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령 Feb 28. 2017

티셔츠로 말하라

한글 레터링 티셔츠의 부재 속에서

 

 2017년 2월 24일 디올 행사에서 배우 김혜수는 누구보다 돋보이는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녀는 2017년 봄/여름 패션쇼에서 디올이 선보였던 레터링 티셔츠(Lettering T-shirts)를 입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라고 티셔츠 위에 적힌 레터링 문구는 옷을 입은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공론화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요즘이다. 이런 때일수록 연예인은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김혜수는 민감할 수 있는 문제와 관련된 의견을 패션으로 용감하게 보여줬다. 특히 한국에서는 세월호 배지나 위안부 팔찌 같은 액세서리를 활용해서 소신을 보여주는 연예인은 많이 볼 수 있지만 레터링 티셔츠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말하는 경우는 전례가 드물기 때문에 그녀의 옷차림은 신선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 티셔츠를 입은 배우 김혜수 (c) sportschosun.com
2017 ss 패션쇼에서 디올이 선보인 "WE SHOULD ALL BE FEMINISTS" 티셔츠 (c) Dior Instagram

서양의 레터링 티셔츠 문화

 한국과 달리 서양에는 레터링 티셔츠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서양에서는 정치, 사회 운동과 팝 문화와 함께 레터링 티셔츠를 발달시켜왔다. 그들은 사회 이슈에 연관된 개인 의견을 티셔츠에 적극 반영했고, 이 티셔츠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입는 사람의 뜻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널리 입혀진 티셔츠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어 역사로 남았다.


 한 때는 정치,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입혀졌지만 지금은 현대인들의 일상복으로 입히는 티셔츠 레터링으로는 "Make Love, Not War"이 있다. 1955년부터 1975년 동안 벌여졌던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평화를 외치며 반전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폭력과 전쟁에 맞서 격렬한 반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티셔츠 위에 "Make Love, Not War"이라는 문구를 썼다. 이 문구는 평화를 상징하는 원형 로고와 함께 프린트된 티셔츠 형태로 현재까지 많이 사랑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 티셔츠를 파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입는 사람들도 많다. 아직 휴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평화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평화 로고과 "Make Love, Not War"문구가 함께 인쇄된 티셔츠 (c) www.etsy.comf

 팝 문화에서 탄생한 레터링 티셔츠는 넘쳐난다. 롤링 스톤즈의 혓바닥 티셔츠부터 앤디 워홀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까지 다양하다. 그중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락 밴드인 비틀즈 티셔츠도 있다. 요즘 아이돌 팬들이 가수와 연관된 굳즈를 착용하고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비틀즈 팬들도 가수의 사진, 가수 이름을 새긴 티셔츠를 입고 콘서트를 가곤 했다. 그때 만들어진 비틀즈 티셔츠의 특유 문구와 로고 디자인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후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팀명인 'THE BEATLES'는 다양한 서체로 쓰여 티셔츠 위에 인쇄되었는데 유달리 'T'의 세로획이 긴 디자인이 가장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영어 표기의 바닥 기준선인 베이스 라인보다 아래로 표기되는 알파벳은 소문자 'g', 'j', 'p', 'q', 'y'이다. 이런 관습과 다르게  'THE BEATLES'로고는 대문자'T'를 베이스 라인 아래까지 연장시켜 락이 가지고 있는 반항심을 잘 표현했다. 이 서체로 쓰인 비틀즈 티셔츠를 패러디해서 판매되는 티셔츠들이 많은데 아래 그림의 'THE PEANUTS' 레터링 티셔츠도 그 중 하나이다.


 산세리프체로 큼직하게 비틀즈 멤버들의 이름을 쓴 레터링 티셔츠도 지금까지 많이 입혀진다. 이를 변용해서 디자인M 티셔츠 회사는 과거 비틀즈 티셔츠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비틀즈의 멤버 이름이 있던 위치에 고객의 이름 대신 넣은 티셔츠를 판매했다. (조은주, 2013)

롤링 스톤즈의 티셔츠는 레터링보다 혓바닥 로고가 더 유명하다. 하지만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의미는 레터링 티셔츠만큼 분명하다. (c) americanhistory.si.edu
비틀즈 티셔츠를 콘서트에 입고 온 팬들. (c) doclehman.files.wordpress.com/
THE BEATLES 티셔츠를 응용한 THE PEANUTS 티셔츠 (c) teepublic.com/user/titius
비틀즈 멤버들의 이름을 적은 티셔츠. (c) publik.jp

 레터링 티셔츠는 지역을 홍보하는 관광 상품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한국 동대문 의류 시장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I ♥ NY 티셔츠는 원래 뉴욕 관광 상품으로 1977년 뉴욕의 그래픽 디자이너 밀튼 글레이저( Milton Glaser)가 만들었다. 둥글둥글한 막대 과자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글씨체와 뉴욕 도시에 대한 당돌한 고백, 깜찍하게 자리 잡은 빨간색 하트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큰 인기를 얻은 이 티셔츠 레터링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사랑받아 패션쇼에서도 종종 등장했다. 이 문구는 미국을 넘어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I ♥ SEOUL, I ♥ PARIS처럼 변용되어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울을 나타내는 슬로건인 'I Seoul You'도 뉴욕의 ' I ♥ NY'로고만큼 참신하고 명확하게 기획되었다면 패션에서 사용되는 레터링으로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I ♥ NY 티셔츠는 뉴용 홍보용으로 만들어져서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c) creativereview.co.uk/

