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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ul 14. 2023

산소가 부족해

July 2023

최근 들어 호흡 이슈가 생겼다. 

아니, 사실 몇 년 전에 처음 생겼는데 당시에는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서 생긴 2차 증상인 줄 알고 호흡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못 했었다. 


올봄 번아웃이 왔을 때, Paula는 누구보다 신속히 그리고 단호하게 내 모든 일정을 중단시켰다. 그녀의 시기적절한 결정 덕분에 번아웃이 우울증으로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흉곽을 최대한 부풀려봐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산소가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던 들숨과 날숨의 행위가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힘을 들이지 않고 숨을 쉬려고 노력하면 어느새 숨을 참고 있는 내가 보였다. 공기 중의 산소 포화도가 낮아지는 것 같아서 한밤 중에 침대를 박차고 나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일과 시간 중에도 (심지어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중에도), 내 폐로 산소를 직접 주입하고 싶을 만큼 답답한 순간이 늘어갔다. 사람들이 말하는 panic disorder/panic attack은 지금 이 증상이 더 심해지면 오겠구나, 싶었다. 


Paula와 호흡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날, 그녀는 본인의 panic disorder 병력을 들려주었다. 내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숨이 답답할 때 어떤 느낌인지 잘 아는 counsellor를 둔 것은 행운이었다. 이래서 가장 훌륭한 의사는 많이 아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감사한 마음도 잠시, 내가 정말로 호흡 이슈가 있다고 '확정' 받은 날부터 증상은 조금씩 심해졌다. 어떤 사안을 '진짜 문제'로 뇌가 인식한 다음부터 몸은 더 충실히 반응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찾았던 수영장에서 숨을 못 쉴 것 같아서 머리를 물속에 담그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랩을 돌기 전 몇 번이고 "괜찮을 거야", "지나갈 거야"를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안심시킨 다음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내 호흡 이슈가 심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던 하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영은 내가 가장 처음 접했고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물을 무서워했지만 (대체 물속에서 어떻게 숨을 쉰다는 말인가??),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훨씬 전 다행히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어미 사자의 교육 방식을 무의식 중에 실천한 엄마 덕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체중 감량을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아빠의 굳은 의지로 한 동안 온 가족이 수영장을 같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의 다이어트 계획은 실로 성공적이어서 당시 '토토로' 같았던 우리 아빠는 약 15kg을 감량하고 토실토실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탈출했다). 이 기회에 아이들에게도 늦기 전에 수영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건설적인 뜻이었던 것 같은데, 문제는 두 사람의 출근 시간을 고려하면 새벽 6시 첫 수영시간 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족회의 따위는 없었던 것 같고, 언젠가부터 나와 내 동생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수영장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 동생에게는 새벽 5시 기상이 가혹하다는 의견 일치가 있었는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 수영 모임에서 제명되어 꿀잠을 자는 특혜를 누렸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계속 새벽 6시 수영에 딸려 가야 했었고 (내가 하고 싶다고 했었던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있지만, 늘 그렇듯이 기억에 왜곡이 있을 수 있다...), 수영장 직원이 출근하기도 전 수영장 문을 열어젖히는 아빠의 묵직한 열정 덕분에 나는 수영장에서도 게을리 물에 가라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몇 달 후에는 아침 출근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엄마도 조기 수영 모임에서 탈퇴했는데, 나는 아빠랑 꿋꿋이 그 모임을 지켜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릴 때 운동을 몸에 익혀둘 수 있었던 훌륭한 선택이었다. 수영은 지금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고, 운동은 역시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말에 100% 공감하게 만든 경험이었다. 다만, 10살짜리 소녀에게 (성인이 된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소녀는 철저한 야행성 동물이었다!!) 새벽 5시 기상은 참으로 가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정말 매일 아침이 고역이었는데,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자동차 시트에 앉는 것도, 밤새 얼어 붙었던 수영장의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샤워기 아래에서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계속 꾸벅꾸벅 졸았던 것도, 샤워를 하고 나면 체온이 급격히 식어서 샤워장에서 수영장으로 가는 길이 서울-부산만큼 멀게 느껴지는 것도, 이 모두가 고역이었다. 물론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알 수 없는 희열이 생기며 운동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아드레날린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어린 나이에는 뿌듯함이고 나발이고 그저 너무 추웠다. 


