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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an 05. 2025

[특별기획 3.0] 정치학 공부하면 다 정치하냐고요?

"저요? 저, 정치학 전고..ㅇ..."


사람을 만나다 보면 호구조사를 당할 때가 있죠. 나이, 직업, 무슨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지, 출신학교, 결혼여부, 등등. 오늘 처음 만났어도 제 신상을 10분이면 다 털어갈 수 있는 어르신들의 능력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제가 정치학 전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들었던 몇 가지 정형화된 반응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어릴 때 멋 모르던 시절 순수하게 다 털어놓을 때의 이야깁니다. 요즘은 호구조사를 당하면 "놔 외쿡 싸롸서 구뤈거 멀라요우" 라고 합니다). 



"어허허, 나중에 국회에서 보겠구먼, 이 사람!" 

전도유망한 장래를 점지해 주시는 유형입니다. 가장 흔한 유형이죠. 늘 "어우, 아니에요, 저는 정치 관심 없어요"라고 손사래 쳐봤자, 이 분들의 머릿속엔 이미 제가 국회의원 배지 달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17대부터 22대 국회의 의원 프로필을 다 뒤진 적이 있는데, 정치학 전공 별로 없습니다. 네, 이제 제 말 믿으세요, 제발. 


"우와아... 멋있어요....!"

순수한 감탄 유형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별로 멋있지 않고요, 님이 지금 생각하시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인물들 - 대대로 정치인 집안 출신에, 아는 사람 중에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수두룩 빡빡하며, 장차 정치계에서 탐내는 인재 같은 뭐 그런 - 과 거리가 일억 광년 정도는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거 아니고 대부분 이럴 겁니다. 


"(급 흥분한 목소리로) 아니! 잘 만났구먼, 그쪽 공부를 하는 양반이라고 하니 내 뭐 하나 물어봄세, 요즘 나라 꼬라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라의 흥망성쇠를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애국시민 유형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는 나라 꼬락서니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 전공은 한국정치가 아니라 정치경제인걸요... 나라의 존망에 대해서는 한국정치를 다루시는 분들께 물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아, 뭐, 물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한국정치 교수님도 추석이나 설 명절에 친척분들께 혼난다고 하시더라고요. "네가 뭘 아냐"면서. 






정치학과 정치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생겨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성됩니다. 


학부 시절 이야깁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부모님이 계시는 도시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늘 다니던 수영장을 갔습니다. 수영장에는 이른바 '고인 물'이라고 하는 아주머니/아저씨/할머니 등등이 계신데 그분들은 나이도 들지 않으시고 그 모습 그대로 늘 수영장에 계십니다. 그래도 그분들과 한참 같이 새벽 수영할 때에 비하면 제가 키도 좀 더 크고 하여 못 알아보실 법 한데, 저를 알아보신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호구조사가 시작되었죠. 뭐, 관심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어머, 너굴이 오랜만이네!! 대학은 갔고? 그래, 어디 갔대??"

실내 수영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질문을 느끼며, 어쩌고 저쩌고 겨우 대답을 합니다.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이 돌아오죠. 

"무슨 전공이야?"

"정치하..ㄱ..."

"아이고야, 이번 대선에서 큰 경험을 했겠네!!"


그 해가 아마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였을 겁니다. 참고로 그 대통령과 저는 미세먼지 입자 한 단위만큼의 친분도 없습니다. 그저, '정치학'이라고 하니, 또, 그 대통령과 제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 추정할 뿐입니다.  


짧은 에피소드지만, 이것이야말로 정치학과 정치가 구분되지 않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정치학은 정치 '현상'을 분석하고 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입니다. '현상'을 분석하기 때문에 지나간 일, 즉,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연구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점치거나 누가 대선에서 승리할지, 뭐 그런 작업은 여론조사 기관이나 월드컵 문어, 혹은 역술인의 소관입니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국 모델링의 문제라서, 데이터가 방대하고 모델링을 전문적으로 하는 여론조사기관 혹은 그런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나 정치 평론가의 몫입니다. 월드컵 문어와 역술인의 데이터 및 모델링 능력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니 접어두겠습니다. 


