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01
여행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더운 어느 날. 가장 친했던 친구 두 명과 친구의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작은 차에 네 명이 앉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쿨의 '점포 맘보' 노래를 들으며 꽉 막힌 고속도로에 갇혀 있었다. 9시간 정도 걸려 해 질 무렵 동해 바다에 겨우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던 우린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잠이 들었다. 덥고 습한 날씨는 덤이었다.
다음날 아침 해변가의 매점에서 몇 배는 비싼 컵라면을 사서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텐트는 태양의 빛을 그대로 흡수해 찜질방이나 다름없었다. 견디다 못한 우린 차의 시동을 켜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불편한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물놀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바닷가에 몸을 담근 지 10분도 안돼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엉덩이에 들러붙는 모래는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떠난 첫 바다 여행은 마음속에 부정적인 감정만 남겨놓은 채 끝이 났다. 여행은 나에게 불편하고 번거로운 힘든 일이었다.
부모님을 따라 이곳 저기 다니는 일은 사춘기였던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성인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남들처럼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공군에 입대했다. 군필자들이 보면 좋은 곳이라고 할만한 꽤 괜찮은 부대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미군 안에 있는 부대에서의 생활은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주말이면 잔디밭에 예쁜 천막을 치고 테이블 앞에 앉아 파티를 즐기는 미국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영화에서나 볼법한 행복한 분위기에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이병 시절 '사이드'라고 불리는 건물 옆 계단에 불려 나가 몇 시간씩 선임들의 훈계를 들어야 했던 것 말고는 당시 흔했던 가혹행위를 다행히도 우리 부대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생 들을만한 욕 때문에 갖춰지는 인내심과 웃는 상의 얼굴이 찌그러져 버린 것은 애교로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던 이등병 시절을 마치고 일병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대는 주로 야간 근무를 했기에 낮 시간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근무 환경 탓에 피곤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에 바빴다. 내무실의 사람들은 ARS 전화로 주식 투자를 하거나 독서, 영화 시청, 운동 등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로 하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취미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던 나는 이런 모습이 꽤나 새로운 충격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하며 보는 것이 이게 전부였고 나는 부대의 사람들을 따라 주식 계좌를 개설하고 운동을 하며 새로운 취미로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즐거운 취미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진입장벽이 가장 낮았던 독서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수필부터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특히 여행 수필을 많이 읽었다.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는 사진 속의 낯선 풍경과 글들은 흥미진진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너무 많았고 그곳으로 여행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막연하지만 여행에 대한 환상과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대하고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누군가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배낭여행'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행이란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비행기도 한 번 타보지 않은 나에게는 꿈 같이 먼 이야기였다. 그러는 사이 시곗바늘을 계속 돌아 무사히 군생활을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다. 복학과 동시에 쏟아지는 많은 과제들과 동아리 활동으로 정신없는 학교 생활 속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친구 B가 '글로벌 챌린저'라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글로벌 챌린저'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전공과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해외 연수를 계획하여 심사와 면접을 거쳐 선발되면 학교에서 연수 경비를 모두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여행에 목말라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 급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면접을 준비했다. 우리의 계획은 운이 좋게도 서류 심사를 통과했고 면접도 무사히 마쳐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뛸 듯이 기뻤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최고로 고조되었다.
글로벌 챌린저 프로젝트의 주제는 '영국의 교육과 장애인 복지'였다. 구성주의 교육을 바탕으로 학생을 교육하는 영국의 대안학교 '서머힐 학교'와 장애인 복지 시설 '캠프힐', 런던 대학교의 교육학과, 런던의 특수학교를 방문해야 했다.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했고 다행히 일정이 맞아 일주일간 런던에 머물며 구성주의 교육과 장애인 복지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글로벌 챌린저’ 프로젝트를 마치고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면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로 17일간 배낭여행을 하기로 했다. 인터뷰 일정 조율과 질문지를 모두 만들고 나서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티켓과 유레일 티켓을 구매하고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한 인천공항은 또 다른 세계였다. 상상할 수 없이 넓은 공간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행과 출장을 위해 모여 있었다. 나에겐 꿈이었던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미 일상이었다. 여행의 초심자였던 나는 어리바리함을 장착하고 공항에 한 걸음 내디뎠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큰 모험이었다. 꿈같은 일이었던 배낭여행이 친구의 제안으로 결국 이뤄지게 되었다. 시도조차 어려웠을 나의 바람이 친구의 제안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프로젝트와 여행을 준비하며 우린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과 함께한 여행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혼자 할 때의 막연함과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내려갔고 기대와 설레는 마음만 가득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었을 나의 첫 배낭여행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여행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 매년 여행을 떠나려 노력한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행 수필과 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연한 계기로 배낭여행을 다녀와 삶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맞이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과 행복을 바란다.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게으름이 날 집어삼키고 있었다. 군대에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게으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노력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우연한 일들이 일어났고 결국은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었다. 친구의 우연한 제안으로 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나서 여유를 갖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온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실력을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노력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