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개소리를 마주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죠.
하지만 그걸 내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마주할 경험은 그렇게까지 흔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모국어처럼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개소리에 즉각 반응하는 것도 쉽지 않지요. 어느 정도 구력이 갖춰져야 "excuse YOU"를 물 흐르듯이 구사할 수 있달까요. 오늘은 박사 과정 중에 마주한 영어로 된 개소리에 대응한 제 경험을 풀어볼까 합니다. 대응방식이라니 거창하게 들립니다만, 별 것 없고요. 한국어로 된 개소리에 대응하는 법과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일단 제 경험상 대응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요. 그건 바로,
1) 무시, 혹은
2) 내가 물 수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주지 시키기입니다 (앙, 문다?).
개소리도 다 같은 개소리가 아니지요. 그 특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지만, 크게 1) 인종차별적 발언과 2) 그냥 개소리의 주체가 아직 인간이 덜 된 경우로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그 중 1)에 대해서 글을 써보도록 하죠.
1) 인종차별적 발언의 형태를 지닌 개소리
어느 학과나 또라이같은 교수들은 몇 있게 마련이죠.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도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문제'가 있는 개인이 버젓이 자기 잘난 줄 알고 고개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드는 학계의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뭐, 인성이 쓰레기라도 능력이 출중하면 용서되는 분위기가 학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에 만연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저도 굳이 고르라면 '더럽게 착한데 일 못하는 사람 vs. 싸가지 없는데 일 잘하는 사람' 중 후자를 선택할 거고요. 하지만, 우리가, 그래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면, 인성 쓰레기를 묵인하는 분위기는 이제 좀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더 열변을 토하기 전에 이 이야기는 접어두고, 제가 만난 또라이를 만나보시죠.
첫 해, 첫 학기 수업이었습니다.
해당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편의상 교수 P라고 하겠습니다)는 흔히 말하는 백인 남성에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나쁘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던 것이, 교수 P는 공평하게 모두를 공개적으로 까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딱히 인종차별적 요소를 DNA에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여과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인사도 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시간이 많이 지나고 앞에서 착한 척 뒤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차라리 교수 P의 태도가 공평하다고 솔직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교수 P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학생의 목소리를 잘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었죠. 영어의 능숙도랑 상관없이 캐네디언이라 해도 여학생이라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양상을 보입니다. 연세가 많은 편이었으니 청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신기한 일이죠. 여학생의 목소리만 걸러내나 봅니다. 저를 포함하여 해당 수업을 듣던 여학생 4-5명은 모두 출신 국가와 영어 능숙도가 달랐습니다. 어버버 거리는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누가 봐도 또록또록한 발성으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캐네디언이나 영어권 국가 출신 여학생들의 질문과 발언에 "I didn't quite hear you (잘 안 들려)"를 반복하는 것은 어딘가 좀 이상했기에, 여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져 갑니다.
어느 날, 제 발표 차례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리딩을 모두 읽고 analytical presentation을 하는 날이었죠. 아마도 박사과정에 들어와 하게 된 첫 발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PPT slides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올드가이 교수 P께서는 그딴 것 필요 없다고 그냥 20분 동안 말로만 발표하라고 정해주셨습니다. 시키는 대로 20분 분량의 발제문을 준비했고,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핵심 내용을 전달할 각오를 마치고 수업에 임했죠.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일까요. 20분 분량의 발표를 시켰으면서 수업이 끝나가도록 본인의 말을 마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점점 초조해지는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본인의 잡설을 다 끝낸 교수 P는 그제야 저를 봅니다. "자, 우리 모두 너굴이가 준비해 온 발제를 들어볼까?"
남은 시간은 10분. 영어 발제 경험이 지금같이 많지도 않았고, 첫 발표라 긴장감을 가득 안고 교수의 입만 쳐다보고 있던 저는 주어진 시간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물어라도 보겠죠. "교수님이 20분짜리 발표를 시켰는데 남은 시간은 10분인걸요. 줄일까요 아니면 그대로 다 할까요"라고. 당시 기합만 바짝 들어있는 사회 초년생 같았던 저는 한 마디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준비해 온 분량을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하니 계획도 발음도 꼬였고요. 결국 스크립트를 보고 읽는 수준이었는데, 말을 워낙에 빨리 하다 보니 강의실에 앉아 있던 클래스메이트들이 제 말을 다 알아들었을지 잘 모르겠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을 애써 무시하며 빠르게 말을 마쳤죠.
