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데이터를 향한 저의 집착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당시 연구가 지지부진했던 것이 100% 데이터 때문은 아니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연구질문이나 방향이 명확하지 않아서 생긴 정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데이터'를 손에 넣기만 하면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리라는 이상한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데이터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공을 좀 한다는 가정 하에 쓸만한 데이터가 없진 않았지만, 제 연구 질문에 답을 하기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고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고정비용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크나큰 고정비용을 투입하자니 아직 해당 연구 주제를 밀고 나갈 만큼의 확신이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해당 연구주제를 밀고 나갈 정도로 '투자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조금이나마 나와줘야 했던 상황이었으니 딜레마가 극복될 리가 만무했죠. 그렇게 연구는 진척이 될 듯 말 듯 답보 상태를 이어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주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한다거나 꼬박꼬박 안부인사를 여쭙는 '효녀'가 아니었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사는 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살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외국 생활을 하다 보니 시차와 물리적 거리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역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시는 편이었고, '바쁜데 뭐 하러 애를 귀찮게 하냐'라는 말로 무소식을 갈음하는 편이었지요. 그러던 집에서 통화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으니, 마음이 나직하게 쿵 내려앉습니다. 좋지 않은 일은 이렇게 몸이 먼저 아는 것일까요.
아니나 다를까, 제 예감이 맞았습니다. 아빠의 암 확진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아주 놀라운 뉴스는 아니었어요. 약 1년 전 우연히 해본 피검사에서 이상수치가 떴었거든요. 이후 관련 전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조직검사까지 했고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만, 이는 false positive였습니다. 검침을 암세포가 없는 곳으로 하게 되면 검사에 잡히지 않으니 이를 '정상'이라 결론지어버린 경우였죠. 1년간 지속된 약물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의사가 조직검사를 한 번 더 의뢰했고, 이번에는 암세포가 있는 쪽을 잘 겨눴나 봅니다.
늘 무던하고 큰 감정 동요가 없는 편인 아빠는 '허허, 수술하면 되니 걱정 말아라' 하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늘 살던대로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한 번씩 중대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으면 바로 죽음을 생각하게 마련이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뭘 잘못 먹었나, 남은 가족들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등등. 웃기지도 않게 자식인 제가 2년 전 먼저 그런 생각을 할 기회(?)를 접했었고, 이제는 부모가 그 단계에 있는 요상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조심히, 그리고 또 조심히, 단어를 골라 아빠에게 카톡을 보냅니다. 아빠는 의료시스템이 빠르고 정확하기로 유명한 한국에 계시니 적절한 치료를 받으실 수 있을 테고 예후가 좋을 것이라고. 그 와중에 제 손과 머리는 또 바쁩니다. 2년 전 제가 했던 대로 또 의학 논문을 뒤져보고 각종 정보 수집에 여념이 없었거든요. 한 번 겪었으니 불안이 나를 잠식하기 전에 멈춰야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저 알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만큼 잘 알진 못하겠지만, 환자의 가족으로서 너무 무지한 채 이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도요.
