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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Dec 05. 2024

[특별기획 2.0] 정치학 무용론

원래는 예정되어 있지 않던 목차입니다만, 평소에도 갖고 있던 제 고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생겨 특별 편성했습니다. 정치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개인적인 고민입니다. 






정치학뿐 아니라, 어느 분야든 '전문가'의 배지를 달고 활동하는 것은 꽤 자부심 넘치는 일이겠습니다. 어쩌면 저도, 어릴 때부터 꿈꾸던 목표가 피아니스트도 외교관도 아닌 '전문가'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서 빨리 도달하고 싶었던 그 단계였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전문가'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미 전문가라는 말은 아니고요. 다만, 전문가로 불릴 때 그 입에서 나가는 말과 판단능력의 무게는 일개 머글로 지낼 때와 비교할 바가 되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확신에 찬 말을 줄이게 되고,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나 봅니다. 


세상이 하수선하고 매일같이 따라가기도 벅찬 일들이 뻥뻥 터질 때, 제가 걷는 이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치현상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현상은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당장 저의 경우만 봐도, 오늘 디카페인 대신 챠이라떼를 마시기로 결정하는 과정에 그 어떤 '합리성'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그저 특정 음료를 '마시고 싶다'에 충실한 신경전달 물질이 이런 결정을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론을 만들기 위해, 일반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를 어떻게든 설명해 보기 위해, 이 합리적/비합리적 현상은 이론적 틀이라는 허구의 장치로 욱여넣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단순화 작업을 거치고 parsimony (덧: 이론의 간결함) 라는 미명하에 많은 가지치기가 일어납니다. 이론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의 구체적인 현상만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고유명사를 동원해야 하는 '서술형' 작업이 아니라, 보통명사와 일반화된 명제를 통해 여러 가지 현상을 관통하는 틀을 제시하는 것이 이론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trade-off가 필요한 수밖에 없겠지요. 


정치학 이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합리성을 전제로 깔고 만들어진 이론이 설명하는 이 세상을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냐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정치학도의 길을 걷는 제가 무력함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를 규정하는 요건이 아주 다양하겠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지점토처럼 뒤섞여 뭉친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서 개별 요소를 분리하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 능력이라고 불러왔고 그것을 함양하기 위해 갖은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계엄과 경고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지위에 있느냐에 따라 한 집단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구성된 이 사회의 필수불가결적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어떤 제도를 가져와도, 심지어 플라톤이 말한 철인군주가 현실에서 실현되더라도 막을 수 있는 길이 요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웠다면, 지식인이라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란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저이지만, 배움이 주는 대승적이고 긍정적 효과는 비교적 절대적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조차, '절대'란 절대 없다는 명제가 결국 옳았음을 깨닫는 일이 생깁니다. 


교민들 사회에도 가지각색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게 중에는 정보 공유를 위한 장도 있고 중고거래를 위한 장도 있는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한 플랫폼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 어느 곳도 정치적 공방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플랫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조차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는 행위가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도 정치관과 종교관은 사적 영역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믿기에 부모님과도 정치적 견해를 나누지 않습니다 (나누지 말자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개인의 가치관이 '사적' 영역으로 국한될 수 있을 때 성립합니다. 


누군가 이 폭정에 규탄한다는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다들 가족과 친지가 한국에 있으니 멀리서 애타는 마음을 표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득달같이 '정치적 공방'이 이뤄지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댓글이 떠오릅니다. 눈을 의심했어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야말로 '배운 자' 였거든요. 취지는 이해했습니다. 정보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에서 정치적 공방을 일으켜 시끄럽게 하지 말자는 것이겠지요. 


묻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이 내리는 '정치적 공방'의 정의가 무엇인지. 물리적 폭력이 동반된 행위도 정치적 공방입니까? 그 사람의 정치적 견해가 어디에 경도되어 있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어느 정당, 지도자를 지지하든 상관없습니다. 개인의 자유이니까요. 하지만, 계엄을 정치적 공방, 그것도 '사적' 견해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그 '배운 자'의 판단능력이 제 뒤통수를 크게 쳤습니다. 계엄과 경고를 구분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전문가'의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입에서 계엄과 사적/정치적 공방을 구분하지 않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머리가 멍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이 글은 순전히 그 느낌 때문에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 어쩌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지극히 편협하여 오히려 전체를 반영하지 못하는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리적(physical) 수단에 의지하여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을 우리는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그 행위가 개인 간에 발생한다면 폭력에 그치겠지만, 그 행위가 집단 차원에서 발생하면 물리적 충돌이 되고, 국가 차원에서 이뤄질 때는 전쟁이 됩니다. 물리적/군사적 수단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는 경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고는 상대가 '억지력 (deterrence)'를 갖고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억지력은 나도 상대도 (핵) 무기로 무장했을 때나 성립합니다. 


써야 할 글이 많은데, 각종 데드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저를 기다리는데, 문득 그 연구를 마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라는 허무가 찾아왔습니다. 새벽부터 귀를 의심하며 잠에서 깨어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영상을 보느라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연구실로 출근을 해 봐도, 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일찍 하루를 접어야 했습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도 여러 번 느껴야 했습니다. 차라리 '동물'이니'식물'이니 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싸울 때가 나았습니다. 화면에서 총구가 보였습니다. 실탄이 있었는지 여부가 중요할까요?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군인들의 모습에 더 울컥함을 느꼈습니다. 짝꿍의 조카 친구 중 군 복무를 하는 아이들이 휴가를 즐기다가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87년 헌법체제라는 것을 교과서로만 배웠습니다. 그 제도의 존재를 이렇게 피부로 체감하는 날이 올 줄,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이미 제도가 정착하여 시행되는 것과, 그러한 제도조차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구성원들은 제도라는 안전망 속에서 행위 예측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상호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습니다. 어느 제도도 완벽하지 않기에 제도의 부족한 점은 제도적 절차로서 보완합니다. 이를 통해 제도의 안전성을 담보하고 그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나 국가의 안정성도 꾀할 수 있습니다. 그 제도에서는 분명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에게 취할 수 있는 '엄중한 경고'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폭력이 동원되는 순간 제도는 힘을 잃습니다. 그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 전문가이든 그렇지 않든 - 각자의 지식과 경험으로 제도를 이어왔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피로 제도적 장치에 간신히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일견 효율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폭력에 의지하고 싶을 수 있지만, 구성원의 동의를 바탕으로 만든 제도를 하룻밤에 엎을 수 없다는 데에 다들 동의했고 노력했기에 지금까지 제도가 이어져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계엄과 경고를 구분하지 못한 행위자를 제도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허무가 밀려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경고를 줄 의도였다'는 말로 돌이킬 순 없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요. 한 나라와 몇 십 년간 이어져 온 제도를 뒤흔든 6시간짜리 그 사태는 앞으로 길고, 깊고,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봉합하기 힘든 상처를 남길 겁니다. 


제가 하는 연구와 제가 쓰는 논문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각종 전염병이 휩쓸고 웃기지도 않은 일이 일어날 때에도 배움과 앎을 위한 저의 노력이 그래도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 존재의 의사결정과 행위를 설명하려는 이 학술적 행위가, 무너진 제도 앞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정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은들, 누가 지도자가 된다 한들, 오늘의 이 일을 어떻게 치유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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