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의 마지막 도시이자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리우로 가다
푸에르토 이과수에서의 마지막 날.
이제 좀 떠돌이의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벌써 마지막 나라인 브라질로 떠날 날이 왔다.
푸에르토 이과수는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파라과이와도 국경이 맞닿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에서 이과수 폭포를 구경한 사람은 브라질로 넘어가서 브라질 쪽에서 이과수를 구경하고 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양쪽 국가에서 모두 이과수 폭포의 매력을 즐겼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일정이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많은 사람들이 아르헨티나 쪽에서 보는 이과수 폭포가 더 웅장하다고들 했기 때문에, 전날 폭포를 실컷 즐긴 것만으로도 크게 아쉬워할 것은 없었다는 점.
워낙 국경이 인접해서 택시를 타고 브라질로 넘어가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선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포즈 두 이과수(브라질 쪽 이과수 마을), 그리고 포즈 두 이과수 버스 터미널에서 브라질 이과수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푸에르토 이과수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출입국 사무소에 내렸다. 아마도 버스 회사 이름이 Uruguay였나 싶지. 여기서는 출입국 사무소 정류장에 내려야만 하는 승객들을 위해서, 입출국 절차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탈 때 버스 티켓을 소지하고 있으면 다시 버스비를 낼 필요 없이 태워준다. 단, 같은 버스 회사에 한한 이야기이므로 출입국 신고 절차를 마친 관광객들은 다들 티켓을 손에 들고 그 다음 Uruguay 버스는 언제 오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희한하게 내가 탄 버스는 거의 다 현지인인 듯 했다. 단 한명의 갈색 머리 서양인 언니만 빼고. 그 서양인 언니가 먼저 출입국 신고를 마치고 나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언니가 불쑥 내게 다가와 내게 묻는다.
"네가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줄까?"
이런게 커다란 배낭을 메고 현지와 다른 이국적인 용모를 갖고 있는, 나홀로 여자 여행족끼리의 '의리' 아닐까. 생전 처음 보는 초면이지만, 완벽하게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그 순간 연결고리를 찾는 것.
"아, 그러면 너무 고맙지!"
그렇게 그 언니와 나는 출입국 사무소를 함께 빠져나와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언니의 이름을 까먹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은 만 27세에 프랑스에서 왔다는 것. 나는 남미 대륙만 돌고 있는 것에 비해서 이 언니는 세계일주 중이란다. 아시아도 이미 다녀왔다길래 '한국도 다녀왔냐'고 물었다. 한국은 가지 않았다는 대답에 내가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였는지, 그 언니가 말했다.
"모든 것은 다 시기가 있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국가들을 가 보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나는 단지 지금 갈 수 있는 곳들을 가고 있는 거야. 또 그 다음 번 기회에는, 이번 시기엔 가 보지 못한 나라들을 갈 수 있겠지. 그러면 아마 그 때 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맞는 말이다. 그래도, 만약 한국이 프랑스 언니의 여행 위시리스트 1위에 있을 만큼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매력적인 나라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국이 여행지로서 상당히 과소평가 됐다고 생각한다. 서울 말고도 갈 곳이 얼마나 많으며, 작은 반도 안에 다채로운 매력이 야무지게 꼭꼭 들어찬 나라인데 말이야.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편에서 키 큰 독일 언니가 다가와서 우리의 수다에 합류한다. 여행이 길어지니 고향 독일에 대해 그리운 게 점점 늘어난다고, 독일 언니는 말했다. 푹신한 자기 침대나 누텔라 같은 게 그립다고. 그러자 이번에도 프랑스 언니는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말투로 말한다.
"This kind of journey... is not for everyone."
Not for everyone. 보통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남미 여행이나 세계일주 등 장기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돈이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긴 기간 해외에 체류할 수 있는 여행 자금이 필요하고, 또 그 만큼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프랑스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중요한 조건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바로 '체질', 혹은 성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기 배낭여행에 적합한 체질.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온갖 불편한 점들을 감당할 수 있거나 심지어는 즐길 수 있는 체질. 매일 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도미토리 룸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제 때 씻지 못하거나 옷을 빨아 입지 못할 수도 있고, 20시간 넘게 장거리 버스를 타는 일이 허다하고, 처음 보는 정체불명의 현지 음식에도 주저 없이 손을 대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배낭 세계일주는 아무리 돈과 시간이 생겨도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수도 있다.
나는 절대 사교성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내가 배낭여행자의 '체질'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나의 자질은 호기심인 것 같다. 몸을 사리는 일 없이 처음 보는 사물에 손을 뻗고, 그 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은 무조건 해 보겠다고 마음먹는 성향.
아무튼 포즈 두 이과수(Foz do Iguacu)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공항에 가는 버스를 타야 하고, 프랑스 언니는 다른 곳으로 간단다. "All the best!" 앞으로 남은 여행길에서도 서로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며 우리는 포옹을 하며 헤어졌다.