낮 시간 동안 제 연구를 이어가다가도 문득 머릿속에서 '암'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엄마도 끊임없이 의사와의 면담 내용이나 본인이 알게 된 내용을 저에게 카톡으로 전달하기 바쁩니다. 이때부터였을 겁니다. 엄마와의 카톡창이 죄다 병원 이야기, 의사와의 면담 이야기 등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 오래전, 본인의 아버지를 암으로 떠나보낸 엄마는 이 상황을 좀 더 크게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고, 아빠는 외할아버지와 종류가 다른 암이고, 잘 치료받으실 테니 걱정 마시라는 말씀을 아무리 드려도 이미 한껏 치솟아버린 엄마의 불안을 누그러 뜨리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불안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안타깝게도 무던한 아빠의 성격이 저에게 다 온 것은 아닌가 봅니다. 곪아가는 속을 남몰래 삼키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보기엔 도 닦는 수도승 같은 아빠의 평정심(?)이 저에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불안이 태평양 건너 저의 뇌와 마음을 집어삼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연구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그 공간에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점점 더 자주 느낍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합니다. 박사생의 본업은 연구이니까요. 혼자 연구를 진행하고, 틈틈이 연구와 관련된 미팅과, 지도교수와의 면담, 그리고 수업 및 연구조교 업무를 이어갑니다. 그 와중에 감사하게도 선발된 펠로쉽이 있어 그것과 관련된 연구도 해야합니다. '제2의 공장'에서 처리하던 side project도 아직 진행 중이었고, 학회 준비를 위한 '제 3의 공장'도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가정사를 말하지 않으면 그저 일로 바빠 정신없이 사느라 얼굴이 썩었구나, 할 정도로 일정은 차고도 넘쳤습니다. 차라리 바빠서 다행입니다. 잡생각 할 틈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제 연구와 관련해서도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그나마 한국 생각을 좀 잊을 수 있습니다. 기존 연구 문헌을 기계적으로 읽는 것은 괜찮지만, 창의적인 생각을 하거나 글을 쓰기에는 좋지 않은 시기입니다. 정교한 생각과 그에 필요한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은 일부러 하지 않기로 합니다. 시간이 주어지는 순간 제 뇌는 다른 방향을 위해 달려갈 테니까요. 연구 업무 중에서도 조금은 조건반사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기로 합니다.
불현듯 불안이 눈물이 되어 흐를 때, 짝꿍이 옆에서 많이 다독여주었습니다. 삼시세끼 밥을 챙길 수 있게 도와주었고, 잊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게 저를 일으켜주었습니다. 괜찮을 것이라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그 말 한마디에 저를 온전히 기대어 그저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차츰 정신을 차립니다. 아빠의 수술 날짜도 봄의 어느 날로 잡혔고요. 2년 전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다녀왔으니, 건강검진도 할 겸 한 번 갈 때가 되었습니다. 아빠의 수술 날짜에 맞춰 비행기 티켓을 예매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국을 다녀온다고 하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하지만, 저와 짝꿍의 경험으로 보건대 한국 방문은 늘 정신없이 흘러갔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제 각종 병원을 돌아가면서 검진을 받아야 하고요. 아무리 빠른 한국의 시스템이라 해도 병원 일정에만 3-4일이 꼬박 필요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한 두 명 만나서 안부를 전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간 김에 중요한 서류 처리를 해야 할 때도 있고요, 가족들과의 시간도 소중하니 시간을 쪼개어 식사를 하고, 근교로 나들이를 가거나 혹은 짧게 여행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지만 저의 나와바리(?)는 서울이기 때문에 한국에 갈 때마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야 합니다. 작은 나라이지만 이럴 때에는 이동이 퍽 불편합니다. 시차 적응을 할 새도 없이 하루를 알차게 보내다 보면 어느덧 캐나다로 돌아갈 시간이 오지요. 유학을 시작한 이후로 한국을 자주 방문한 것은 아니나 (저는 2년에 한 번 꼴로 다녀왔습니다), 저보다는 자주 방문한 짝꿍을 봐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만 다녀오면 둘 다 뻗기 바쁩니다.