반면 정치는 그야말로 현실, 그리고 오늘 일어나는 일을 다룹니다. 어떤 학위를 어디서 받았든, 사실 그런 지표가 정치능력과 연결되는 경우는 많이 없습니다. 현실 정치판에서 각자의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나와 아군에게 유리한 결과를 합법적이고도 합목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타인을 식별하는 행위 기저에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본질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유수의 학자들이 내린 정치에 대한 정의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위와 같은 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간단한 정의를 두 개만 소개할까요.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 (Carl Schmitt)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저서에서 정치를 '아와 피아를 구분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아, 물론 이 사람의 배경이 문제가 될 순 있습니다. 나치의 계관법학자였거든요.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정치학자로서의 칼 슈미트의 면모만 따져보겠습니다. 실제로 그가 만든 정치에 대한 정의는 정치학 개론 수업에서 많이 인용되는 문구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라는 정의는 당대 독일이 겪고 있었던 엄청난 혼란 속에서 나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했으며, 나치즘이 슬슬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였죠. 그런 상황에서 강한 권위를 가진 국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처럼 정치와 도덕을 구별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을 겁니다. 즉, 옳고 그름의 문제와 적과 동지의 대립에 관한 문제를 분리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정의로는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는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 (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for the society)'이라 보았죠. 여기에는 '가치배분'에 대한 체계적 기능, 권위적 결정,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작용이라는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힘으로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적절하게 배분해야 하고 그 결과가 사회 전체에 미친다는 고려를 담고 있으며 그 과정이 체계적이고도 정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뭐, 물론, 저의 정치학 전공임이 드러났을 때 정치인으로서의 미래를 미리 점지해 주시는 분들께 이런 '학술적' 논의를 제안하진 않습니다. 그냥 웃고 넘기면 될 일이지요. 저는 현실 정치야말로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국회의원 배지 달고 있는 저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 깜냥과 기질을 잘 알고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씨름판 안에서 직접 싸우기보다, 적당히 멀리 떨어져서 현상을 분석하고 다른 씨름판과 비교 분석하는 일이 훨씬 더 재미있는걸요. 






그럼 정치학 박사학위 받고 뭐 해서 먹고 사는지 궁금하시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으면 다른 박사학위 소지자가 그렇듯 대체로 학계에 남을 생각을 합니다. 즉, 연구 중심 대학 교수직을 희망하죠. 물론, 정형화된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특히 pathway가 많이 다양해져서 굳이 연구 중심 대학에 남을 필요도 없고, teaching의 비중이 높은 teaching college로 가기도 하며, 정부/공공기관, 연구기관/think tank, 컨설팅 회사, 사기업, 등등 여러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연구중심 대학에 남을 경우, 어느 나라의 교수직을 희망하냐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크게 보면 '인정'받을 때까지 실적을 내야 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습니다. 북미 기준으로 말씀드려 볼게요. 


먼저 박사를 받으면 Post-doctoral position (포닥)을 생각합니다. 제 지도교수님이 job market에 나갈 때에만 해도 (거의 20년 전이네요...) 이 포닥은 그렇게까지 필수요건이 아니었고, 몇몇 이름 높은 프로그램만 2-3년의 기간을 두고 있었는데, 포닥이 필수가 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포닥에서는 주로 publication에 집중하지만, 요즘은 '포닥'이라는 미명하에 한 학기에 2-3개씩 강의를 해야 하는 의무조항을 두는 등, 연구자로서의 포닥의 지위가 조금 흔들리는 모양새도 보입니다.


포닥도 잘 마치고 전쟁터 같은 job market에 나가서 tenure-track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고 칩시다. 북미에서는 tenure-tracked position이라고 할 때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직으로 이해하시면 되는데요. 이름과 달리 그렇게 간단하게 정년을 제까닥 보장해주진 않습니다 (이 부분이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임용 후 7년 뒤 tenure 심사를 받고서야 비로소 정년 보장이 되는 것인데요, 학교마다 그리고 계약 조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그 첫 7년 동안은 다들 죽어납니다. 논문도 아무 데나 게재할 수 없고요, '이름 있는' 탑 저널에 게재를 해야 인정해 줍니다. 학부/대학원 수업도 해야 하고, 이제 지도 학생도 받아서 지도해야 하죠. 교수가 되었지만 각종 행정처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매미 번데기의 마음으로 겨우 박사학위를 받고, 겨우겨우 job을 잡아서 이제 매미가 되어보나 했을 텐데 행정처리의 지옥이라니, 아하하. 그렇게 7년이 지나 Tenure 심사를 통과해도 associate professor입니다. 한국의 직제로 따지면 '조교수'라는 거죠. 아직 '정교수 (full professor)'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습니다. 이 또한 학교/학과/계약조건마다 다를 텐데, 조교수에서 정교수로 진급을 못하면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퇴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일반화하기 힘들 듯합니다. 진급을 못해도 정교수직에 미련 없고 계약직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는 등,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정교수로 진급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 편인데, 임용시점을 기준으로 15년에서 20년까지 다양합니다. 