교수 P가 피드백을 할 새도 없이 수업은 끝났고 (오히려 5-10분 늦게 끝났고), 아이들은 우수수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우물쭈물 교수에게 다가가 첫 발표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했죠. 그랬더니 이 교수가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Where are you from?" (너 어디 출신이야?)
"Ummm, I'm from Korea" (어... 전 한국에서 왔죠)
"OH! your pronounciation is much better than XX" (오, 네 발음이 XX보다 더 좋구나!)
이건 뭔 개소린가요. 발표에 대한 피드백에 대한 첫 질문이 제 출신국가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전 '발표'에 대해 물었는데 XX는 이 자리에 왜 소환된 것일까요? 참고로 XX는 다른 한국인 학자이지만 그 당시 저에겐 아직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죠. 그래서 빨리 thank you로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넘어갑니다. 피드백 좀 달라고. 그랬더니 교수 P. 절대 실망을 시키지 않네요.
"You know, most Asian women speak very softly. You should voice up" (너도 알다시피 아시안 여성들이 목소리가 좀 작잖아. 담부턴 크게 말해).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던 저도 "아시안 여성"이 갑자기 소환되는 상황에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마침 제 옆을 지나가다 이 대화를 들어버린 미국인 친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아이컨택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날 저녁 기숙사에서 다시 만난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백인 우월주의가 만연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어느 도시 출신이었던 그 친구조차 저에게, "너굴아, 그런 상황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라고 말해줍니다. 그 이후로 그 친구와 저는 만날 때마다 "Hey, Asian lady" 라거나 "most Asian women..."으로 시작되는 밈을 구사하며 웃기 바빴습니다.
그 이후 몇 주가 흘러 두 번째 발표날이 되었고 교수 P의 청력에 맞춰 저는 복식 호흡을 하며 목소리를 끌어올렸습니다 (네, 안타깝게도 저는 중저음도 아니고 목소리가 큰 편이 아니라서요). 다행히 이번에는 교수 P가 발표시간을 깎아먹지 않았기에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지요. 발표를 마치고 나가는 저를 불러 세운 교수는 굳이 윙크를 날리며 오늘은 잘했다고 해줍니다 (당연하죠, 주어진 시간이 충분했으니까요).
지금이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글쎄요. 지금의 경험과 말빨(?)이라도 이 같은 경우라면 저는 '무시'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교수 P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버블에 갇혀 여과 없이 말을 내뱉습니다. 아주 대단한 악의는 없겠지만, 그 말에 상처받은 사람이 학과를 통틀어 교수/학생 할 것 없이 수두룩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꾸한들 그 한 마디가 이미 많이 연로한 그분을 바꿀 수 없을테니, 저도 제 또래의 젊은이들처럼 그저 무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곤하고 성과 없는 일이라서요. 아, 그래도, 한 가지는 달리 했을 것 같습니다. "most Asian women" 운운했을 때, 농담을 던질 정도의 구력은 생겼거든요. "교수님 진심이세요?" 혹은 "에이, 설마 지금 인종차별 하는 것 아니시죠?"라고.
두 번째는 제가 '앙, 문다' 전략을 취했던 경우인데요. 저를 거쳐간 수 많은 학생 중 한 명이 선사해준 경험입니다.