이번 한국 방문 일정도 빠듯하기 그지없습니다. 먼저, 2년 만에 만난 차가운 대학병원 교수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차가웠습니다. 제가 그동안은 운이 좋아서 인간적으로 훌륭한 의사들을 만났음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놀라운 의사였습니다. 2년 연속 똑(!) 같은 질문으로 진료실에 들어가는 환자를 민망하게 만드는 그를 보면서, 다음에 한국에 와서 검진을 받더라도 이 의사에게 오진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아무리 명의라도 갈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는 의사는 환자 입장에서도 거절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년 전과 비교해서 그럭저럭 현상유지가 잘 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캐나다에서는 6개월에 한 번씩 전문의를 만나고 있고, 한국에서도 '명의'께서 2년 연속 같은 결론을 내렸으니 이제는 그만 불안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병의 원인이 되는 물질이 제 몸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젊은 날 그저 조심하면서 현상유지를 최선이라 여기며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평화롭게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자체를 신의 축복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손길이 많이 가는 몸은 그저 내가 나와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젊은 날의 객기에 대한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몸이니까요. 2년간 숱하게 불안한 밤에 시달렸지만, 여명을 다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합니다. 다만, 이제는 어느 병원에 가든 설명해야 할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일반의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요. 어떤 시술이나 의료적 조치를 취할 때 선택할 수 없는 옵션도 많아졌습니다. 다들 제 몸이 갖고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섣불리 수술이나 시술을 선뜻 권하지 않습니다. 아주 많이 아프지 않은 이상 현상유지가 최선이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죠. 조금 불편한 부분이 생겨도 몸의 자생력을 믿으며 느리게 가는 수밖에요.
엄마 아빠 모두 한 차례 코로나를 앓았기 때문에 아빠의 수술날짜가 10일 정도 밀렸습니다. 지나고 나니 그저 일어났던 일의 나열일 뿐인데, 당시 수술날이 밀린 것 때문에 엄마가 불안에 몸서리치던 나날이 생각나네요.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겪을 때에도 무던히 겪을 수는 없을까요. 저희 아빠 말씀처럼, 그게 가능하면 이미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이겠지요?
어느덧 아빠의 수술날이 다가왔고, 다같이 병원으로 향합니다. 10일 정도 입원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문병도 제한되어 있고 간병인은 1명만 가능하다고 하니 엄마아빠를 병원 입구까지만 배웅하려고 합니다. 한사코 내가 간병하겠다는 것을 엄마가 말립니다. 병원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왔습니다. 무뚝뚝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사연이 읊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다 읽은 진행자가 말합니다. "지금 옆에 계신 부모님의 손을 잡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해보세요." 제 옆에 앉아 계신 아빠의 손이 보입니다. 저걸 지금 잡아볼까 말까 찰나의 순간에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아빠도 같이 라디오를 들었으니 제가 당신의 손을 덥석 잡는다고 해도 아주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병원으로 가는 발걸음이 좀 더 가벼울지도 모릅니다. 생각의 끈이 길어지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손을 덥석 잡아봤자 어색하기만 할 겁니다. 결국 손은 잡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 잡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합니다.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꼭 드라마의 이상한 복선처럼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가 왕왕 들리잖습니까. 평소에는 '사랑'의 '사'도 안 꺼내던 딸이 이제 와서 '사랑합니다'라고 했다가 그 말이 마지막이 될까 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돌아온 집은 속절없이 넓고 조용했습니다. 어느새 창고방이 된 작은방의 문을 열어봅니다. 아빠와 엄마가 병원에 있을 동안, 집 정리를 할 셈입니다. 오래전부터 쌓여있던 저의 수많은 책 박스, 물건, 서울 생활동안 쌓인 짐 등을 내 손으로 정리해 놓고 캐나다로 가야겠습니다. 어차피 저 아니면 할 사람도 없고, 수술 후 회복하기 바쁜 아빠와 그런 아빠를 간병하느라 바쁠 엄마를 위해서라도 정리를 해두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 자식들 읽힌다고 구입한 수많은 책들, 제 학부/대학원 시절 전공 서적들, 자취할 때 썼던 짐들, 아빠의 빛바랜 연구자료 등등. 