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PhD candidate 되어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수업과 일로 부산스러운 여름을 보내서였을까요.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크고 작은 질환과 증상이 저의 집중력을 흩트려놓습니다.
초여름부터 가장 먼저 제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생긴 습진이었습니다. 때는 ChatGPT가 없었을 때라 어디 속 시원히 물어볼 곳도 없고 (네, 저는 ChatGPT와 아주 친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습진인터라 인터넷 검색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몇 가지 의심 가는 정황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한포진이었습니다. 딱히 기전도 잘 모르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생긴다는 그것이었죠.
그렇지만 제가 병을 진단할 능력도 자격도 되지 않으니 한포진에 대한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접어두고 의사에게 연락을 합니다. 저는 주로 학교에서 운영하는 클리닉을 가는데 (즉, family doctor가 없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여서인지 진료를 제공하는 의사들이 많이 줄어들었고 가능한 시간대도 거의 없었습니다. Nurse practitioner와 겨우 약속을 잡은 후 전화로 증상을 설명하고 해당 부위의 사진을 보내길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매우 답답했어요. 피부에 생긴 이상은 직접 촉진을 하든 눈으로 보든 의료진을 만나야 빠른 진단이 가능한데, 대면 진료를 거의 제공하지 않던 때라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요상한 시기였습니다.
어지간하면 전문의인 피부과 의사에게 referral을 넣어주면 좋겠는데, nurse practitioner는 망설입니다. 별 것 아닌 일로 전문의의 부담을 가중시킬 순 없다나요. 그러면서 그녀가 처방해 준 스테로이드는 무려 3가지나 됩니다. 종류를 순차적으로 바꿔봤지만 어느 하나도 약효를 볼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결말이 따랐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여름이 다 지나가고 8월 끝자락이 다가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졸라댄(?) 탓에 혹은 수포가 여름 내내 사라지지 않은 탓에 피부과 의사를 드디어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한국이라면 당장 동네 피부과라도 달려가서 진균 검사라도 할 것을, 거의 3-4개월을 질질 끈 다음에야 겨우 귀하신 피부과 의사를 만나자니 캐나다 의료 시스템을 모르지 않는 저도 속이 터지긴 했습니다.
검사는 오죽 오래 걸립니까. 처음에는 간이 진균 검사를 하고 (혹시 무좀일까 봐요), 그리고 균을 배양하는 검사도 진행하겠다고 합디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3-4주가 걸린다고 하면서 그동안은 자기가 처방해 주는 스테로이드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포진은 어느 정도 잊혀 가는 듯했어요.
그러던 와중, 드디어 코로나 백신이 세상에 나옵니다. 캐나다도 대대적으로 백신의 중요성을 홍보하며 접종을 권유합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한국에서처럼 백신 음모론(?)이 카톡 대화방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퍼지는 경우는 많이 듣지 못했지만, 백신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있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빨리(?) 개발되었고 mRNA라는 새로운 방식의 백신이 얼마나 안정성을 담보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겠죠.
저 또한, 이렇게 불확실성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백신을 맞아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확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할머니 의사는 적극적으로 백신 접종을 권장했습니다. 백신 접종의 부작용보다, 면역계의 작동이 원활하지 않은 제가 코로나에 걸릴 경우 겪게 될 후폭풍이 훨씬 더 클 것으로 판단한 셈이죠. 실제로 당시에는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사망건수가 심심찮게 보고되던 편이긴 했습니다.
짝꿍과 시기를 달리 하여 백신을 접종하였습니다. 첫 접종이니 추이를 지켜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고, 만에 하나 한 쪽이 많이 아프면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요. 짝꿍은 2-3일 약간의 미열과 피로도를 호소했지만, 저는 꼬박 1주일을 앓아누워야 했어요. 며칠씩 미열이 지속되었고, 팔이 띵띵 부어 럭비 선수의 팔처럼 변하고, 미약한 관절통이 뒤따라 일상생활이 힘들었습니다. 백신도 이렇게 세다니. 무서운 코로나 녀석.
