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및 학교 내규에 따르면, 박사과정생은 종합시험 통과 후 12개월 안으로 연구계획서를 발표하고 공식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Proposal Defense라 부르는데요.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주제와 방법론으로 논문을 쓸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과정을 도와줄 논문 Committee members (보통 3명)을 확정합니다. 이들에게 연구계획서를 심사받고 정식으로 "defense"에 성공하면 공식적으로 박사과정 후보생 (phd candidate)이 됩니다.
종합시험을 치고 나면 다들 초주검이 되어 들로 산으로 나다니거나, 유학생의 경우 고국을 잠시 방문하거나, 등의 방법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줍니다. 잠깐의 휴식을 즐긴 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연구계획서를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는데,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친 상황에서 모든 계획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말았네요. 기술의 발전으로 수업이나 근무를 온라인으로 진행함으로써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이어진다고는 하나, 모든 일이 온라인으로 대체될 순 없겠죠. 연구계획서 단계에서 이미 가볍게 fieldwork(현지조사)를 다녀와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궜으니 연구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사람이 속출합니다. 아직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 않은 단계에서 약간의 계획 변동이 생기는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 큰 문제가 안 되겠습니다만, 본격적인 연구 단계에서 fieldwork를 반드시 가야 하는데 발이 묶인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 것이죠. 이는 특정 장소를 가느냐 마느냐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현지조사의 핵심은 데이터를 구하기 위함인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 데이터를 구하지 못하면 해당 연구를 엎어야 합니다. 주제를 바꾸거나 해당 주제를 다른 종류의 데이터로 들여다볼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하죠. 이 과정이 그렇게 만만치 않을뿐더러, 새로운 주제에 맞는 데이터가 하루아침에 뚝딱 나타날 리도 만무합니다. 제 주변에도 fieldwork를 가지 못해 연구 주제를 바꾸는 사람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용시장 역시 얼어붙었으니 졸업을 목전에 두고 job market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졸업을 연기하는 경우도 왕왕 생겼습니다.
저는 다행히 본격적인 fieldwork에 뛰어들 단계는 아니었고, 말 그대로 연구를 "계획"하기만 하면 되는 단계였지요. 연구계획서란 본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에 앞서, 내 연구주제에 대해 기존 연구는 어떤 답을 내놓았고, 나는 어떤 차별화된 관점이나 답을 제시할 것인지, 그리고 그 답은 어떤 방법을 통해 도출할 것인지에 대한 작업을 의미합니다. 즉, 대부분의 작업이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편이라 수중에 데이터가 없어도 하늘이 무너지는 단계는 아니란 뜻이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종류의 고민에 직면합니다. 코스웍도 마치고 종합시험도 마쳤으니 몇 개의 큰 산을 넘었다 할 수 있겠지만, 정작 제가 할 연구의 복안이 그렇게 뚜렷하게 서 있는 상태는 아니었거든요. 주체의식을 갖고 지도교수를 들들 볶아 진행한 Direct Reading을 통해 진득하니 생각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수업은 수업이고 연구는 연구였습니다. 즉, 연구에 적합한 접근 방법은 수업을 소화하는 것과 차이가 있었지요. 게다가 연구계획서의 핵심은 데이터인데, 어떤 데이터를 어디서 구할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흐릿한 상태였습니다. 연구"계획"을 발표하는 단계이니 완벽한 데이터와 확실한 결과값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무슨 데이터를 찾아볼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있어야 했거든요.
연구계획서를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이후 phd candidate이 되고도 한참이 지날 동안 저는 데이터에 상당히 집착하게 됩니다. 주지했다시피, 데이터 없이는 연구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제가 가졌던 고민은, 어느 종목으로 올림픽에 도전할 지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은 채 특정 종목을 잘하기 위해 각종 훈련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연구주제, 연구질문, 왜 이 연구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데이터를 먼저 들여다보려고 했던 우를 범했던 것이었죠.
