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얼마 전 우연히 오락실에 갔다가 어렸을 적에 즐겨하던 EZ2DJ라는 리듬게임기를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첫사랑이었던 남자아이가 이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한눈에 반해 저도 따라하게 되었는데요. 그날을 시작으로 매일 오락실에 살다시피하며 주구장창 연습을 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운 덕분(?)일까요. 오락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게임을 멈추고 제가 게임하는 것을 구경을 할 정도로 실력은 빠르게 일취월장했습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했다지만 벌써 20여년 전의 일. 게임을 시작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렸을 나이가 된 지금, 저는 추억이나 꺼내볼까 싶어 게임기에 1000원짜리 지폐를 넣었습니다. 어차피 금방 게임이 끝나버릴 거라고 생각해 가장 어려운 난이도에 도전해보기로 했죠. 가장 어려운 난이도라함은, 이 게임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비트가 내리꽂히는데요. 긴장 속에서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저는 제 자신에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몸이 20여 년 전의 비트를 기억하고 저절로 움직이고 있더라고요.
참 신기합니다. 저는 학창시절 내내 주구장창 외웠던 '근의 공식'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근의 공식은 수학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쳤던 수학 공식입니다. 어쩌면 오락실 게임을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근의 공식을 이용해 수학 문제를 풀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저는 오락실 게임은 기억하면서 근의 공식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그것이 누가 시켜서 했느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재미를 느끼는지 파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 이연,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중에서
사회초년생 시절, 한 면접 자리에서 '무언가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곧바로 이 리듬게임이 생각났습니다. 차마 '게임 중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적당한 대답으로 무마했지만, EZ2DJ는 제 인생에서 진짜 무언가에 빠져보았던 경험 중 다섯손가락에 안에 꼽는 일입니다. 리듬게임과 비슷한 피아노는 1시간의 연습 시간을 채우는 게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는데, EZ2DJ 게임을 할 때는 5시간을 하고도 집에 돌아가는 길이 아쉬웠으니까요. 정말로 그 일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무언가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해 매진할 정도로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죠. 만약 제 첫사랑이 EZ2DJ가 아니라 수학 공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제가 기억하는 것도 달라졌으려나요? 오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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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