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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숑알숑알 Mar 06. 2020

통영을 만나는 가장 멋진 방법: 예술 기행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자주 모호해지는 도시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났다. 4년 전 1월에 덜컥 일주일의 내일로 여행을 계획한 일, 기차역도 없는 통영을 목적지에 넣은 일, 뱃길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소매물도에 혼자 들어가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고 나온 일, 그때 내려다 본 청록빛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려 넉 달 만에 통영을 다시 찾은 일, 이후 열 번이 넘게 통영에 내려가 무수한 섬에 그만큼 무수한 발자국을 찍고 있는 지금까지.


 한 여행지를 여러 번 찾는 경험만큼이나, 연고도 없는 지역에 이토록 진득한 애정과 향수를 느낄 수 있단 사실이 반복할수록 신통했다. 때때로 좋아하는 친구를 데리고 통영에 갈 때면 나만 아는 보석함을 함께 들여다보는 기분에 또 그것대로 들뜨곤 했다.


 이 책은 통영의 작은 출판사 '남해의봄날'과 통영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비영리 시민단체 '통영길문화연대'가 함께 펴냈다. 아름다운 남해의 풍광만큼 유구하고 깊은 예향의 매력을 제대로 톺아본 로컬 안내서인 셈이다.



 내가 생각하는 통영의 매력은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예술의 향기에 있다. 동피랑 벽화마을 한 바퀴 돌고 루지 타고 꿀빵 사 먹고 '통영 별거 없던데' 하는 후기를 볼 때면 나는 숫제 속상한 마음마저 든다.(?)

 통영은 면적과 인구 대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다. 문학과 음악, 미술, 공연, 공예까지 종목도 다채롭다. 이 모든 것은 조선시대 통영에 충청, 전라, 경상 삼도를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영 자체에서 화폐를 찍어낼 만큼 권한이 대단했고 통제영의 총사령관인 통제사는 당시 무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휘 중 하나였다. 통제사가 있는 통영으로 조선의 온갖 수준 높은 물품이 흐를 수밖에 없었고, 다도해를 비롯한 수려한 자연 환경이 더해져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책에서는 장인지도, 문학지도, 공연지도로 챕터를 나누어 통영의 문화예술을 두 발로 직접 걸어 느낄 수 있는 코스를 제안한다. 박경리 소설에 배경이 된 딸 부잣집이 어딘지, 청마 유치환과 백석 시인이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며 시를 쓴 우체국과 돌계단이 어딘지, 이중섭과 전혁림 등 시대를 풍미한 미술가들이 인생과 예술을 논하던 술집이 어디쯤 모여있는지, 조선시대 기술 그대로 지금까지 갓과 나전칠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보려면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


 통영의 실핏줄 같은 골목골목을 걸을 적마다 나는 이곳 사람들의 '예술 DNA'가 아직까지 선연하며 유효하다고 느꼈다. 고향이 가진 멋과 매력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그들은 자부심이 넘친다. 자랑스럽기 때문에 보존하고자 하고 혼자 알기엔 아깝기에 적극적으로 알리려 애쓴다. 버스 정류장에 김춘수의 시가 무심히 적혀있는가 하면 상점이 즐비한 길거리의 바닥에 박경리의 소설 한 구절이 놓여있다.

 통영항 근처에 매인 어선을 보고 있자면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 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게 음악으로 들렸다'던 작곡가 윤이상의 말을 곱씹게 된다. 말하자면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자주 모호해지는 도시다. 


매물도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소매물도


 작년 12월에도 휴가를 쓰고 통영에 다녀왔다. 제철 맞아 통통해진 굴을 양껏 먹고, 또 한 시간이 넘는 뱃길을 달려가 매물도의 절경을 만끽했다. 항상 남해의 섬은 뭍에서 고인 잡념을 훌훌 흘려보내주곤 했다. 파랗게 빛나는 윤슬을 내려다보며 유독 지난했던 한 해를 돌아보게 됐다. 매일 조바심내던 육지와 이곳을 너른 바다가 갈라놓은 데서 오는 물리적 거리감이 편안했고, 사면을 둘러싼 물결이 넘칠 만큼 포근한 위로로 느껴져 찔끔 눈물이 났다.


 일상에 바래질 때마다 통영은 매번 과분한 영감과 안식을 건네고 있다. 아무리 고백해도 모자람이 없는 통영의 멋에 앞으로도 자주 영혼을 기대놓고 싶다. 언제나 버스 표만 끊으면 인생의 비빌 언덕에 닿을 수 있다니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르겠다. 직접 디뎌봐야 더 진하게 알 수 있는 통영의 매력을 더 많은 이들이 느껴보면 좋겠다.


(덧) 책을 펴낸 출판사 남해의봄날에서는 '봄날의 책방'이라는 서점도 운영하고 있다. 조그만 동네 책방이지만 2019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던 대단한 곳이다. 춘삼월이면 벚꽃이 예쁜 동네 봉수골에 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올해 봄 통영 여행을 계획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들러보기를 추천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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