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동원 Oct 24. 2021

도망가자

열 번째 다시씀, 선우정아 '도망가자'


  

  “너희 이모는 20대가 없었어.”


  구정의 새벽은 생각보다 고요하고 가라앉아있다. 나의 외갓집은 남쪽 바다와 가까운 작은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엄마와 이모는 여섯의 형제들 중 유일한 자매였다. 모두가 기분 좋은 취기에 올라 잠든 이른 새벽, 마당에 피운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엄마와 나, 그리고 이모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조용히 찾아오는 바닷바람에 이런 좋은 분위기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오래도록 그곳에 앉아있었다. 이모는 얼마 전에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이제 겨우 50줄에 들어선 이모의 무릎은 내 또래였을 때부터 혹사당해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할 만큼 수명이 다했다고 했다. 이모는 멋쩍게 웃으며 이제 더 아플 데도 없는 무릎이라며 농담을 건네려 했지만 이모의 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혼자서 속을 앓았던 엄마는 못내 속상한 티를 내며 이모의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아홉의 나이에 엄마가  이모의 20대는 외로움이 활짝 펴서 자주 시들어있었다. 이모만큼이나 어렸던 남편은 아이가 생긴 줄도 모르고 입대를 했고 남아버린 이모는  떠밀리듯 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그녀의 시집살이는 할아버지께는 아직도 비밀일만큼 힘들고 아팠다. 갖은 고생을 모아 하던 스물의 , 첫째를 낳고 온전치 못한 몸으로 시댁의 집안일을 해야 했던 이모는 출산  퉁퉁 불어있던 손으로 시부모의 속옷을  물에 빨며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빛바랜 원망은 대상도 없어서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칼날을 돌렸고 이모의 20대는 그렇게 마음 기댈  없이 한참 동안 익사하는 삶이었다. 그녀를 질식에서 올려준 것이 무엇인지 애써 꺼내 묻고 싶지 않을 만큼 이모의 20대는 눈물로 얼룩이 져있었고 종종 고향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같았다. 이모는 그때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몸이 화근이 되어서 결국 50 나이에 이른 은퇴를 해야만 했고 화양연화 같이 살아도 모자랐던 이모의 20대는 삶의 어디에서도 찾을  없다는 사실  자매는 뒷맛이  쓰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 언니가 내보고 도망가자 했던 게 참 고마웠다."

  "..."

  "그때 조금 눈물 나더라. 내는 20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있었구나.."


  이모는 도망가자는 말이 참 야속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속으로는 수도 없이 도망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모에게는 또 다른 죄스러움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이유 없는 눈물을 한참이나 흘렸다고 한다. 이모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에 가려진 자신의 시간을 꺼내 준 도망가자는 네 음절이 그렇게 눈물겨웠다. 물론 그녀는 악착같은 몇 년을 버텼고 도망가지 않았다. 이모는 자신의 도망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도망쳐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뿐이라고 했다. 엄마의 네 음절이 이모의 시집살이를 180도 바꿔놓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그 후로도 이모는 여전히 외로웠고, 종종 아팠으며, 가끔은 목놓아 울기도 했지만 이모를 옭아맸던 죄스러움은 파편처럼 조각나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희석되어 없어졌다. 도망쳐도 괜찮다는 확신은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이모의 꽃에 외로움을 덧대지 않게 막아주었고 20대의 이모는 그 사실만으로 버틸 힘을 얻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 옛날이야기일 뿐인 이 이야기를 이제야 마음 편히 꺼내는 이모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느새 모닥불은 장작은 다 타고 불의 잔향만 남았다.

  스물의 삶을 태운 세월의 잔향도 오래 남아 이모를 감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전 09화 서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