포즈 두 이과수 터미널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서 있는데, 버스 안쪽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내 또래의 동양인 남녀가 보였다. 어, 혹시 한국인인가? 혹시 몰라서 쭈볏쭈볏 가까이 가서 뻘쭘하게 서 있는데, 내 소지품에 적힌 한글을 보고 그 쪽에서 먼저 반갑게 말을 건네주며, 내 무거운 배낭을 자신들의 발치에 내려놓으라고 친절히 말해준다.
이 두 사람은 여행지에서 만난 동행 사이로, 둘 다 제각기 세계여행중이었다고 한다. 여자분은 이미 세계일주를 시작한지 꽤 됐으며, 남자분은 이 곳 브라질이 세계일주의 첫 시작점이라고. 우리는 버스 안에서 서로의 여행 경험담을 나누며 금세 신나게 낄낄거리게 됐다.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역시 사고 경험담. 그 여자분도, 나도, 둘 다 여행에서 이미 호되게 귀중품을 잃어버려 고생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경험담을 가지고 이제 여행 출발 단계에 있는 남자분을 놀려댔다.
"OO씨에겐 이런 일 없을 것 같죠? 아녜요. 이런 날벼락이 찾아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늘 소지품 조심하세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정말 바라지만,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 이미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네요. 낄낄낄낄.."
이제는 그 남자분도 세계일주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 무사히 잘 다녀오셨을까? 궁금해진다.
Foz Do Iguacu(포즈 두 이과수) 공항. 역시나 아담한 크기다. 여긴 특이하게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짐 검사를 한다.
아담한 만큼 한산한 공항. 브라질의 항공사인 GOL 항공사를 타고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는 일정이다. 마침 이 날은 2016 리우올림픽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라 혹여나 비행기표가 없진 않을까, 엄청 비싼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가격은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남미의 비행기표 가격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타고 갈 GOL 비행기. 오렌지색 디자인이 예쁘다. 역시 국내선인 만큼 비행기도 아담하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콜롬비아의 국적기인 Avianca를 브라질에서 만나다니. 쿠바 아바나에서 콜롬비아로 넘어가던 날, 바랑키야-보고타 구간에서 탑승했던 아비앙카 항공이다. 몸체에 뭔진 모르지만 귀여운 캐릭터 그림이 랩핑돼 있길래 찍어 봤다.
방금 막 아르헨티나에서 넘어왔는데, 지금은 브라질에 있다니. 남미 여행을 하면서 이미 여러 번 국경을 넘었지만 이번엔 유난히 감회가 남다르고 두근거렸다. 아마 이제 마지막 여행지라는, 이 곳에서만 무사히 잘 버티면 한국에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도 그랬지만, 또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이제 여기선 스페인어가 통하지 않는다. 떠나기 전 한국에서 6개월 간 빡세게 공부한 스페인어가, 그래서 유창하지는 않지만 지금껏 8개 국가에서 매우 유용하게 써 먹었던 스페인어가, 내가 현지인의 말귀를 알아듣고 표지판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스페인어가, 드디어 여기선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이 왔다.
말이 완전히 안 통하는 곳. 나는 잘 다닐 수 있을까? 사실 포르투갈어로 "안녕", "감사합니다" 를 어떻게 말하는지 같은 기본적인 인사도 숙지하지 않은 상태인데.
리우데자이네루에 도착하니 저녁시간이 됐다. 다시 대도시로 오니까 또 불안한 듯 심장이 막 뛰었다. 올림픽 때문에 공항에는 자원봉사자도 많았다.
얼마 전 있었던 한국의 평창 동계올림픽을 생각해 보라. 두 번 다시 없을 성수기를 두고 숙박업소가 숙박료를 대폭 인상했었다. 리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미리 찾는다고 숙소를 찾아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도미토리는 진작에 방이 없었고, 주요 관광지에서 가까운 숙소도 전부 매진이었다. 어쩌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새에 다행히 카우치서핑 앱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먼저 제안이 왔다.
라이스(Lais)라는, 젊고 영어가 유창한 여성이었는데, 카우치서핑 호스트로서 내게 먼저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고 연락을 준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 집 위치가 이파네마 해변과 코파카바나 해변과 무지하게 가깝다. 하늘이 주신 은혜다.
공항에서 짐을 찾아 라이스네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두운 밤이고 초행길인 만큼 택시가 최선일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택시비를 지불할 수 있을 만큼의 헤알(Real-브라질의 화폐 단위)이 없었다는 것.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좀 넉넉하게 환전을 해둘 걸.