이는 제가 특별히 멍청해서라기보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연구 과정에서 수반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연구를 할 지 마음을 먹으려면 어느 정도 손에 잡히고 눈에 잡히는 데이터로 해당 영역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채 데이터만을 들여다볼 경우, 내가 데이터고 데이터가 곧 나와 같이 느껴지는 극도의 멍청함을 경험합니다. 세상에 훌륭한 데이터는 차고 넘치거든요. 하지만 어떤 요리를 할지 결정도 못 내렸는데 코스트코를 털어온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결국, 연구 주제를 잡고 그에 맞는 데이터를 찾아내는 과정은, 매일같이 벽에 머리를 박으며 본인의 멍청함과 세상의 방대함을 한탄하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다시 요리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일단 코스트코에서 1000불 정도 식재료를 사 온 다음, 대충 방향만 잡고 요리에 도전해 보는 것이죠. "매운 요리를 만들고 싶다" 정도의 생각만으로 일단 각종 재료를 웍에 넣어 봅니다. 그러다가 백종원 씨의 유툽을 보면서 따라 해보기도 하고, 고든 램지의 욕을 들으며 실험적인 요리에 도전해보기도 하고, 그 결과물을 가족에게 먹였다가 토하는 것을 보기도 하면서 다음 식재료 목록을 고민하는 겁니다. 고양이가 캣휠 타듯이 그 짓을 반복하다 보면, 종래에는 어느 정도 음식같이 생긴 요리가 나오기도 하고, 그걸 누군가에게 먹였을 때 '먹어줄 만하다'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아,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하게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져야 했던 싱싱한 식재료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만.
한편, 연구계획서는 그 이름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의 80% 이상 진행된 다음에 발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 볼 때, 정치학과에서 보편적으로 말하는 "연구계획서"의 요건은 비교적 추상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도교수나 자신이 속한 학과의 성향에 따라 이 또한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저와 제 정치학과 동료의 경험을 보면, 대체로 아이디어가 추상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어도 핵심 요건만 충족시킨다면 대단히 고초를 겪지 않고도 박사과정 후보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이웃으로 살고 있던 심리학과 박사과정생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와 완전히 반대였어요. 본인의 과에서는 데이터 확보 및 분석이 어느 정도 끝나고 챕터를 2개 정도 작성한 상태에서 연구계획서를 정식으로 발표하고 승인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연구계획서 승인을 받은 이후에도 졸업을 하기까지 2-3년 정도 더 걸리는 경우가 많은 정치학과와 달리 (늘 그렇듯이 예외는 존재합니다), 그 친구의 학과 같은 경우 통상 phd candidate이 되고 1-1.5년 내에 졸업을 시키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어느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정답을 내리진 못했습니다. 다만, 저뿐 아니라 동료, 선후배 연구자들이 연구계획서 단계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많이 봐서,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들 공통적으로 토로했던 어려움 중 하나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확신이 있는 것처럼 계획서를 "포장"하고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제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연구주제에 대한 확신은 대체로 데이터 분석에서 나옵니다. 데이터 분석이란 반드시 숫자놀음과 통계적 방법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질적 데이터든 양적 데이터든 구해서 공통된 혹은 다양한 패턴을 보여주고 그러한 결과값이 나타나는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정치학 연구의 일반적인 접근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데이터의 유무가 논문의 80% 이상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문제는, 연구 주제와 내가 내린 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단계인데 (데이터가 없으니까요), 확신을 갖고 어떤 계획이 있는지 알리고 '방어'해보라고 하니, 난장판이 된 부엌에서 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아아,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저떻게 해서 그 단계를 벗어 나오긴 했지만, 누군가 저에게 조언을 구하면 딱히 실질적인 도움을 줄 말이 별로 없어요. 그저 버텨라, 여러 번 맨땅에 헤딩하다 보면 연구 주제도 좀 더 윤곽을 드러내고, 통계를 돌리든 현지조사를 가든 데이터를 구해서 분석을 마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된다. 이 정도를 조언이랍시고 내놓습니다. 아, 어렵네요.