보지 않는 책은 전부 처분하거나 당근으로 팔아버리고, 필요 없는 것은 전부 버렸습니다. 책도 PDF로 보관하는 시대이니 제 책들도 모두 버렸습니다. 나중에 제 거취가 정해지면 갖고 갈 짐만 3-4박스로 단출하게 정리하고 나니 창고방이 그나마 사람 사는 방의 꼴로 거듭나긴 했네요. 덕분에 몸은 아주 피곤하여 잡생각 없이 며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 중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간병하러 간 엄마가 신경 쓰입니다. 2년 만에 만난 엄마는 폐경을 맞이하고 급격히 체력이 쇠한 느낌이었습니다. 가까이 살지 않으니 제가 살뜰하게 보살필 여력도 안 되지만, 워낙 본인이 철저한 사람이니 알아서 하겠거니 라는 마음으로 아주 믿었던 것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다리를 약간씩 절룩입니다. 2년 전에는 잘 몰랐는데, 2년 만에 만난 엄마는 더 늙어있었습니다. 다리마저 절룩이니 영락없이 할머니입니다. 몸에 살이 하나도 없는 타입이라 민들레 홀씨 같습니다. 아빠의 수술날 전 엄마를 데리고 마취통증의학과니 뭐니 병원을 다녀봤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들 허리, 노화, 근육 부족, 등을 짚기에 바빴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전문의라는 사람들도 엄마의 문제를 짚어내지 못했습니다. 골다공증 약의 부작용이었는데도 말이죠. 하지만 당시 엄마의 불편한 다리를 우리 모두 대수롭잖게 여기며 아빠의 수술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아빠의 퇴원날에 맞춰 병원으로 마중을 갑니다. 여전히 다리를 절룩이는 엄마가 신경 쓰였지만 일단 아빠가 잘 회복되고 있다는 점에 가족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 각종 일처리와 제 연구를 위한 preliminary interview를 진행합니다. 본격적인 인터뷰는 아니지만 워낙 데이터 문제로 두통을 앓고 있었으니,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간단하게 연구 주제의 현황을 묻거나 그들의 혜안을 구하는 자리 정도로 생각하고 몇 건 진행할 계획을 세웁니다. 박사 논문을 마친 후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자니, 당시 제가 얼마나 생각이 부족했고 요령이 없었는지 여실히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 좀 더 상세히 풀어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preliminary interview는 방향 설정에 중요한 변환점이 되었습니다. 즉, 당시 제 연구 주제에 부합하는 데이터는 없음이 밝혀진 것이었죠. 만나는 전문가들마다, 해당 자료는 구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제가 덜 찾아봐서, 제 노력이 부족해서 데이터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지나치게 모든 일을 저의 '노오력' 문제로 치환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IMF나 World Bank 정도의 인력과 재력이 있어야 제가 원하는 데이터를 모으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대형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다면 모를까, 한낱 박사연구생 신분으로 어림도 없죠. 해당 국제기구에 연락을 해본들, 데이터를 쉽사리 나눠주지도 않을 거고요.
낙담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아주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 같은 주제를 붙잡고 있었지만 무언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없다면 그건 연구자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그 연구 주제가 잘 다뤄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대부분은 데이터의 문제일 확률이 큽니다. 지도교수에게 급히 이메일을 보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도교수도 기다렸다는 듯이(?) 줌 미팅을 제안합니다. 저의 원래 주제에 대해 그렇게까지 감(?)이 좋진 않았다나요. 생각보다 박사과정생의 연구 주제 변경은 드문 일이 아니니,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요. 제가 알기로 그의 이전 지도학생들 모두 연구 주제를 한 번씩 변경했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아, 지도교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주변에서 연구 주제를 변경하지 않고 끝까지 간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일이 제 일이 되고 나니 조금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어느덧 출국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날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인천으로 가야 했기에, 짐을 싸고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바쁜 한국 일정을 곱씹어보면서요.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였을까요. 잠이 잘 오지 않아 뒤척이다 엄마가 방에서 걸어 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제 방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나 봅니다.
