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공정여행 답사 - 3.
세상의 변화는 빠르고 놀랍다.
언젠가부터 변화를 쫓아가지 못할거라는 압박을 느끼고 살아간다.
손에서 한 시도 스마트 폰을 놓지 못하고, 시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음에도 무궁화보다는 KTX를 타고 머나먼 타국 땅에 여행을 하고 나면 남는 건 기념품과 사진 뿐일만큼 정신없이 여행을 할 때가 즐비하다.
삿포로와 오타루에 낡아서 다시는 쳐다보지 않던 것들의 변신을 소개한다. 낡은 것이 곳 도태된 것이라는 편견들이 사라지길 희망하며.
사진만 보자면 유럽의 기차역과 흡사한 공간,
얼마 전까지 낡은 맥주 공장으로 삿포로 시의 천덕 꾸러기 중 하나였던 삿포로 맥주원은 이제 삿포로 팩토리란 이름의 상업시설(쇼핑몰, 사무실, 영화관, 박물관 등)로 재탄생했다.
독일에서 들여온 기술로 일본 최초의 맥주가 탄생한 삿포로 팩토리 옛 건물에는 맥주 박물관(무료), 신선한 생맥주를 종류별로 유료 시음할 수 있는 바(Bar), 홋카이도 전통 음식을 고풍스런 맥주 공장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삿포로 비어 가든(Sapporo Beer Garden) 등이 있다.
상업 공간은 일반적인 쇼핑몰과 함께 예술가들의 소품 상점과 공예가들의 가죽 상점 등도 보인다. 방문객들을 위한 공공 행사도 제법 열리는데, 내가 방문한 날은 재즈 공연이었다. 삿포로가 배경 중 하나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창고형 쇼핑몰에선 느끼기 힘든 추억과 감상이 흐르는 삿포로 팩토리, 그 많은 상업시설 중 하나 정도는 이래도 되지 않을까.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 <러브레터>의 명장면들을 간직한 공간 오타루, 눈 없는 오타루에 가면 영화의 감흥은 별로라지만 낡은 운하와 창고들의 변신은 놀라울 따름이다.
막부의 홋카이도 개척(침략) 이후 국제 무역항으로 지정된 오타루, 제국주의 전쟁으로 일본이 경제특수를 누릴 때 운하를 설치하고 제국 굴지의 은행들이 주변에 즐비하여 '북의 월가(현재도 지명 사용)'라고 불렸다.
일제의 패전 이후 인근도시 삿포로의 부상, 기계화와 육상 운송의 발달 등으로 운하와 주변 창고들은 말 그대로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북극의 오래된 무역항... 황폐해진 운하... 잊혀진듯한 어딘가 외로움이 떠도는...
1974년 4월호 잡지 <타비>
- 관광으로 읽는 홋카이도, 조아라 중 일부 발췌
수십 년 전부터 위와 같은 상황이었으니 지역경제 부흥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있었고, 결국 운하와 창고를 대채할 도로건설이 추진된다.
그러던 찰나 시민들을 중심으로 운하보존운동이 시작된다. 기억의 보존과 관광 자원 활용 등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이 제시되고 10여년 간 지리한 싸움 끝에 이 곳은 보존되기에 이른다.
운하엔 물자가 아닌 관광객을 실은 배가 오가고 창고들은 유리공예나 오르골을 파는 상점 혹은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주 무대였던 오타루를 대변하는 다양한 해산물 식당으로 쓰인다.
10만명 남짓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타루엔 연간 8백만명 정도의 외래관광객이 찾는다.
이쯤 되면, 낡은 것들을 무시하는 건 정말 무지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삿포로 역에서 삿포로 팩토리까지 걸어가는 20분 남짓의 시간, 가는 길에는 낡은 건물들이 보이는데 대부분 대중이 머물거나 즐길 수 있는 커피숍, 바(Bar), 상점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러는 유산으로 지정된 경우도 있었는데, 잘 보존할만한 방법을 찾는다면 대중 공간으로 활용되는게 보존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나, 고민해 본다.
오타루 역 주변 골목들은 B급 문화라고 해야할지, 아님 90년대 어디즈음이 박제되었다고 해야할지 낡았지만 감성돋는 공간들이 여럿 보였다.
골목들 사이엔 낡은 철길을 두고 아이들의 놀이터와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삿포로 역에서 토요히라강 천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낡은 것들을 파는 가게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골동품 가게라고 하기엔 얼마 안 된 60-70년대 물건들이 많이 보이는데, 마음에 드는 걸 손에 넣기엔 그리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다.
낡은 것들을 다루는 주인들은 보통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낡은 것은 더 이상 낡은 것이 아니었다.
새 책을 파는 서점도 부러운 일본이지만, 헌 책과 새 책을 한 대 섞어 파는 서점의 존재는 반가울 따름이다.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우리에겐 새 책을 파는 오프라인 서점도 어느샌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새 책과 헌 책이 뒤섞인 공간, 까막눈으로 보더라도 구하기 만만찮은 책들이 많다. 서가의 책들의 서서는 시대의 문화와 지성의 고민이 엿 보이는 대목이다. 가끔 낡은 책에서 만나는 메모나 낙서를 접했을 땐, 그와 대화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얼마 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갈 일이 있었는데, 다국적 프랜차이즈 상점이 즐비하여 마음이 쌔 했는데, 이런 서점들이 만만찮게 남아서 마음이 그만그만했다. 우리나라 대학 앞에도 이런 공간 하나즈음은 존재해야 한다.
공정여행 사회적기업 (주)공감만세의 이사로 활동하신 조우석 님의 추천으로 방문한 오래된 공간. 오래된 만화책, DVD, 게임팩, 장난감 등이 새 것과 헌 것 구분없이 뒤섞여있다.
삿포로 노면전차 13번 정거장 이시야마도오리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헌 만화책방, 수집욕이 있어보이는 주인은 딱히 무엇을 팔 생각이 있어보이진 않는다. 가격은 이 공간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로 착한 편, 아주 오래된 만화부터 비교적 최근의 만화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숨쉬는 제법 큰(?) 공간이다.
최근 한국에도 만화카페가 생겨나는데, 만화책만 있지 만화에 대한 추억, 향수, 그리고 오타쿠적 정신 내진 끌림 등이 보이질 않는다. 운영이 만만찮아 그럴거다. 그것을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협동조합으로 공간을 만드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 상상해 본다.
낡은 것을 무조건 지우면 우리의 기억과 정체성도 지워진다. 낡은 것을 없애는 것은 만만찮은 비용도 들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엔 새로운 것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빠르게 낡은 것으로 전락한다. 낡은 것은 현재 쓸모없음으로 정의된다.
나의 낡음이 두려울 때 즈음, 낡은 것들의 반란을 엿 본다. 낡음은 또다른 새로움의 시간과 이야기가 입혀진 산물이다.
우리 여행의 시선은 따스하고,
낡은 것을 재조명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단초이길 희망한다.
#sapporo #hokkaido #otaru #홋카이도
#삿포로 #오타루 #공정여행 #낡음 #낡은 것
#서점 #헌책방 #지역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