이 단계에서도 안주거리로 곱씹을만한 에피소드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섭섭하겠죠.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세상에 또라이는 많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 학술적 교류를 이어왔고, 저의 커미티 멤버로 당연히 참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교수 L이 그 주인공입니다. 학과 내 다른 동료들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고행기는 교수 L의 인간성이 바닥에 있다 못해 심해로 가라앉고 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그 인간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기에, 저는 일말의 요행(?)을 바랐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 종합시험에서도 examiner로 참여했고 (주제가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는 포지션이었어요), 제 지도교수가 틈틈이 저의 연구상황에 대해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커미티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proposal defense를 한 달여 남기고 공식적으로 invitation을 보내 커미티 구성을 하려던 어느 날, 지도교수가 보낸 이메일에 들러붙은 답장을 보고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불과 한 달 전까지도 "초안을 다 작성하면 보내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그 인간이 돌연 "맡은 학생이 많아서 대단히 바쁘기에 커미티에 참석할 수 없겠다"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가 말한 "너무 바쁘다"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준임에 분명했습니다. 당시 학과 내에서 가장 많은 지도학생을 두고 있던 제 지도교수는 그 기준이면 나가 죽었어야 했어요. 왜냐면 그 교수 L은 박사생 1명과 석사생 1명을 제외하고는 지도학생이 없었거든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인간이 얼마나 학생들의 논문지도를 거부했으면 학과 내 교수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고 학과장과 헤드가 나서서 경고를 줄 정도였습니다.
그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보자마자 제 첫 반응은 이랬습니다. 우와, 그동안 숱하게 학생들을 괴롭히면서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인 척하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어차피 이 바닥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인간성이 별로인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그의 인간성을 알면서도 연구 주제가 많이 겹친다는 이유로 (당시 기준입니다. 그 이후에 제 연구 주제가 바뀌었거든요), 내심 그가 정상인처럼 행동해주길 바랐던 저의 욕심이 제 눈을 가린 것이겠죠.
교수 L에게 아주 심플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바쁘다니 어쩔 수 없네. 같이 일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안녕."
그 이메일에 CC 되어 있던 지도교수로부터 메시지가 옵니다.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잘 대답했다고 하며, 걱정 말라고 합니다. 제3의 커미티 멤버를, 더 좋은 사람으로, 문제없이 찾을 수 있다고.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사람 좋고 허허 웃음으로 하루 24시간 중 12시간을 사는 것 같은 제 지도교수가 화난 모습을요. 저도 대답했습니다. 차라리 이 단계에서 저 또라이를 걸러서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다행히 커미티 멤버를 문제없이 잘 구했습니다. 오히려 저를 좀 더 잘 알고 책임감 있는 교수님으로 섭외(?)할 수 있어 정말 큰 다행이라 여겼지요. 나중에 논문 심사받을 때 혹은 추천서 받을 때 커미티 멤버들에게 구구절절 도움을 구할 일이 많을 텐데, 그때 본색을 드러내는 또라이를 상대하면서 고통받느니, 미리 거를 수 있어 그 역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의 "바쁘다"는 핑계는 매우 괘씸했답니다. 불과 3-4주 전 업데이트 할 때 미리 말을 해 줬으면 훨씬 더 빨리 다른 사람을 알아봤을 텐데, 느지막이 거절하는 것은 진짜 나 엿 먹으라는 건가, 싶잖아요.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또라이를 이해하려고 해 봤자 내가 또라이가 아닌 이상 또라이를 이해할 순 없다는 것을요. 불쌍한 중생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대신, 그를 저의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조용히 학과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교수면 교수답게 책임을 다 하길 바란다는 내용을 강력히 어필해서 지도교수에게도 부탁했지요. 교수회의에 회부 좀 해달라고. 여차하면 학교 레벨에 신고할까 싶었지만, 당시 워낙 바쁘게 proposal defense는 준비하느라 차마 그럴 여력이 없었네요. 에잉, 아쉽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건강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한국에서 각종 검진을 받고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의사의 말을 기억하며 왔지만, 캐나다 할머니 의사는 조금 완강했습니다. 처음 예방적 차원에서 약을 먹어보자고 제안한 후 약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할머니 의사는 결정타를 날립니다. 약을 먹지 않는데 6개월에 한 번씩 만나봤자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의사랑 차담을 나누기 위해 클리닉을 가는 것은 아닐 테니, 의사의 권고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클리닉을 다니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겨울을 지내면서 없던 증상도 미세하지만 생긴 탓에 고민하다 약 복용을 결정했습니다.
