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터키에 있는 날이 길어지며 내 사소한 습관들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이주일 가까이 있으며 생긴 변화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사소한 습관같은 것.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놀라웠던건 입맛의 변화였다.
처음엔 너무 달아 손톱만큼의 시식용 샘플을 먹고도 혀가 절여지는 것 같은 로쿰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집어먹었고, 초콜릿이나 크림이 상상을 초월할만큼 들어 손도 못대던 과자를 선물로 가져가겠다며 쟁여놓고 있었고, 차와 커피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씁쓸한 맛으로 먹는 거라는 생각을 고수했던 내가 안 그래도 달달한 애플티믹스에 각설탕을 두 개씩 넣고 있었다.
여행에서 사소한 기호가 바뀌었다면, 여행이 길어지고 그에 적응하며 몸에 밴 습성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터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있었던 이스탄불의 숙소에서 묵은 것은 총8일.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 중엔 한 숙소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팔일의 시간 동안 나름의 변화가 있었다.
터키어밖에 할 줄 모르는 밥 차려주시고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와 눈인사 정도는 나눌 정도로 익숙해졌고, 리셉션의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웃으며 ‘안녕’하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호스텔의 죽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반엔 아침일찍 일어나 씻고 부엌으로 올라가 와이파이를 하며 아침 차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슬슬 일어나 세수도 않고 올라가면 이미 밥을 먹고 있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안녕’하며 인사해줬다. 밥을 먹고 나서 천천히 씻고 어슬렁 어슬렁 동네 구경을 다닌 것도 며칠 지나자 나서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 결국엔 청소하러 아주머니가 방에 들어올 때 쯤에야 나가게 됐다.
천천히 몸이 다시 게으름의 시계로 맞춰지며, '귀찮아'하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일 역시 많아졌다. 나름 여행할 땐 부지런 떨면서 다닌다고 생각했었는데 참 사람은 빨리도 변하고, 빨리도 적응하고, 내 바닥은 너무 쉽게 내보인다.
이날도 그렇게 늦게 어슬렁거리며 가방을 들고 길을 나섰다.
이스탄불은 이 날이 마지막이었다. 비행기표를 연장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지는 아직도 조금쯤 고민하고 있었다. 어쨌든 마지막의 이스탄불이니 그동안 못간 곳도 가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자며 전날 밤까지만 해도 의욕에 가득차 있었지만 아침이 되니 만사가 귀찮았다.
귀찮은 육신을 부려 겨우 갈라타다리를 건너고 나니 더 귀찮아 왔다. 사람들을 헤치고 걷는 것도 귀찮아 바닷가쪽 길로 들어서 벤치에 앉아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앉아있는데 설상가상 어디서 나오는 신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와이파이 신호가 잡혔다.
아마도 난 이곳에서 일어나지 못할거야라며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
그 때 메시지가 왔다.
전날 호스텔에서 만났던 친구가 지금 일어나 나오려고 한단다. 이날 같이 놀기로 약속했는데 조식 먹을 때 없어 이미 나간 줄 알고 나 혼자 나온 참이었다.
이 친구가 오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으로 가열차게 관광을 해보자 마음먹었지만, 그녀가 도착해 벤치에 앉자마자 알려줬다.
여기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와이파이 잡혀요.
그렇게 또다시 햇볕을 받으며 한참을 앉아있던 둘은,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걸어 돌마바흐체 궁전에 가보자며 일어났다.
그렇지만 정말, 정말정말정말 귀찮았다. 시킨 사람도 없는데 억지로 의욕없이 걷던 둘의 눈엔 로쿰집이 보였다. 사람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이 많은 곳은 맛집!이라는 믿음을 가진 둘은 돈두르마를 사들고 또 신나 앉았다.
터키에서 처음으로 먹은 돈두르마는 아저씨들이 칼에 아이스크림을 붙이고 거꾸로 뒤집는 쇼맨십 같은 건 없었다. 구시가지만 가도 아저씨들이 쇼맨십을 보이는데 이곳은 그런 것도 없다니 진짜 맛집이로군이라며 신난 둘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맛있었지만, 원래 미각이 발달하지 못한 데다 원래 단 건 다 맛있지 않나?라며 별 생각 없었는데 아주 나중에 포털사이트에서 익숙한 간판을 봤다. 이날 갔던 곳은 백년도 넘은 로쿰 가게란다. 모든 메뉴를 전부 손으로 만든다고)
돈두르마를 먹고 혈당치를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관광의욕은 바닥을 치던 둘은 목표를 딴 것으로 잡았다.
시작은 내가 파묵칼레에서 만났던 한국인에게 들었던 고등어케밥 맛집. 지난번에 한 번 찾아보려다 귀찮아서 그냥 눈 앞에 보이는 데서 사먹고 말아버렸던 그 집이었다. 의기투합하여 다시 와이파이 스팟으로 돌아와 검색을 시작했다.
한국인에게 꽤 유명한 아저씨인지 이곳저곳에 정보도 많고 가는 길도 상세히 나와있었다. 그렇게 찾아갔더니 수많은 고등어케밥카트 사이에서 아저씨가 말했다.
본인이 ‘에밀’이라며.
이 아저씨, 자기가 한국인에게 유명한거 알고 있었다.
그동안 먹은 고등어케밥은 빵안에 고등어를 구워넣고 양파정도 넣어준 것이 전부였다면 여기는 다른 토마토, 양파 등등 다른 채소들도 함께 구워 속재료를 풍성하게 넣었다. 그렇게 먹은 고등어케밥은 갈라타다리 근처에서 배 위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긴 했다.
비슷한 가격인데 고등어 외 들어가는 재료가 다채로웠다.
고등어케밥에 만족한 둘은 오늘의 테마를 터키의 먹을 것으로 정한 뒤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와 쿰피르를 먹고,
아이란을 마시고,
근처 블루모스크에 들렀다.
그러나 블루모스크 안의 수많은 관람객처럼 이곳저곳을 돌며 구경은 않고, 한참을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스탄불의 중심위치는 블루모스크였다. 매번 블루모스크를 기준으로 갈 곳을 탐색하고 길을 잃으면 블루모스크로 찾아 돌아오는 것을 버릇처럼 했더니, 이미 이때쯤엔 세네번쯤 안에 들어가 구경도 한 참이었다.
그때였다.
하루에 몇 번 있는 기도시간이 되어 관광객들의 출입을 금하고, 안에 있는 관광객들도 나가라고 안내하는 시간이 됐다. 기둥 뒤에 앉아 수다삼매경에 빠진 둘은 안내하는 말도 못 듣고 둘의 세계에 빠져있는데 뭔가 느껴지는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리고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는 저 안쪽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다.
아, 여기 기도하는 시간이다. 나가야 하는데.
라며 일어서는데 경비 아저씨가 우리를 말렸다. 이미 시작했으니 끝날 때까지 일어서지 말고 그대로 있으란다. 아마도 기둥 뒤에서 전혀 관광의 목적이 아닌 수다를 떨고 있는 바람에 사람을 내보내는 경비원의 눈에 보이지 않았나보다. 덕분에 끝까지 앉아 기도하는 흔치않은 광경도 봤다.
그리고 근처에서 저녁까지 챙겨먹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부른 배로 앉아 마지막날을 돌이켜보니 홍합밥을 못 먹어본게 기억났다.
그건 다음에 다시 터키에 가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