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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l 14. 2024

여름 숲으로

앙(仰) 이목구심서Ⅱ-47

여름 숲으로



집을 나서 컵라면이 데워질 시간이면 숲의 나라에 들어섭니다.

이 나라 국경을 넘어설 땐 따로 비자나 신분증이 필요 없습니다.

누구라도 들고 나는 게 자유롭지요.


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주위가 요란합니다.

이곳은 숲나라 주민들의 삶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더구나 여름은 너무나 분주합니다.

숲은 몸집을 키우고 열매를 빚느라 충만한 열정으로 빽빽합니다.

숲의 살림살이도 쑥쑥 자라 양식은 창고마다 가득합니다.

수억 개의 크고 작은 발전소에선 나라를 운영해갈 에너지를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이 에너지는 나라 밖 인간에게도 한 순간도 없어선 안될 필수품입니다.


그렇다고 숲의 나라가 번잡하거나 무질서한 곳이 아닙니다.

고요를 사랑하고 자연의 질서를 지키기에 이 나라의 국토는 언제나 정갈하고 평화롭습니다.

자유로우면서도 질서 정연합니다.

사람처럼 세간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만의 고유함으로 품위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숲의 풀벌레와 까치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화음입니다.

마치 오래 연습한 단원들의 합창 같아서 편안합니다.

소리는 단편적이지만 거슬리지 않고 흐르듯 스며듭니다.

이 흐름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 가며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입니다.

숲에 들어가면 나무들 모두가 뭉뚱그려져 전체가 하나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대하게 다가오는 전체보다는 각자 다른 부분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무수히 많은 나무들 중에 똑같은 나무는 없습니다.

똑같은 바위도 없습니다.

사람의 지문처럼 구별되는 색깔과 표정을 가지고 있지요.

이처럼 숲은 각기 다른 하나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 한 공동체입니다.


갑작스럽게 10여 미터 앞에서 오소리 한 마리가 길을 가로질러 갑니다.

처음 보는 실물이라 너무나 놀라면서도 기뻤습니다.

오소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다가 얼음이 되어 멈춰 선 나를 무시하고 그대로 가버립니다.

한참을 서서 그가 빠져들어간 덤불을 바라봅니다.

오육십 센티미터 크기의 늘씬한 몸에 역삼각형의 얼굴에는 검은 마스크를 두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의 카메라를 켜고 조심조심 다가갑니다.

하지만 오소리의 그림자가 떨어진 자리엔 검푸른 정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오소리의 모습이 뇌리에 남습니다.

동물원이 아닌 야생의 나라에서 최초로 본 시민입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아기 주먹만 한 참새가 찔레나무 덤불 속에서 짹짹거립니다.

아마도 낯선 이방인의 등장을 다른 이웃에게 알려주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계속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는 동굴 모양의 을 봅니다.

집주인이 누구인지 대문도 없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얼굴을 들이밀며 집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전등도 켜 놓지 않아 실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허술한 집의 주인은 어떤 이일까 상상해 봅니다.

시건장치도 없이 개방적인 게, 분명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성격일 거라 생각됩니다.

다음에 또다시 방문해 볼 작정입니다.

그때는 정식으로 문을 두드리고 초대를 해주면 대접하는 차 한 잔 정도는 하고 싶어 집니다.


숲으로 오분 여를 더 들어갑니다.

녹음 사이로 나무 그림자들이 들어차 어둑어둑합니다.

여름 숲엔 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알아차린 숲은 진초록 잔디 운동장에 떨어뜨린 붉은 공 하나처럼 어떤 존재가 눈에 들어와 멈춥니다.

분홍 꽃잎이 선명합니다.

하늘 말나리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꽃 하나 없는 이곳에 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꽃입니다.

꽃봉오리 두 개가 나란히 피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네요.

나는 머리보다, 심장보다 빨리 놀라며  "와~" 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곳에 온 보람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숲은 나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휘파람을 불며 아무 노래나 흥얼거려 봅니다.

마음은 기쁨의 충만함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숲에서는 특유의 소리가 납니다.

숲의 완벽한 정적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숲만이 가지는 어떤 소리는 전체가 하나로 모여든 공명입니다.

숲이 만들어낸 자연적인 울림을 봅니다.

산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 소리와 바람이 지나는 소리, 나무의 호흡 사이에서 숲 전체가 내는 진동을 느껴봅니다.

이는 태초에 세상에 파견한 신의 목소리입니다.

그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떠돌다가 숲 속 깊숙이 들어와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숲의 소리는 가장 울림이 큽니다.

숲은 모든 소리의 시작이 되는 근원지입니다.

그 음에 집중하노라면 가슴이 울리고 영혼이 흔들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숲과 내가 한 몸이라도 된 듯 호흡하고 진동합니다.



때때로 꾀꼬리 소리가 헤엄치며 참나무잎 사이를 스쳐갑니다.

그 소리는 녹색의  두루마기를 걸쳤기에 지나는 나무  이파리마다 녹색의 물이 묻어납니다.

숲에 한 번 발을 들이니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 집니다.

오후의 박무에도 발걸음은 앞으로만 향합니다.

숲은 감춰두었던 속마음을 서서히 풀어내고 있지요.

때때로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건네는 말에 집중합니다.

크고 작은 언덕들과 그 위의 생물들, 습하거나 움푹 파인 땅, 깊거나 옅은 그늘과 냄새들, 차갑거나 더운 바람에 주목합니다.

주인이 가장 아끼는 정원에 몰래 들어온 아이처럼 설렘과 두려움으로 작은 동작 하나까지도 신경 쓰며 살핍니다.

눈에 담고 마음에 심어보려 애씁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숲의 나라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노각나무에게 눈인사를 합니다.

다시 하늘말나리와도 작별인사를 보냅니다.

그를 보고 난 후 기분이 좋습니다.

미소가 문패처럼 입가에 걸립니다.

아직도 대문이 열려있는 동굴 집 앞을 지나며 한마디 해줍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이제 문 닫아야지요"

존재자체 만으로도 즐거워 발밑에서 웃고 있는 의아리에게도 인사를 던집니다.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사실 이미 자연에 존재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세상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심미안을 가진 몇몇이 우연히 발견하고 주운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이야기, 음악들은 대부분 숲의 나라에서 온 것이라서 우리의 삶을 정화하고 치유해 줍니다.


걸음이 좀 빨라집니다.

등 뒤에서 어둠이 실눈을 뜨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풀벌레도 뻐꾸기도 울지 않습니다.

주위 나무들도 팔을 내리고 몸을 움츠립니다.

비비추가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지만 인사만 후딱 건네고 헤어집니다.

비비추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나지 않네요.

꽃은 눈에 선한데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러다 한 단어가 번뜩 떠오릅니다.

'옥, 잠, 화'

소박한 흰 꽃이 맑고 깨끗하게 다가옵니다.

여기선 보기 힘든 꽃입니다.


어느새 숲의 나라를 벗어났습니다.

이제 곧 마을입니다.

강가엔 몇몇의 참나리가 진록의 갈대사이에서 붉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유난히 잦은 바람에 강의 몸부림도 심해집니다.

서둘러 집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숲은 저만큼 물러 앉아서 이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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