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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나 호수 트레킹 여행

시칠리아 여행기 03 : 코르티나 담페초

by 이지
코르티나 담페초
호텔 몬타나, 조식


코르티나 담페초는 돌로미티 산맥 품에 안긴 작은 마을이다. 겨울이면 눈이 도시를 덮는다.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곳이며, 2026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도시다. 이곳은 스키나 보드뿐 아니라 트레킹 명소로도 유명하다. 여름엔 돌로미티의 길을 따라 걸으며 초록빛 여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겨울엔 눈 덮인 산맥을 따라 걷는 고요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형은 함께 보드를 타자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보드를 즐겨 타지 않았고, 낯선 산맥에서 다쳐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각자의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형은 보드를 타러 나가고, 나는 미주리나 호수로 향했다. 밤새 내린 눈이 도로 위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장엄했고, 공기는 차갑지만 맑았다. 호수에 도착하자 말문이 막혔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햇빛이 흩어지고, 산은 거울처럼 그 빛을 반사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듯한 고요가 있었다.



아침 일찍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섯, 일곱 개의 테이블이 놓인 작은 공간에 조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바게트와 베이컨을 접시에 담고, 오렌지 주스와 우유 한 컵을 곁들였다. 곧 보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내려왔다. 새벽부터 설원을 향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묘한 들뜸이 배어 있었다.


형은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에게 리프트 티켓을 어디서 사는지 물었다.

"리프트 티켓은 매표소에서 구입하면 돼. 차로 5분 정도 거리예요."
"차는 가져왔어요? 잘 타면 저기 30분 거리 코스로 가보세요. 정말 재밌어요."

취미 하나로 연결된 둘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이어갔다.


리프트 앞의 넓은 주차장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 속에 형을 내려주고, 나는 차를 몰아 미주리나 호수로 향했다. 밤새 눈이 내려 길은 미끄러웠지만, 산맥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 끝에서 드디어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는 상상보다 거대했다. 수면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뒤편 산자락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빽빽했다. 눈 쌓인 산과 호수,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한 작은 호텔과 카페들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호수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트레킹을 하러 온 사람들, 산책하듯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사람들, 그리고 그저 멈춰 서서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는 이들. 나는 얼어붙은 수면 위를 조심스레 걸었다. 그 위로 발자국이 이어지고, 하얀 숨결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를 시켰다. 내부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했다. 통창 너머로 호수와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향과 함께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이런 순간을 위해 여행을 하는구나.



카페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미주리나 호수에서 안토르노 호수까지, 약 네 시간짜리 트레킹 코스였다. 구글 지도를 확인하며 발을 옮겼다. 발밑의 눈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고, 세상은 아득할 만큼 조용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미주리나 호수
미주리나 호수


스물아홉, 세 해 동안 일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때였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모든 걸 거는 일은 두려웠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퍼지자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왔다.

'지가 공부하면 좋은 데 갈 수 있대?'

'여기서나 잘하지.'

그 말들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마음은 무겁고, 공부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도서관에 앉아 밤까지 책을 붙들었지만, 책장은 몇 장 넘기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곤 했다.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심장은 조여왔다. 그런 날이면 나는 도서관을 나와 근처 호수공원을 걸었다.


초저녁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듯 호수공원을 걸었다. 걷는 동안 생각이 차분해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걷는다는 건 생각을 쌓고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그날 이후, 불안하거나 공부가 되지 않는 날이면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걷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걱정도 조금은 작아졌다. 걱정과 고민의 대부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걸으며 깨달았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끊임없는 걷기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20km를 걷는 날도 있었다. 걷는다는 건 분명 고된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묻는다.

"그렇게 힘들게 여행을 왜 해? TV로 다 볼 수 있잖아?"

하지만 여행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발로 걷고, 몸으로 느끼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길 위에서 나는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보고, 내 안의 묵은 생각들을 비워냈다. 걷는 동안 걱정과 불안은 눈처럼 녹아내렸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걷는다. 길 위에서 만큼은 내가 나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걸음 끝에서 언제나, 세상은 다시 조용히 제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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