내가 내린 곳은 일단 국내선 터미널이라서(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은 국내선과 국제선이 각기 다른 건물에 있다),터미널 내부에 환전소가 없었다. 열심히 달려서 옆 건물 국제선 터미널로 갔더니, 글쎄, 아직 저녁 7시인데도 환전소가 문을 닫은 게 아닌가. 환전소에는 황당한 종이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올림픽 개막식이라서 환전소를 7시에 닫습니다." 아니, 올림픽이 열리는 건 정말 축하하고 기쁜 일이지만 여길 찾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어쩌라는 건지. 이 사태를 공항 직원 아저씨에게 얘기하니, 아저씨는 "공항 바로 옆에 대형 쇼핑몰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 곳 몇 층에 가면 환전소가 있으니 거길 가 보라."고 말하신다. 다행히 쇼핑몰까지 건너가서 환전에 성공했지만, 아르헨티나 페소-브라질 헤알 환율이 영 안 좋다. 내 소중한 돈이 똥값 취급을 받으니 너무나 속상했지만 별 도리가 있나.
아무튼 그렇게 어렵게 택시를 잡아타고, 드디어 라이스의 집에 도착했다. 해변이 바로 코 앞에 보이는, 근사하고 안전한 아파트였다.
사실 라이스의 집에 갔을 때 솔직히 말하면 정말 깜짝 놀랐다. 나와 만나기 전, 미리 연락을 주고 받던 라이스는 "나는 와이프가 있다"고 페이스북 메시지로 말했었다. 어, 프로필 사진은 분명 여자인 것 같은데, 와이프가 있다고? 아하, 그러면 이 프사는 본인이 아니라 와이프겠거니, 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라이스는 동성 부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들 히꼬(Rico)가 있다. 11살의, 너무나 귀엽고 젠틀하고 수줍은 아이이다. 라이스가 아닌, 라이스의 아내가 낳은 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가족은 아주 사랑스러운 개, Roy(포투갈어 발음으로는 '호이')를 키운다. 호이는 365일 애정결핍인 퍼그로, 처음 보는 내게도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고 사랑을 달라고 아주 난리법석이다. 쓰다듬어 주다가 잠시만 손길을 멈추면 내게 펄쩍 뛰어올라 핥으면서 다시 쓰다듬어 달라고 난리를 피운다.
내가 온다고 해서, 라이스와 가족들이 아주 사랑스러운 저녁밥을 준비했다. 단호박 크림 새우 요리.
라이스는 미리 나를 만나기 전부터 거의 분명히 자신들이 '동성 부부'임을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아직 동성 부부를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내 편견 때문에 이들과의 첫 만남이 내게는 살짝 당황스러웠나 보다.
이들의 자세한 가족사를 묻지는 않았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가족이었다. 동성 부부는 '성공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몇몇 세간의 편견이, 나는 그들이 키우는 아들 히꼬를 보면서 완전히 틀리다는 걸 알게 됐다. 소위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해서, 그 가정의 아이들이 전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나는가? 그렇지 않다.
반면 히꼬는 아주 가정교육을 잘 받은, 섬세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나는 리우에서 머무는 며칠간 히꼬의 방에서 묵었는데(대신 히꼬는 매일 밤 엄마와 잠이 들었다), 히꼬의 방에는 온갖 곤충이나 과학에 대한 포스터나 장난감이 가득했다. 자신의 관심사에 열렬히 빠져들 줄 알고, 처음 본 외국인 관광객에게 친절하며, 흔히들 보는 그 또래의 남자아이 답지 않게 수줍음이 많으며 상대의 감정을 이리저리 살피는 아이.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는 데에는 그 부모가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이냐, 아니면 둘 다 여자냐 둘 다 남자냐는 중요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느냐일 뿐.
거실 TV에서는 한창 리우올림픽 개막식에서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직접 보러 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묻자, 그들은 별 감흥이 없단다. 아마 다시는 없을 자국에서의 올림픽, 그것도 자기 도시에서의 올림픽인데 저토록 무덤덤하다니.
나라면 꼭 보러 가고 싶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현재 2018년. 나도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막식에도, 또 어느 경기에도 가지 않았다. 일단 입장권이 너무 비싸더라고.
드디어 대한민국의 입장이다! 브라질 리우에서, 리우 올림픽에 입장하는 내 고향 한국의 선수를 TV로 보고 있자니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다.
리우 올림픽의 개막식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들어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TV로 보는 리우 올림픽 개막식은 내가 보기엔 굉장히 아름다웠다. <이파네마의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부르는 안토니오 조빔의 손자도, 거기에 맞춰 마지막 캣워크를 하는 지젤 번천도, 거기에 이어서 <Samba do Aviao>가 흘러나오며 리우의 야경을 날아오르는 비행기도, 그리고 슬럼가를 형상화한 세트 위에서 신명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도. '브라질'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그런 멋진 개막식이었다.
올림픽의 흥분에 빠진 도시. 내일부터 관광하게 될 리우는 어떤 모습이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