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04 : 팔레르모
영화 '대부' 속의 시칠리아
시칠리아로 출발하는 날까지도, 나는 이 섬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머릿속의 시칠리아는 단 두 가지 이미지뿐이었다. 영화 대부의 배경이자 올리브와 마피아의 섬.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입대했을 때, 나는 교대근무 생활을 하게 됐다. 6일 일하고 2일 쉬는 시스템 덕분에 쉬는 날엔 시간이 남아돌았다. 외출이나 외박이 막힌 날이면, 우리는 늘 같은 일과를 반복했다. 텔레비전, 면회, 축구, 독서, 사이버 지식정보방(PC방)이 대부분의 일과였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통화하기. 그게 하루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연극영화과를 나온 맞선임이 휴가에서 돌아오며 고전 영화 DVD를 한가득 사 왔다. 주말이면 내무실의 작은 TV 앞에 모두 모여 앉아 영화를 봤다. 그중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작품이 바로 대부 시리즈였다. 영화 속 시칠리아는 이상할 만큼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저런 곳이 이탈리아라고?' 내가 알고 있던 베니스나 로마의 세련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원했던 '마이클 콜레오네'는 아버지를 잃고 복수의 길에 오른다. 그는 경찰을 피해 아버지의 고향인 시칠리아로 도망친다. 그곳은 뉴욕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햇빛은 따뜻했고, 마을은 조용했으며, 삶의 속도는 느렸다. 그는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지만, 결국 복수의 불길은 그를 다시 삼켜버린다. 아내를 잃은 마이클은 다시 미국으로 달아오고, 끝내 아버지의 뒤를 걷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머릿속에 시칠리아는 단단히 박혔다. 황량한 흙길, 노란빛 건물들, 들판 가득한 올리브 나무, 흙먼지.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태양은 그 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던 곳.
시칠리아의 첫인상
시칠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섬이었다. 지도 속에서 보면, 이탈리아 반도의 발끝 장화 모양의 가장 아래쪽에 역삼각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본토와의 거리는 불과 3.2km. 이 정도면 다리가 있을 법도 했지만, 화산 활동과 지진 때문에 아직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칠리아로 가는 길은 언제나 배와 비행기였다.
시칠리아는 유럽인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이지만, 산업 기반이 약했다. 그 탓일까. 북부의 도시들과는 공기의 결이 달랐다. 이탈리아의 북부, 코르티나 담페초의 거리는 반짝였다. 건물은 단정했고, 명품 매장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거리에는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흩어졌다. 반면 시칠리아 제1의 도시 팔레르모의 거리는 더러웠다. 곳곳이 파여 있었고, 쓰레기가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어디선가 비릿한 오줌 냄새가 올라왔다. 코르티나의 빛나는 겨울과 달리, 팔레르모의 밤거리는 어둡고 스산했다.
늦은 밤, 비행기는 팔레르모 공항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서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버스에 올라타 입국장으로 향하고, 짐을 찾은 뒤 가장 가까운 기차를 타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기차 승무원이 손짓하며 "빨리 타세요"라고 소리쳤다. 우린 캐리어를 들고뛰었다. 겨우 기차에 오르자마자 문이 닫혔다.
기차는 약 40분을 달려 팔레르모 중앙역에 도착했다. 역은 낡았고, 그 안엔 피곤한 얼굴의 여행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밤이었다. 인적이 드물었다. 10분 정도 걸어 중앙역 근처 숙소로 향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약한 불빛만이 깜빡였고, 오래된 건물의 벽에는 그림자처럼 어둠이 번졌다.
"형, 쿠바 골목이랑 좀 비슷하지 않아요?”
“그러게. 냄새도 그렇고.”
우린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묘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코르티나 담페초의 반짝이는 겨울과는 너무도 다른 밤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빵을 사러 숙소 근처를 걷는데, 어제와는 전혀 다른 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햇빛 아래의 팔레르모는 낡았지만 생기 있었다.
골목 어귀마다 빨래가 펄럭이고, 노인들은 카페 앞 의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시장은 활기찼고, 상인들의 손짓과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밤에는 낯설고 어두웠던 도시가, 낮에는 따뜻하고 살아 있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팔레르모 사람들은 예상보다 친절했다. 거친 도시의 아래엔 부드러운 마음이 있었다. 짧은 대화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작은 도움에도 진심이 묻어났다.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 도시의 첫인상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 며칠 머물다 보면, 그 도시가 숨기고 있던 본래의 얼굴이 드러난다. 팔레르모도 그랬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안했지만, 곧 그 안의 따뜻함과 유연함을 느끼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태양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의 경계가 천천히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