그러다가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걸려서 넘어졌구나'를 깨닫는 순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절규가 거실에서 들려옵니다. 후다닥 달려 나가 불을 켜 보니, 엄마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고통이 여과 없이 소리가 되어 나오는 듯한 울음이 목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옵니다. 부랴부랴 달려 나온 아빠가 엄마의 허벅지를 주무르지만 그럴수록 엄마의 절규 소리는 더 커지기만 합니다. 119에 신고를 하고, 다행히 근처에 있던 구조대 덕분에 엄마는 응급실로 신속히 옮겨졌지만, 상황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고통이 너무 큰 탓에 엄마는 잠시 기절을 하다 정신을 차리길 반복했고, 들것에서 응급실 베드로 옮겨지는 상황에서 전달되는 작은 충격조차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구조대의 판단으로는 대퇴부 골절이 있는 것 같다고 했고, 이미 상황이 심각함을 온몸으로 인지하고 있던 저는 빠르게 두뇌를 돌려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x-ray와 CT를 찍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 다리를 반듯하게 놓아야 했지만, 대퇴부가 골절된 사람의 다리를 무슨 수로 반듯하게 펴겠습니까. 진통제를 여러 대 맞는 동안에도 엄마의 통증이 잠들지 않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으면서 저는 짝꿍에게 전화하여 비행기표 변경을 부탁합니다. 추가 금액 상관하지 말고 일단 3주 뒤로 미뤄달라고요. 그리고 학과에 이메일을 씁니다. 당장 다음 주로 예정된 수업 조교 일을 못하게 되어 너무나 미안하다고. 수술이 임박함을 감지한 아빠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지만, 자정이 넘은 시간, 그것도 주말에, 아빠의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구조대의 판단에 의해 급한 대로 2차 병원으로 오기는 했지만, 아빠가 암수술을 했던 대학병원으로 갈지 지금의 2차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지 결정해야 합니다. 저희 가족은 살면서 수술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멘붕에 빠집니다. 모르긴 몰라도 대학병원 응급실은 더 큰 상해 환자로 북새통을 이룰 겁니다. 게다가, 엄마가 느끼는 통증의 정도가 너무나 큰 탓에 사설 구급차를 불러 또 들것에 엄마를 싣고, 병원에 넣고, 침대에 옮기고, 사진을 다시 찍고, 이 모든 과정이 환자에게 크나큰 고통만 안겨줄 것 같습니다. 2차 병원이긴 하나 이곳은 정형외과 전문 병원이니 의사들의 수술 경험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접수부에서 입원 수속을 밟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빠와 집으로 돌아가 간병을 위한 물건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돌아옵니다. 코로나 때문에 간병인 1인만 허용되는 상황은 이곳도 같았기에, 엄마와 저는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일단 1인실로 입원합니다. 코로나 음성이 나와야 병실을 옮길 수 있다나요.
그렇게 엄마와의 3주간 병원 생활이 시작됩니다. 몸이 많이 약했던 엄마가 두 차례에 걸쳐 대퇴골 수술을 받아야 했었고, 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은 거의 다 겪었습니다. 엄마아빠 앞에서 차마 눈물을 내비칠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 상황은 아니었으니 비상구 계단은 제가 몰래 통곡하러 가는 아지트가 되었고요. 학교 일을 놓을 수가 없어 간밤에 대기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도 새벽 틈틈이 엄마의 대소변을 기저귀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족저근막염이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뭐 괜찮았습니다. 이럴 때 이겨내려고 평소에 운동을 했나봅니다. 체력이 급속히 떨어져 수액을 맞았지만 뭐 버틸 수 있었습니다. 3개월도 아니고 3주인데요. 학교 일이 늦어졌지만, 돌아가서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았지만, 매일같이 항생제 부작용으로 토하거나 전신 발진으로 고생하는 엄마, 2차례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고생하는 엄마, 빈혈이 와서 수혈을 해야 했던 엄마,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꼬리뼈가 짓물러버린 엄마, 통증에 괴로워하면서도 몸에 맞는 약이 없어 괴로워하는 엄마, 를 보면서 무력했던 그 시간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다른 글에서 다뤘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형외과 병동의 이상한 가족 1-3화, https://brunch.co.kr/@boyish-aaron/21).
