처 맞은 기억의 여파는 꽤 오래 이어져서 나중에 결국 상담가를 찾아가는 이유가 되는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풀어볼게요.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로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허우적거린 제 시간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역시 부정적인 기억은 그물망을 빨리 빠져나가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첫 해 첫 학기 전반을 지배한 느낌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맞습니다.
일단 뭐 미국 정치 수업을 제외한 나머지 수업에서는 잘하고 있었고, 저도 점점 이 학술적 환경과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거든요. 때마침 한국에서 마무리한 석사 논문의 일부를 북챕터로 출판합니다. 물론 한없이 부족하지만, 제 석사 논문에서 파생된 작품(?)을 3개 정도 세상에 던져놓고 나니까 석사 과정을 잘 마무리한 것 같은 도취감이 몰려오더군요.
그렇게 마무리한 첫 학기를 뒤로 하고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두 번째 학기가 연달아 시작됩니다. 한국에서 익숙했었던 겨울방학의 존재 따위 없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휴일만 보낸 다음 3주 만에 다음학기에 시작되는 '기현상'을 겪은 것이지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짧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다음 학기를 시작하려니 꽤 피곤했습니다. 지금의 시선에서는 긴 겨울방학이 되려 이상하지만, 첫 해에는 이렇게 학기가 연달아 진행되는 것조차 적응의 대상이었네요.
두 번째 학기는 주전공 과목의 코어 수업과 세부주제수업을 들었습니다. 코어 수업은 담당 교수 덕분에 대단히 친화적인 수업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저는 미국정치교수에게서 받은 상처를 조금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세부주제 수업은 대단히 명망있는 학자였던 교수가 진행했는데, 기대와 달리 수업 내용이 너무 재미없었습니다. 이건 그 교수 탓이라기보다 그 과목에 관심이 없음을 발견한 제 탓이겠지요. 그리고 늘 깨닫습니다. 연구 능력이 출중한 학자라 하여 반드시 훌륭한 선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수업조교(TA)를 시작합니다. 의도가 매우 불순했어요.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말하는 것, 수업시간 토론하는 것으로는 그놈의 '(my) command of English'를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tutorial이 있는 수업 조교를 해보기로 합니다. 한국에서와 달리 이 곳에서는 조교가 tutorial을 진행하는 수업이 있는데요, 말 그대로 조교의 지휘아래 또 다른 수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로 교수가 수업시간에 다룬 내용을 실전에 적용해보는 형식으로 수업이 구성됩니다. 모든 수업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아니고 주로 입문용/개론 수업에서 tutorial을 많이 포함시킵니다. 이러한 tutorial을 맡음으로써, 단순히 수다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나를 노출시키자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제가 영어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남을 가르쳐야 하니 여러 번 연습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국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결론적으로는 저의 목적에 부합한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첫 TA 경험도 만만치 않은 에피소드를 생성했지만, 일단 뜻깊은 경험이었어요. 가르치는 자, 즉, '선생'에 대해 한국과 캐나다가 이토록 다른 시각을 갖고 있음을 직접 겪을 수 있었고, 제가 좋은 선생님 자질(teacher-material)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렇게 첫 해의 두 학기를 마무리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이했습니다. 원래 대학원생은 방학에 더 바쁘고, 또 바빠야 한다고 하지요. 학기 중에 하지 못한 연구나 방법론 공부, 그리고 필드워크 등을 해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첫 여름방학에는 굳이 바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어차피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날들이 바쁠 테니까요. 주변을 봐도 가족 여행을 계획하거나 몸과 마음을 보살피거나 등의 목적을 위해 첫 여름방학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한국에 잠깐 들렀다가, 미국의 어느 도시에 있는 2주짜리 방법론 수업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학과에서 등록금과 여행 비용을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요. 원래 1년 차는 잘 안 보내주는데 어쩌다 보니 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이 방법론 수업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어느 정도 연구 주제에 대해 복안이 생긴 3년 차 이상에 가라고 하겠지만,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다. 방법론이란 연장도구 (tool box)와 같아서, 내가 무슨 가구를 만들지 알아야 그 연장도구가 의미 있는 것이긴 하나, 어떤 연장도구가 있는지를 알아야 무슨 가구를 만들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른바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주 해맑은 1년 차에 방법론 수업을 다녀오는 바람에 연구주제와 특정 방법론을 접목시켜 볼 기회를 갖진 못했지만, 어차피 갈 일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1년 차 방학에 다녀온 것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여름 동안에는 한국 지도교수님이랑 공동 프로젝트를 계속하거나, 테니스 수업을 듣는 등, 캠퍼스 라이프를 깨알같이 즐겼답니다.
암울한 2년 차가 저 멀리서 시커멓게 다가오고 있음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우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