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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r 23. 2024

프라다를 입은 악마는
정말 악마였을까?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는 명문대를 졸업 후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취업의 벽은 높기만 했고, 어쩔 수 없이 관심에도 없던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 입사하게 됩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가 되었지만, 24시간 내내 울리는 휴대폰과 온갖 잡일들을 던져대는 미란다를 견디는 건 지옥과도 다름없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앤드리아는 패션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똑같아 보이는 두 가지의 '블루' 컬러를 두고 미란다와 직원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그저 우습기만 했죠. 그런 앤드리아에게 미란다는 말합니다.


넌 자기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지. 너가 입고 있는 블루 스웨터는 정확히 '세룰리안블루'야. 2002년엔 오스카 데라렌타와 이브 생로랑 모두 세룰리안 컬렉션을 했지. 세룰리안블루는 엄청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에서 명품으로 사랑받다가 네가 애용하는 할인매장에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만 달러의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했어. 그렇게 고심해 선택한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 자신은 패션계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다니 그야말로 웃기지 않니?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미란다 대사 중에서


부끄럽지만 저 역시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앤드리아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어요. 소프트웨어 교육 업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내가 '소프트웨어 교육'을 홍보하는 사람은 맞지만, 소프트웨어 교육 자체가 나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거든요. 내가 소프트웨어를 배우는 학생도 아니고, 가르치는 교사도 아니고, 학생의 부모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업계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나 역시 소프트웨어를 배우지 않으면 이 시장에서 도태될 거라는 사실을요. 또한 내가 하는 일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알리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말이죠.



퇴근 후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하던 중, 미란다에게 전화가 오는데 친구들이 앤드리아의 휴대폰을 빼앗아 짓궂은 장난을 합니다. 친구들은 퇴근 후까지 보스의 전화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앤드리아는 그런 친구들에게 크게 화가 나 "너희들은 친구도 아니야!"라고 소리치고는 다시 일을 하러 갑니다. 영화에서는 이 모습이 마치 앤드리아가 명품과 일중독에 빠진 나머지 친구들에게 실수를 한 것처럼 그려졌지만 저는 오히려 앤드리아가 패션, 그리고 일과 제대로 사랑이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앤드리아는 런웨이에서 퇴사하고 본인이 원했던 잡지사의 저널리스트로 이직합니다. 앤드리아의 글 실력도 실력이지만, 업계에서 악명 높은 미란다가 '적극 추천'한 추천사가 합격에 큰 영향을 끼쳤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려면 먼저 그 사람을 겪어보아야 하듯, 어떠한 일과 사랑에 빠질지 아닐지는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겪어보았지만 결국 나와 맞지 않았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습니다. 당장은 실패처럼 보이겠지만 언젠가 뒤돌아 봤을 때 그것이 내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 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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