배당된 학생이 100명 정도 되는 수업의 조교를 맡았던 학기였습니다. 이 수업은 커리큘럼이 다소 비효율적으로 짜인 측면이 있어서 첫 에세이와 두 번째 에세이 과제 사이에 큰 변별력이 없었고, 저는 '같은 과제를 왜 두 번이나 채점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을 삭히며 채점을 했더랬죠. 에세이 채점은 꽤나 정신력과 노동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잘했으면 왜 잘했는지, 못 했으면 왜 못 했는지, 일일이 피드백을 줘야 하거든요.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글을 읽다 보면 처음 2-3 문장만 읽어도 감이 옵니다. 이건 A+을 줘도 될지, A에 준할지, 아니면 그저 그런 B인지 등등. 안타깝게도 이 학생(학생 F라고 칭하겠습니다)의 글은 B-도 아까울 정도였어요. 모름지기 에세이가 갖춰야 할 조건이 없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비문과 문법적 오류로 가득 찬 글이었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모조리 다시 써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곳은 학생을 '고객'처럼 대하는 북미권이지요. 게다가 지도교수의 수업은 아니었습니다만, 저는 지도교수를 통해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에게 격려 담긴 조언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학생 F의 한참 모자란 글을 탈탈 털어 잘 쓴 문장이 단 한 구석이라도 있는지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다시 쓰기를 시켜야 할 글이지만, 학생을 낙담시키고 싶지 않아 "introduction part는 잘 썼다만, ... "으로 시작하는 평가를 남깁니다. 그리고 C+을 주었습니다.
성적이 공개되고 몇몇 학생들이 성적 문의를 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와 함께, 해당 학생이 받은 성적과 제가 왜 그 점수를 주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토의를 합니다. 그 후 제가 준 성적에 대해 해당 교수가 동의를 하면 추가 설명을 덧붙여 학생에게 알리고, 만약 몇 점이라도 더 줄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더 낮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면 이 역시 추가 설명과 함께 수정을 진행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수업 담당 교수가 깊숙이 참여합니다.
학생 F는 남달랐습니다. 성적에 '항의'하는 이메일을 쓰면서도 문법 오류와 각종 비문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글을 보내옵니다. 수업 교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의사를 표시합니다. 가벼운 이메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학생 F는 재차 1페이지 빡빡하게 '왜 자신이 받은 점수가 부당한지'에 대한 호소글을 적어서 보냅니다. 거기서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이 학생은 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Miss 너굴 is not from Canada. She said my introduction was good. I don't understand why I got C+. I think 너굴's English is not good enough to read my essay (너굴이 캐네디언 아니잖아. 그리고 내 인트로 잘 썼대메!! 근데 왜 C+이야!! 수업조교인 너굴이는 내 글을 읽을 실력이 안 되는 것 같아)"
잠자는 너굴이의 코털을 건드린 학생 F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분노를 꼬깃꼬깃 눌러 담은 장문의 이메일을 받게 됩니다. A4 3.5 페이지에 달하는 피드백을 single space로 빡빡하게 눌러 담은 저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왜 학생 F의 글이 C+ 씩이나 받았는지에 대해 한 편의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학생의 글을 거의 문장별로 분석해서, 왜 부족했고, 왜 주어진 질문에 대한 적절한 에세이가 아닌지, 더 나은 답은 무엇일지, 등 최대한 논리 정연하게 적어주었습니다. 차마 '네 글이 전반적으로 똥글인데 내 F를 줄 수 없어 C+이나 준 줄 알라'는 소리를 직설적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너의 글쓰기 실력이 앞으로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데에 지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인트로를 잘 썼다고 말했던 나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며, 배우는 자에게 격려를 전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저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징징대는 글이었다면, 저는 참았을 겁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글을 한 학기에 얼마나 많이 받는데요. 그런 것쯤은 그저, 북미권 교육 시스템의 특성상 고등학교 때까지 오냐오냐 크며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고 있다가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우는 아이들의 처절한 하소연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저를 분노케 만들었던 것은 학생 F의 인종차별적 발언이었습니다. 제가 캐나다 출신이라면 감히 그 학생이 '너굴이는 캐나다 사람이 아니라서 영어 못하잖아' 따위의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출신지와 상관없이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어디 쫌스럽게 본인의 부족함이 부끄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 영미권 출신 아니지? 너 영어 못하지?' 