3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엄마를 간병인 손에 맡긴 채 저는 병원을 나섭니다. 3주 만에 만난 바깥 세상은 조금 낯설었습니다. 아빠와 3-4일 정도 시간을 보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심껏 해둔 뒤 캐나다로 돌아옵니다. 다행히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짝꿍과 같은 날짜에 들어올 수 있어 많이 의지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퇴원을 보지 못하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던 그날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 이후 매일 하루에 2번씩 엄마를 보러 병원을 갔지만, 간병인의 손에 엄마를 던져 놓고 나온 것 같은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 한다고 일정을 더 늦추지 못한 채 꾸역꾸역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을까요. 공항에서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며 울음을 삼키기 위해 창 밖을 노려보던 제가 생각납니다. 저 멀리 수없이 날고 가라앉는 비행기를 보며 내 죄책감도 저렇게 날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온 저는 정확히 3주 동안 매일 악몽을 꿉니다. 날마다 누군가를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간병하는 꿈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듣고 PTSD를 겪는 것 같다며 걱정어린 눈을 보이는 상담가 앞에서도 눈물이 왈칵 솟아 나옵니다. 캐나다의 친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전할 때 약간씩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어찌 보면 흔한 골절 사고였는데 저는 왜 그렇게 절박하고 절절했을까요. 너무도 가냘픈 엄마가 이 과정을 이기지 못할까 봐 겁이 났던 걸까요. 사고가 난 시점부터 병원에서의 3주 동안 매일이 전쟁 같았습니다. 간병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겪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내 노력으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음을 매 분 매 초 목격한 사람의 심정이 마치 전쟁통에서의 절망을 겪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의 사고가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한 탓에 그 해 여름은 운전대를 잡지 않았습니다.
캐나다에 돌아왔으니 제 본업인 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지도 교수를 만나 새로운 연구주제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누군가 제 안에 미리 심어놓은 녹음테이프에 따라 제 말과 행동이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연구 주제가 변경되었다는 것은 이 전에 해 놓은 일이 전부는 아니지만 꽤 쓸모없어졌다는 뜻이기에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 주제를 열심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기존문헌 연구도 다시 찾아 읽고, 데이터도 찾아보는 등, 하루를 바쁘게 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행히 새로운 연구주제는 저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이전 주제가 데이터 부족으로 저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동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학회에 제출할 페이퍼를 쓰기 위해 골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 중 가장 다행스러운 점은, 너그러운 팬더곰 같은 지도교수가 옆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제 개인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새로운 연구주제에 따른 제 불안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새로운 주제는 전도유망하고, 기존 주제의 큰 틀에서 아주 벗어난 것도 아니며, 커미티 멤버를 새로 꾸려야 할 정도의 큰 변화도 아니니, 어떤 연구 질문이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에 집중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남은 여름 동안 마음 추스르랴, 종종 한국에 있는 부모님 상황 모니터링하랴, 연구하랴, 쳇바퀴 돌듯 돌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새 학기가 시작되어 낙엽이 지고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겨울이 오더군요. 여전히 수업/연구 조교로 바쁘고, 새로 결정된 연구 주제에 대한 탐구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에 빛이 보이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펠로쉽 조건으로 제출해야 하는 마지막 레포트를 바뀐 주제에 대한 연구로 채웠는데, 그 과정에서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잘 몰랐습니다.
제가 큰 충격에 대해 지연반응을 갖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교통사고를 겪은 후에도 그 자리에서 토하거나 피를 흘리거나 기절하는 사람이 있지만, 멀쩡히 귀가했는데 집에서 중상임을 발견하고 응급실로 실려 오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마치 그런 유형인가 봅니다. 돌이켜보니 늘 큰 일을 겪을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얼마나 크게 내상을 입었는지. 그러다가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간이 지나 서서히 안에서 썩어가는 것을 느낀 후에는 이미 치료의 적기를 놓친 다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