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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Dec 10. 2021

야근 메뉴 고민 중이세요?

빠르고 정확하게 고르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2021년을 한 마디로 압축해보자면 감히 ‘야근’이라 할 수 있겠다. 작년까지 하던 업무를 뒤로하고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됐고, 그로 인해 주 2회 이상의 야근을 꾸준히 했다. 누군가는 야근수당으로 통장이 좀 따뜻했겠다고 농담하지만 조금 추워도 되니 야근하지 않는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고 응수하곤 한다. 그만큼 올해는 저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저녁식사는 많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회사는 상당한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다. 맛집의 메카다. 배달의민족만 켜도 인스타그램 피드에 등장하는 맛집의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오후 5시쯤, 야근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보통 우리는 ‘파티원’을 모집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야근파티원’ 되겠다. 같은 사무실 내에 야근자를 취합하면 그날의 승리자와 패배자가 드러난다. 슬프게도 난 패배자에 많이 속했다. 그리고 패배자끼리 삼삼오오 모인다. 그리고 조심스레 서로의 점심메뉴를 공유한다. 대개는 같은 팀 사람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기 마련이니 이는 별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다. 만약 점심에 김치찌개를 먹었다면, 그날의 야근밥 후보에서 한식은 제외된다.     


점심메뉴를 제외한 뒤 이제 국적을 정할 차례다. 난 보통 야근파티원 중 막내에게 그 선택을 권한다. “어느 나라로 하실래요?”하는 식이다. 한식을 제외하고 일식, 중식, 양식 등 여러 선택지가 있다. “밥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요”라고 어렵게 대답한 막내에게는 보다 구체적인 선택지가 필요하다. 베트남(쌀국수), 중국(짜장면), 미국(샌드위치, 햄버거, 샐러드)이라고 고르기 쉬운 선택지를 내민다. 막내 파티원이 샌드위치나 햄버거가 좋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이제 야근밥 후보는 두 가지로 압축됐다.     

불타고 있는 게 햄버거인가요? 제 야근인가요..?

이제 내 맛집 스킬을 보여줄 때다. 배달의민족을 켜고 화려하게 검색해나간다. 샌드위치와 햄버거 중 햄버거가 조금 더 당기는 날이다. 사심을 넣어 햄버거 브랜드 몇 개를 읊어나간다. 그날의 야근파티원 중 육즙 터지는 패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은 바스버거 등 수제버거 브랜드에서 스탑 신호가 들려온다. 치킨패티를 좋아한다면 스모키살룬이나 버바나 등 치킨버거 강세 브랜드에서 모두가 멈칫한다. 간혹 맥도날드와 버거킹, 맘스터치 등 ‘Classic is Best’로 갈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야근밥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상한 가액 옵션을 통과해야 한다. 법인카드가 허용하는 금액은 10,000원.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지리적 특성과 저녁식사임을 고려하면 풍족하지도 않다. 더군다나 배달은 응당 ‘배달팁’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단품과 세트를 적절히 조합해 시키고 야무지게 리뷰도 작성하겠다고 메시지를 남긴다. 수많은 야근의 결과, 파티원 4명이 모여 40,000원의 예산으로 주문하는 규모가 가장 풍족하면서도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는 경우의 수였다.     


이 모든 과정은 5시 15분까지 완료해야 한다. 그래야 6시에 따뜻한 음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5시 30분이 넘어간다면 우리와 비슷한 야근족들의 주문에 밀려 7시쯤에나 저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제버거, 찜닭, 포케, 샐러드, 서브웨이, 떡볶이. 2021년 배달의민족 주문내역에서 가장 많이 보인 메뉴들이다. 물론 정말 좋아하는 메뉴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저녁식사라도 회사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맛집 앞에서 한 시간씩 줄을 설 지언정 내 시간을 들여 내 돈 주고 먹는 밥이 회사의 그것을 월등히 능가한다.

2022년에는 배민 VIP 자격을 내려놓고 싶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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