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찬장에 안 마시는 차가 한가득이다. 차 박람회에서 한 움큼, 여행 가서 한 움큼 사 오다 보니 이렇게 됐다. 당분간 새로운 차는 안녕이다. 지금 있는 차를 비워내기 전까지 새로운 차는 사지 말아야지. 이런 다짐으로 하루에 차 한 잔 이상은 꼭 마신다.
오늘은 뭘 마실까 찬장을 뒤적거리다 특별한 티백을 발견했다. '루이 캐모'. 귀여운 사슴이 그려진 티백 태그에 보라색 사인펜으로 쓰여있다. 투박한 글씨체에 테두리의 잉크는 번지기까지. 루이는 루이보스고, 캐모가 캐모마일이고. 원재료의 이름을 정직하게 적어놓은 블렌딩 티에는 친절함이 묻어있다. 엄마가 문화센터에서 만들어온 블렌딩 티다.
"잘 모르는데 일단 많이 넣었으니까 여러 번 우려먹어. 뭐 들어갔는지 적어놨어."
틴케이스를 뒤적이며 티백 내용물을 들여다본다. 일반 티백에는 내용물이 1/3 정도 차있는데, 엄마의 티백은 두툼한 솜이불 같다. 물을 평소보다 많이 넣어야겠구나.
"관심도 없으면서, 언제 이런 걸 다 만들었대."
문화센터에서 손으로 꼼지락 만들었을 엄마가 떠오른다. 자기가 먹을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마 무슨 맛인지도 모를걸.
마음이 얹힌 것 같다. 갓 사우나에서 나온 것처럼 울렁울렁. 냉장고를 꽉 채우는 엄마의 반찬은 당연하게 알고 있던 사랑이고. 손바닥 위에 올라오는 앙증맞은 블렌딩 티는 알지 못했던 더 깊은 사랑. 감사함보다 미안함을 느끼는 건,
혹시라도 엄마 인생이 전부 나로 가득 차 있을까 봐. 당신의 하루가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조각으로 완성되지 않는 당신의 퍼즐이. 그걸 미리 슬픔으로 채우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슬픔으로 돌아올까 봐 무서운 거야.
그래서 오해로 가득 찬 바보 같은 연민을. 당신이 될 수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