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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a C Jun 02. 2022

진상고객과 진짜고객의 한 끗 차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말자

  

14분 연착이 되었다.

나도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팀장님마저도 지나가시면서 무전기에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차가 지연돼서 걱정이라고 한마디 하실 뿐이다.


이제 곧 정차역인데 아니나 다를까

70 즈음의 할아버지 고객이 나와

나를 보자마자 언성을 높인다.

역에서 시내로 가는 셔틀을 타야 하는데

그걸 놓치게 생겼고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있다고.

솔직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스트레스가 정수리까지 치솟는다.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를 한참을 잡아두고 삿대질에 고함을 치더니

결국엔 직원인 내가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나는 내가 그 버스를 잡아둘 권한도 없고

런 상황에 대한 피드백을 건의할 창구도 없으니 고객님이 직접 역이나 고객센터에 건의해 주시는 방법밖엔 없다라고 솔직하게 오픈했다. (예를 들어 근무 중에 이런 고객 요구가 있었는데 참고하는 게 좋겠다 등등의 일련의 피드백을 할 곳이 없다.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정말로. 왜냐면 코레일 본사에 그런 건의를 해야 하는데 하청 직원인 우리가 그런 말을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저 지연될 상황에 대한 사과뿐

그런데 사과는 귓등으로 흘리고선 대책을 내놓으라고 사람을 몰아세운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삿대질에 욕설에 사람 기분 나쁘게 하면서 역에 셔틀을 잡아놓으라고 요구해놓곤 뒤에 가선 내가 언제 버스 잡아 달랬냐고 그런다. 그럼 버스를 잡아달란 게 아니면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니 말을 그따위로 하지 말란다. 지금 어마어마하게 순화해서 쓴 것이니 내가 들었을 말은 어떠할지 짐작이 가는가.


열차 운행 중에 다음 역에서도 몇 분 지연 도착하참고해서 일정을 바꿔라 같은 방송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할 일이 없다. 그동안 수많은 지연과 사고를 겪었어도 그런 방송이 생긴 일이 없다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운행 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더 많이 지연이 될 수도 있고, 연이 되다가도 시간을 맞춰 도착하기도 한다. 지연 출도착 시간을 운행 중에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지 열차팀장의 권한으로 정차역 출발 직후에 몇 분 지연 출발했으나 운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 정도의 방송만 할 뿐이고, 심지어 그 방송도 바로 전역인 동대구역에서 출발 직후 시행했다.

근데 이 고객은 지연된 시간과 몇 분 지연 도착할 예정이니 참고해서 일정을 바꾸는 등 대비를 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대한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처음에 얘기했던 버스를 잡아 세우는 것 혹은 교통편 제공(보상-내가 봤을 땐 택시비를 달라는 압박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택시비 내놓으라는 사람이 많다) 말고는 이 사람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럴 땐 상황 수긍과 빠른 포기다.

지연된 상황은 사과드릴 수 있으나 버스를 잡아두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나 그에 대한 보상은 해드릴 수 없다 하니 이젠 욕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10년 차 나에게도 오기가 생겨 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폰을 꺼내 녹음을 시작하자 그 고객은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뒤돌아서며 나도 속으로 감정 배설을 시작했다.

역시나 2호차에서 마감을 하는 도중에 내 화는 많이 중화가 되었다. 컨트롤 능력이 향상된 나를 스스로 칭찬하고 있는데 옆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양복 입은 신사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지연이 많이 됐나 봐요? 제시간에 도착하긴 힘들겠죠? 이미 도착 시간을 넘겼는데.."


다시 시작인 건가 하는 생각으로 죄송하지만 14분 정도 지연 도착할 것 같다고 했는데

돌아온 말은 정말이지 아까의 상황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버스를 타야 하는데.. 놓치겠네요.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있는데 어 수 없겠네요~ 허허"






스스로의 가치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나온다고 했다.

내가 이 날 만난 두 명의 고객 중 한 명은 스스로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연된 상황에 화가 나는 건 당연하나 상대방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건 인도 안될 걸 알면서도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닐까?



퇴근길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가치는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을까?

다른 사람들도 곰곰이 생각해보고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말과 행동을 신중히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상 손님이 되는 건 쉽고 빠르다.

내가 원하는 것만 얘기하고 내 기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조금 더 어려울 뿐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면 돌아오는 나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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