게다가 한 주 수영 강습을 마치고 나면 주말에는 온 가족이 수영장으로 '복습'을 하러 갔었는데, 이 '복습' 시간은 어미 사자의 육아 방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나와 내 동생은 한 차례씩 소환되어 엄마와 1:1 강습 시간을 가져야 했다. 물론 엄마 본인이 수영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기초 코스를 우리와 수강했기에 기본적인 호흡과 팔 동작은 알고 있었다. 1:1 강습 시간 동안 엄마의 역할은 우리의 무한 연습을 독려(강제) 하는 것. 처음 수영을 배우면 물속과 밖에서 '음파, 음파'를 외치며 호흡법을 익혀야 하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고통스러운 연습 단계를 지나야 몸에 익고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하기에 우리는 조금 어렸기에 자력으로 '음파' 연습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왕 배울 거라면 성실히 배워야 한다는 엄마의 신념 때문에 둘이 둘 아가면서 소환을 당하고 때로는 울면서 '음파' 연습을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물속에서 나란히 서서 '음파' 연습을 하다가 수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는데 둘 다 물속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엄마의 '헌신' 덕분에, 나는 서서히 물속에서의 호흡법이 몸에 익었고 (내 동생은 모르겠다. 워낙 운동이랑 거리가 멀었으니), 시나브로 엄마보다 수영을 잘하게 되었고, 그렇게 엄마의 1:1 수영 강습에서 벗어났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말한다. 

주 6일 일하고 (당시에는 주 5일제가 아니었다), 주말이라고 하루 있는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을 가서 복습시키는 본인도 힘들었다고. 하지만, 본인의 강력한 개입(?)이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물에 떠서 다닐 수 있거나 수영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을 거라고.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낳아 키워도 이상하지 않을 이 나이에도 여전히 헷갈린다. 

모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육도 고통을 동반해야 할까? 나는 엄마가 강압적으로 연습을 시키지 않았다면 수영을 평생 하지 못했을까? 내가 재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흥미를 찾는다면, 시기의 차이일 뿐 수영을 결국 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젠가 내 친구와 나눈 대화로 인해 나는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고 엄마가 된다면 Asian Tiger Mom처럼 자식을 키우겠다고 농담처럼 (그렇지만 진담으로 들렸다)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본인의 어머니께서 늘 '힘들면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해 주셨기에 지금 자기가 뭐 하나 내세울 만큼 할 수 있는 운동이나 취미가 없다고. Asian Tiger Mom의 교육관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이가 하기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일은 언제 멈춰주고 언제 독려해줘야 하는가? 우리 엄마의 말처럼 부모의 강력한 개입이 없다면 정녕 '뭐 하나 내세울 만 한' 결과가 없는 것인가. 


참고로 내 수영 실력은 '뭐 하나 내세울 만 한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운동일 뿐이다. 다만, 나는 물을 많이 무서워했다. 그래서 호흡 훈련을 할 때에도 물속에서 숨을 내뱉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연습을 게을리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부분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무서운 것, 어려운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는 없다는 교육관을 가진 사람이고, 평생 그 교육관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힘들면 천천히 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렴"과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늘 말하지만, 내 기억에 왜곡이 있을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평생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들의 행동과 삶의 태도를 통해 암묵적으로 '할 거면 제대로 해라', '고난을 이겨내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는 식의 메시지는 꾸준히 받았다. 물론 사람의 가치관도 나이와 경험치에 따라 변하니까 엄마도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일까. 나에게 조금 관대해져도 될까? 내가 나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Paula를 만난 세월이 4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불과 한 달 전에 둘이 손을 꼭 잡고 나의 성장을 '몰아붙이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기로 굳게 약속했음에도, 이 질문들이 내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질문은 우리 엄마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선생님, 교수님, 그리고 교육자 모두에게 향한 것일 테다. 어쩌면 내가 속했던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일지도. 꼭 숨 쉴 겨를 없이 몰아붙여야만 어떤 결과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다 할지라도 숨 좀 쉴 수 있는 방식을 택할 수는 없는 건가?