그 와중에도 제 연구를 소홀히 할 순 없어서 어떻게든 데이터부터 마련해 보려고 깔작대긴 했습니다. 하지만, phd candidate이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각종 수업조교와 연구조교 업무가 난무했고, 거기에 심하진 않지만 조금씩은 제 신경과 에너지를 갉아먹는 건강 문제가 겹쳐서 그다지 생산적인 여름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이미 데이터에 대한 감을 잡았어야 했는데, 저는 미련하게도 '내가 아직 모든 것을 살피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걸 거야'라는 생각으로 좀 더 열심히 할 각오를 다질 뿐이었습니다.
백신도 보급되었겠다, 사람들도 재택근무를 하다 스트레스로 미쳐 돌아갈 지경이겠다, 학교가 슬슬 대면 수업을 시작합니다. 퍽 반가웠습니다. 지난해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뤄졌었는데,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모든 일이 이메일로만 이뤄지다 보니 오히려 업무 시간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마주했었거든요. 수업조교를 할 경우 한 학기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제 TA 업무 역사상 처음으로 할당된 시간을 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집과 업무공간이 분리가 되지 않다 보니, 밥을 먹다가도 화장실을 가다가도 이메일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찾아왔고 실제로 쉽게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가 된 탓에 일상과 업무의 경계가 매우 흐려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생활이 질려갈 즈음, 대면 수업이 시행된다고 하니 학교 시설도 정상화될 것이고 여러모로 정상화가 진행되겠다는 기대가 있었죠.
1년만 반에 문을 연 학교는 매우 부산스러웠고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래도 중국어 수업 청강과 수업조교, 그리고 제 연구실이 있는 학교로 출근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어요. 기쁨도 잠시, 은근슬쩍 몸에서 신호가 옵니다. 오늘은 왼쪽 종아리 관절통, 내일은 오른쪽 팔꿈치 관절통, 이런 식으로요. 전혀 심한 축에 속하진 않는다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편도 4-50분 거리를 매일 소화하자니 다가오는 우기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지금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몇 년에 걸쳐 제가 관찰해 본 결과, 춥고 으슬한 날씨가 여러 증상이 발현되기에 가장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의 발이 되어줄 귀여운 중고차를 하나 구입합니다. 차라리 따로 운동 강도를 높이되, 습기 가득한 날씨에 비를 맞으면서 하루 2시간씩 출퇴근하는 수고를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해 가을은 이상하게 전문의를 만날 일이 많았어요. 악관절이 심해져서 턱관절을 전문으로 보는 의사를 만나야 했고요. 잠잠해진 줄 알았던 한포진이 10월 어느 순간부터 심해져서 발바닥과 발가락에 퍼지고 말았어요. 피부과 의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죠, 수포는 번져나가고 있죠, 울며 겨자 먹기로 멀리 있는 한의원을 수소문해서 찾아가기도 합니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의료진은 없고 증상은 심해지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간 곳에서 약침(...) 치료를 받기도 했어요. 맞고 나면 2-3일 정도는 발이 부어올라 보행에 지장을 주는데, 이걸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처치하는 바람에 첫날엔 정말 적잖이 놀랐습니다. 발이 부어서 부츠에 안 들어가길래 저는 제 발등 어딘가에 미세 골절이 생긴 줄 알았어요 (매우 터프한 한의사였거든요...). 한포진 치료기는 정말 블랙 코미디에 가까웠는데, 의료진 부족이 생긴 나비효과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답니다. 당시 피부과 의사를 만날 수 없어 한의원까지 (굳이) 찾아가서 발바닥에 약침을 수 차례 맞아야 했다는 웃픈 이야긴데요.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피부과 의사는 다음 해 초에 겨우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한포진은 이미 많이 자취를 감춘 뒤였죠. 알아서 나은 걸까요...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살며 필요할 땐 약을 먹어보지만 그때뿐이었고요, 음식 조절을 하라고 해서 매운 음식을 모두 식단에서 제외시키고 커피도 끊은 지 오래였건만, 식도염은 좀처럼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백신을 재접종하기도 했어요. 평소엔 신경을 쓰지도 않던 독감 접종까지요. 모르긴 몰라도 염증을 처리하는 데에 남과 다른 기전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고, 그렇다면 애초에 염증이 몸에 생기지 않게 하거나 생겨도 크게 퍼지지 않게 빠른 조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거든요. 할머니 의사도 코로나 백신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계절성 백신을 빠짐없이 맞으라고 권해주셨습니다.