첫 임용에서 조교수, 그리고 정교수까지. 그 관문을 거치면서 개인의 쓸모를 증명할 방법이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publication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들 미친 듯이 쓰고 투고하고 수정하고 게재하게 됩니다. 물론, 연구를 발표하고 논문이나 책의 형식으로 남기는 일은 중요합니다. 박사란 결국 고도의 전문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고, 그 전문적 의사소통은 주로 글의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publication의 본질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양의 논문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줄이 달려있으니까요. Publication machine이라며 학계에 남아있는 학자들의 삶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meme이 퍼진 지는 정말 오래되었습니다. 다들 알지만, 이 구조적 굴레를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는 거죠. 위에서 말했듯, 우리 모두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양산되는 박사로 인해 고용시장이 포화상태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졸업 후 몇 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연구중심 대학에 자리 잡는 패턴을 보여왔습니다.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요. 물론, 이전에도 본인이 뜻한 바가 있어 학계가 아닌 다른 직종을 (non-academic pathway) 희망하던 사람들이 없진 않았습니다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박사까지 받아서 학계에 남지 않을 거면 뭐 하러 박사 받았냐'라는 사고방식이 보여주듯 전문가가 되어 학계에서 활약하는 것이 주된 경로였기 때문이죠. 여담입니다만, 전문가가 되어 또 다른 세상에서 활약하고 싶지만 지도교수의 핀잔이나 비협조가 두려워 자신의 꿈을 숨기고 박사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고 이 좁은 놀이판의 학계/교수직을 향한 공고한 신념도 조금씩 무너뜨립니다. 제가 속한 학과에서도 코로나 이전에는 non-academic pathway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마이너 취급 했었거든요. 하지만, 먹고사는 일에서는 장사가 없죠. 게다가 학과는 늘 취업률에 민감합니다. 졸업생들 모두가 교수가 되길 원하는 것보다 그들이 어디에서든 자리를 잡는 것이 모양새가 더 좋죠. 그리고 현실을 조금씩 직시한 듯합니다. 학계만 고집해서는 모두가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크게 환영하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non-academic pathway workshop'을 여는 등, 어느 정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결국 돌고 돌아 제가 던져야 할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잡마켓이 힘들다, 먹고살기 녹록지 않다, 물가가 비싸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이런 이야기는 늘 있어 왔고 (물론, 전염병, 전쟁, 우경화가 한꺼번에 터질 줄은 몰랐겠지만요), 지금 세상이 태평하다 할지라도 언제 뒤집힐지 알 수 없는 것이 삶입니다. 


그렇다면 주변의 잡음을 차단하고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작년 여름 내내 저를 휘어잡고 있던 어떤 목소리였어요. 그 목소리는 제 밥벌이에 관한 문제, 그 이상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어떻게든 박사 학위 하나 취득한 후 흘러가는 대로 흐르면서 살 것인가. 이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들이 말하듯이 포닥을 하면서 SSCI급 논문을 몇 개 내고, 인맥을 넓혀서 대충 괜찮은 대학에 발 붙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할 것인가. 생물학적 나이를 계속 먹고 있으니 이제 그만 적당한 곳에 정착해서 배우자와 자식을 낳으며 '정상 가족'의 프레임에 속할 것인가. 도돌이표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뼈 빠지게 돈을 모으고 집을 장만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다가 은퇴 후 취미생활 좀 하다 저세상으로 가고 말 것인가. 


연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연구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 길에 서 있으면서 제가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스스로를 향한 인정이었습니다. 어떤 타이틀을 따야만 인정이 되고 타이틀이 없으면 인정을 할 수 없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의 영역은 아닙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일하길 원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까요. 다만, 스스로 나를 전문가로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정말,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길 바라는 마음이었고 이 '타이틀'을 거머쥐는 과정이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했기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말했듯이 '타이틀'이 주어진다는 것은 운전면허증을 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필기시험, 장내기능, 그리고 도로연수를 마쳤으니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이지, 이 자격이 반드시 운전을 '잘' 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지요. 결국은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교통 법규를 잘 지키고, 도로의 교통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훌륭한' 운전자로서의 모습은, '어떤 운전자가 될 것인가' 라는 자문자답 끝에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매일같이 운전을 하게끔 실천도 해야겠지요. 


저는 스스로에게 쪽팔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갑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가거나, 나라를 좌지우지 해 보거나, 돈을 아주 많이 벌거나,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언젠가 끝날 이 삶을 좀 더 뿌듯하고 재미있는 기억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세상이 험난하다 해서 순간의 욕심으로 제 눈을 가리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연구 실적 압박에 시달려 자기 표절을 일삼거나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남 앞에 나서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차라리 자신 없으면 '못 하겠다' 라는 말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남길 바랍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과 내 손에서 나가는 글이 나가지 않는 것보다 못한 일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학계와 연이 닿으면 그곳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더 넓은 세상에서 활약할 수 있다면 그것도 아주 좋겠습니다. 다만, 누군가 나의 '전문성'이 필요해서 저를 찾을 때, 제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을 때, 내 욕심이 내 눈을 가리지 않길, 내 일의 무게를 잘 생각해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길, 그저 그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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