아직도 진짜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속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분석이 다 달랐거든요. 일단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약을 복용한 지 1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온몸이 가려운 것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피부염인 줄 알았는데, 48시간이 지나기 전 전신으로 발진이 번졌습니다. 다행히 발열은 없었지만 정말 미친 듯이 가려워서 20분에 한 번씩 제 몸을 때려야 했어요. 찰싹찰싹. 가려운 곳을 긁다보니 피부가 붓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긁지 않은 곳까지 다 부어올라 저는 졸지에 대왕 쌀떡볶이 같은 형상이 되고 말았답니다. 문제는 proposal defense가 채 열흘도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응급실을 가봅니다. 약물에 의한 발진 (drug rash)으로 추정하는데 기도가 막히거나 발열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하염없이 대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비교적 빠르게(?) 의사를 볼 수 있었는데 (5시간밖에 안 기다렸습니다), 응급실 의사도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지 못한 채 복용하는 약을 중단하라는 말만 했죠. 다음날 할머니 의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약의 독성에 대한 지연 반응이 나타난 것 같다며 일단 약을 중단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전문의에게 이 상황을 공유했더니, 약에 의한 알러지 반응은 아니라고 합니다. 독성에 알러지가 있다면 반응이 바로 나타났을 것이고 1달이나 멀쩡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건지 ㅎㅎ).
온 전신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항히스타민제를 먹어가며 졸음과 싸워야 했지만, 얼굴만큼은 발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때는 코로나로 모든 이벤트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시점이라 proposal defense도 Zoom으로 진행했답니다. 중요한 defense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가려움은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제 손은 여기 긁으랴 저기 긁으랴 정말 바빴지요. 그 와중에 발표도 하고 질문에 대답도 하고 defense를 잘 끝낸 제가 대견했습니다.
짝꿍도 비슷한 시기에 통과, 드디어 Phd candidate이 됩니다. 이 말인즉슨, 저도 짝꿍도 박사과정 중 거쳐야 할 여러 가지 큰 산 중, 마지막 관문을 제외하고는 다 잘 넘겼다는 뜻이 됩니다. 마지막 관문이 뭐냐고요? 논문을 잘 작성하는 것이죠. 네, 맞아요. 마지막 관문이 가장 어렵고, 힘들고, 지난합니다. 등산도 원래 가장 마지막 코스가 힘들다고 하잖아요, 하하.
자, 이로써 드디어 '올림픽'에 출전할 자격을 얻은 셈입니다. 기록이나 성과를 내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할지는 선수와 코치의 몫이지만, 어느 종목으로 출전할지, 어떤 코치진과 함께할지가 결정된 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선수' 배지를 달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지요. 앞서 종합시험에서도 빠르면 조기 퇴소자 혹은 탈락자가 생깁니다. 종합시험 단계를 잘 넘기더라도 이 '연구계획서 승인' 단계에서 생각지 못한 난관에 봉착하거나, 늦어지거나, 혹은 훈련 과정 조기 퇴소를 결정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다른 목표가 생겼기에 더 이상 이 길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정리하는 편이 더 맞겠습니다.
정식으로 선수 배지를 단 이후, 그 해 여름은 나름 바빴습니다. 여름 첫 학기는 수업조교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여름 수업조교는 4개월에 걸친 일반 학기를 2개월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학생도 허덕입니다), 중국어 수업을 정식 청강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름학기 수업이라 수업이 매우 빡빡했습니다). 여름 두 번째 학기는 학과에서 제공하는 방법론을 수강하느라 또 정신이 없었네요. 그 와중에 처음 시작한 gardening을 통해 자라나는 생명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을 처음 맛보았습니다.
아참, 또 다른 산을 넘은 기념으로 Alberta로 또 여행을 갔답니다. 여전히 관광객이 많지 않아 2년 연속 한적한 재스퍼와 밴프를 구경하고 왔습니다.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