따위의 일차원적인 발언을 날리나요. 그 수업을 담당한 교수 역시 아시아 출신이고, 그 학생 F 역시 중동 출신이라, 우리 모두 영어의 장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말이죠. 저는 이런 비겁한 행동을 절대로 참을 생각이 없었고, 그가 의심해 마지 않는 제 "영어 실력"으로 3.5페이지에 달하는 에세이 피드백을 다시 보내주었죠. 그 이메일에 CC되어 있던 수업 교수는 제 빡침을 느꼈는지 지금부턴 자기가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더군요. 물론, 학생 F는 더 이상 답장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는 이 후 제가 맡은 다른 수업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것은, 에세이 채점을 할 때 채점 가이드라인을 아주아주 꼼꼼하게 설정하고 점수 구간도 촘촘히 나눠서 칼같이 명확한 설명을 덧붙인 다음 학생들과 공유한다는 것이었죠. 또한 매번 채점을 마친 후 수강생 모두에게 전반적인 피드백을 주는 겁니다. "Overall review" 라는 이름으로, 가장 흔하게 보인 실수를 지적하고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에 대한 전체 평가를 해주는 것이죠. 이렇게 할 경우 채점할 때 시간이 정말 많이 듭니다. 하지만 성적 이의제기나 개소리가 나올 경우 써야 할 추가 시간과 감정 소모에 비하면, 차라리 초장에 많은 공을 들여서 일처리를 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80-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에세이를 채점하다 보면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정말 훌륭한 글은 한 학기에 1-2개 나올까 말까 하고요, 전체의 70%에 해당하는 글은 거의 A나 B 구간에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저지르는 실수도 비슷합니다. 이걸 cutomized feedback으로 100명에게 일일이 적어주자니 마치 끝이 없는 가사노동을 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만, 한 학기 시행한 후 "초장부터 미친듯이 꼼꼼한 피드백"의 장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 성적 이의제기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요. 그리고 채점하는 주체인 저도 아주 꼼꼼한 기준으로 일을 하게 되어서 제 판단을 더 신뢰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합당한 이의제기의 경우에는 성적을 수정합니다만, 그런 경우는 한 학기에 80-100명 중 1-2건에 불과합니다. 저도 로봇이 아닌 사람인지라 끝이 없는 개소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제가 가르치는 일로부터 정을 떼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수업 교수는 수업조교를 그렇게까지 지켜주지 못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교수조차 학생을 client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제 마음의 평화는 제가 지켜야 하니, 건드리면 물어버릴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뭐, 학교에서 사람을 상대하면서 있었던 희한한 일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제가 수업조교로 일했던 세월도 길고, 지금껏 저를 거쳐간 학생만 해도 1000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배움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친근한 박사생이 되고 싶었는데, 싸락눈 맞아서 옷이 젖어들어가듯, 한 두 명씩 상대하기 어려운 경우를 맞이하다 보니 저도 장벽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어려운 사람'이 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애정이 식은 사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제가 좋은 선생님이 될 자격이 충분치 않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따로 서술하겠습니다). 안타까웠던 점은, 학교에서 매 학기 제공하는 '수업조교를 위한 워크샵'에서조차, 수업조교가 아시안 여성일 경우 학생들의 성적 이의제기라든지 트집이라든지 정신적 괴롭힘의 문제가, 아시안 남성 혹은 백인 남성/여성의 경우에 비해 더 많이 보고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아시안 여성 수업조교가 "피라미드의 가장 하층부에 있다"라는 표현까지 쓰더군요.
아직도 풀어놓을 에피소드는 많습니다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게요.
다음 글에서는 2) 그냥 개소리의 주체가 아직 인간이 덜 된 경우에 대한 경험을 더 풀어보겠습니다. 결론은 같습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경험이지만, 이 모든 것을 토대로 깨달은 바는 간단합니다. 저는 더 이상 종류 불문하고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부당한 발언에 입 닫고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영어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제 의사 표현을 하면 됩니다. 어차피 법정 변호사도 아닌데 화려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당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아주 조목조목 짚어주고 내 의견을 말하면 됩니다. 세상에 착하고 예의 바른 캐네디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착한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여전히 저를 씁쓸하게 만드는 부분이지만, 내가 '물 수 있다'는 대상임을 인지한 이후에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개소리에는 침묵을 지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