Paula는 호흡 이슈가 생기면 '현실'로 돌아올 방법을 즉시 실천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예를 들어, 바닥을 딛고 있는 내 발바닥의 감각, 의자에 앉아 있는 엉덩이의 감각,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등짝의 감각, 수영을 할 때 상체 스트로크의 감각, 킥을 하는 다리의 감각, 등 '지금, 여기'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라고 알려주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지나갈 거야", "이 고통은 영원하지 않아"와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주라고 덧붙였다. 


현실 감각을 인지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호흡 이슈 자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레 문제가 없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싶었다. 착각이었다. 쉬는 시간도 가져보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 후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일 수 있게 되었기에 예전만큼 내가 받는 압박감이 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통 번아웃이나 우울증이 생기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를 제일 먼저 묻는다. Paula가 서둘러 진단 및 치료 일정을 잡아준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수면에도 별 이상이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이슈는 불쑥불쑥 나타났다. 영화를 보다가도,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다가도, 연구실에 앉아 있다가도, 예측을 할 수 없는 패턴으로 나타났다. 


늘 그렇듯 한 주의 주말을 시작하는 의식으로 <금쪽 상담소>를 보던 중이었다. 대변을 참는 아동들의 심리를 완벽주의적 성향과 높은 통제력, 그리고 그 기저에는 불안이 있음으로 풀어내는 오은영 박사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물론 나는 제 앞길을 가리는 능력을 갖춘 성인으로써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나오겠다는 대변을 쓸데없이 막지는 않지만, 완벽주의적 성향과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의 기준에서 만족할만한 '완벽'을 기하는 것이고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 뿐 아니라 누구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불안도가 높아지게 마련인데, 타고난 기질 및 후천적 경험은 얼마든지 이러한 불안도를 상승시킬 수 있다. 나는 기질적으로도 예민하여 불안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경험적으로도 최근 내가 겪었던 일들은 대체적으로 불안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내 호흡 이슈가 시작된 2020년은 내가 스스로의 건강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낀 해였고, 뭐가 어떻게 언제 발현될 지 모른다는 말에 큰 두려움을 느꼈던 해였다. 마찬가지로 작년 여름은 부모님의 수술과 사고를 보며 크나큰 무력감을 느낀 계절이었고, 그 이후로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환경(예를 들어, 차 사고나 엘리베이터 추락)에서 이전과 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느꼈다. 불안을 직접적으로 야기했던 '바로 그'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뿐 아니라, 그와 유사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조건이 달라도 처음의 불안을 느낀다는 설명도 맞아떨어졌다. 지난 3년간의 경험은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데이터였고, 성과에 대한 압박과 불확실성은 가뜩이나 높아져있던 불안도를 더 증폭시키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Paula가 물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뭐냐고.

나는 "통증"이라고 대답했다. 뭐, 내가 겪었던 통증이 엄청났던 것도 아니다. 그저 몸을 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응급실을 가거나 진통제를 먹거나 하는 정도였고, 기껏해야(?) 편두통 정도였다. 다행히 약에 잘 반응했기에 통증이 엄청나게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아니다. 내 경험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이 많이 아픈 것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몸서리치는 사람을 바로 옆에서 봤기에 '얼마나 아플까'를 상상하다가 가상의 통증을 무서워하게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나는 아픈 것이 무섭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아픈 것은 내가 오롯이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겪어내야만 하는 그 시간이 무섭다고 말했다.   


"영원한 것은 없어 (nothing is forever)"


이제는 내가 그 앞에서 뭐 좀 아팠다, 어디가 안 좋다, 무슨 이슈가 있다, 고 말하는 것이 꺼려질 만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것으로 추정되는 Paula가 말했다. 아플 것 같은 전조증상이 있으면 진통제를 신속히 먹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찾아오면 "이 또한 지나간다(it will pass)"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라고 한다. 호흡이 불편해질 때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라고 하였다.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그 또한 지나가고 말 것이니. 두려워하는 마음, 불안과 공포로 물든 마음 역시 영원하지 않다고. 그리고 나를 믿으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을 아는 나 자신을 믿으라고. 내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두 발과 두 다리로 땅을 버티고 서 있는 나의 현실 감각을 믿으라고 했다. 그러면 영원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안에서 조금은 해방(liberty)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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