쓰다 보니 무슨 병상 일지 같지만, 아닙니다!! ㅎㅎ
한 편으로는 몸을 보살피는 노력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계속 데이터를 찾아 넓디넓은 연구의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망망대해에 돛단배 하나 타고 흐르는 대로 간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지도교수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과 미팅도 하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발행하는 연구 보고서와 공개된 데이터를 들여다보았지만, 깔끔하게 제 연구 주제에 맞는 데이터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뭔가 진척이 더딘, 혹은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 - 종속변수 (dependent variable, DV) - 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죠.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이 variation을 갖고 있음을 보여야 하는데 이 단계가 만만치 않습니다. 개념정의 (conceptualization), 데이터를 활용한 조작화 (operationalization), 측정 (measurement) 등등, 단계마다 충족시켜야 할 요건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국제질서의 평화"라는 종속변수가 있다면, 이 '평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일단 개념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평화를 '전쟁이 아예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대규모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요. 연구자가 기존 문헌 연구를 검토함으로써 본인의 연구에 가장 적합한 개념 정의를 만들어냅니다. 이 개념을 바탕으로 이제 데이터에 기반한 조작화를 하는 것이죠. '사상자 XX 이상의 전쟁은 대규모 전쟁이다' 혹은 '피해액이 얼마 이하라면 소규모 전쟁이다'라는 식의 작업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손에 잡히는 데이터로 측정 (measurement)하는 과정이지요. 이 과정에서 종속변수의 변량 (variation)이 나타납니다. 어떤 년도에는 대규모 전쟁이 몇 건 이상이었을 것이고 어떤 년도에는 아예 전쟁이 없는 등의 '변량'이 보입니다. 시계열일수도 있고 국가 간 혹은 지역 간 혹은 집단 간의 차이가 나타나겠지요. 그러면 이를 바탕으로 연구 질문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왜 어떤 국가는 전쟁에 덜 연루되었고, 어떤 국가는 더 연루되었는가' 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는가, 왜?' 등등, 질문은 무궁무진합니다. 핵심은 이 과정에서 variation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차이를 유발하는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죠. 정치학 논문은 거의 대부분 설명변수와 종속변수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쉽게 말해 Causal argument가 없으면 정치학의 정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학술적인 글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을 동반합니다. 그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작업이 바로 종속변수 파트인 것이지요.
이 과정을 특별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 지도교수는 DV만 해결되면 논문의 80%가 해결된 것과 다름없다고 늘 말합니다. 석사 과정에서부터 종속변수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아무래도 석사 논문을 쓸 때에는 그 중요성을 50%도 채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논문이 정말 그지 같아서 불태우고 싶네요.
기존 연구를 닥치는 대로 읽습니다. 각종 국제기구에서 내놓는 현황 보고서와 그들이 어떤 데이터를 활용하는지도 눈여겨봅니다. 가능하다면 그 데이터를 직접 다운로드하여서 한번 훑어봅니다. 간단하게 통계 작업도 해 봅니다. 또 기존 연구를 읽습니다. 연구 질문에 대해 고민합니다. 데이터를 파악합니다. 또 기존 연구를 읽습니다. 이런 작업을 무한대로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눈에 들어올 것이라 막연히 희망하면서요. 어쩌다가 눈에 띄는 데이터가 들어옵니다. 제 주제와 연구질문에 어느 정도 적합할 것 같습니다. 데이터를 다운 받아 봅니다. 늘 그렇듯이 대단히 방대한 양의 데이터입니다. 이런, 보고자 하는 국가의 데이터가 없네요... 다시 원점입니다. 어차피 기존의 데이터를 제 연구주제에 맞게 가공해야 하지만, 아예 한 나라가 빠져있으면 곤란합니다. 데이터의 통일성 (integrity) 역시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도르마무처럼 위의 과정을 답을 찾을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 와중에 지도교수와 공저로 참여한 프로젝트를 위해 '제2의 공장'을 가동합니다. 아니지, 수업조교나 다른 업무를 고려하면 제3의 공장일까요. 본진이 잊혀진 가운데 새끼 공장들도 풀 가동하자니 체력적 소모가 큽니다. 한 달이 넘도록 제2공장에 신경 쓰느라 다른 업무는 올 스탑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도교수였다면 1주일 만에 끝냈을 일을 내내 붙잡고 있자니 현타가 왔습니다만, 이렇게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