 의류 회사 마케팅으로 사용된 티셔츠는 이 대목에서 절대 빠질 수 없다. 대부분 브랜드가 제작하는 티셔츠의 레터링은 의류 브랜드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을 가면 Nike, Adidas, Guess, GAP 등 수많은 패션 브랜드의 이름이 옷마다 새겨져 있다. 이런 레터링 티셔츠는 홍보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잘 고안된 글씨체와 문구는 티셔츠에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부여한다. 레터링 티셔츠를 마케팅으로 가장 잘 활용한 브랜드는 Nike이지 않을까. Nike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동적인 V자 로고와 Just Do It이라는 메시지이다. 힘 있게 날아오르는 새를 연상시키는 V와 '할 수 있다'는 로고는 보는 사람에게 도전 정신을 가진 열정맨을 떠올리게 한다. 기업은 이런 연상 작용을 부르는 로고를 티셔츠 위에 인쇄해서 입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다. 지속적인 로고를 고객에게 노출시켜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나이키를 상징하는 로고와 레터링 'Just Do It' (c) amazon.com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의 레터링 티셔츠 문화가 부럽다. 한국에는 역사와 이야기를 담았던 국민 티셔츠가 있었던가.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티셔츠가 그나마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입혀졌다고 생각된다. 1인 1 티셔츠 신화를 만들어낸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수 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티셔츠에 쓰인 문구마저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Be The Reds!"라고 표기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2002년 여름밤, 대한민국은 붉은 악마의 함성으로 뒤덮였었다. (c) hani.co.kr


한글 레터링 티셔츠

 강남역, 홍대, 백화점 등을 구석구석 걸어 다녀도 한글이 적힌 티셔츠를 찾기 어렵다. 인터넷으로 한글 티셔츠를 찾아봐도 말 그대로 '한글'로 쓰여있는 티셔츠는 있어도, 한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린 티셔츠는 거의 없다. 10년이 넘도록 국가에서 공인한 영어 교육을 받은 결과인지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 문제의식 없이 ABC가 수놓아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기 티셔츠에 쓰인 문구의 뜻도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입은 티셔츠 문구의 의미가 입는 사람의 성격, 특징, 말, 행동과 이질적임을 약간의 노력으로 관찰함으로써 파악이 가능하다.


 2007년 국민 예능 무한도전의 한글 패션쇼 특집은 영어 문자 위주로 돌아가는 의복 문화가 가진 문제를 표면으로 들어냈다. 무한 도전 한글 패션쇼를 보고 난 후 사람들은 티셔츠 위에 한글도 쓰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상봉 디자이너의 한글 의상들은 티셔츠 위에 당연히 영어 문구가 있어야 세련된다는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냈다. 붓글씨로 아련하게, 또는 힘 있게 옷 위에 쓰인 한글은 국민 안에 자고있던 민족의 미적 감성을 건드렸다. 네티즌들은 이상봉 디자이너가 고안한 한글 의상을 찬사 하는 댓글을 쏟아냈다. 한글은 패션 소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톡톡히 보여줬다. 그 이후에 국민 영웅 김연아 선수와 같은 유명인들은 이상봉 디자이너의 한글 의상을 입고 자주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로써 한글 패션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상봉 디자이너와 그가 디자인한  한국어 드레스를 입은 김연아 선수(c) elle.co.kr

 2014년 배우 유아인과 디자이너 노앙은 독특한 한글 티셔츠를 선보였다. 종래 한글 디자이너의 선봉에 있었던 이상봉 디자이너의 한글 패션은 예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에 어려웠다. 이상봉 디자이너의 옷은 가격도 비싸거니와 특정 소수 계층을 위한 옷인 것 같은 거리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유아인과 노앙의 티셔츠는 대중들을 타겟으로 만들어져 친숙하고, 세련되며,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 티셔츠는 한글의 음소를 원래 단어에서 분리시킨 후 알파벳의 음소와 병용한 점이 특이하다. 한글이 어떤 원리로 형성되는지 고민한 흔적을 엿보인다. 그 고민 속에서 디자이너들이 가지고 있는 한글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레터링은 알파벳에 비해 한글이 잘 두드러지지 않는다. 'PARIS', 'NEWYORK'를 'PAㄹIS', 'NEㅠYORK'으로 썼는데, 사람들은 한국어를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이 단어들을 'PARIS'와 'NEWYORK'으로 읽는다. 본래 영어로 표기되는 외래어를 사용했고, 한국어 음소를 알파벳보다 적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한글 티셔츠를 입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부담과 어색함을 덜어준다. 비록 한글이 영어에 묻히는 느낌을 줘서 자존심이 조금 상하지만, 한글 티셔츠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는 문화 조성을 위해서는 이런 방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아인과 노앙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든 한글 티셔츠. (c) the-nohant.com

 2014년, 2015년 두 해에 걸쳐서 베이직 하우스는 한글 티셔츠를 제작해서 판매했다. 이 기획에서 만화가와 캘리그래피,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이 직접 티셔츠 위에 인쇄될 한글 레터링을 디자인했다. 종래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이 활동하는 영역을 직물 위로 확장시키려는 좋은 시도였다. 디자이너들은 전문가다운 감각으로 '입는 한글'에 대한 상상력을 펼쳤다. 'ㅁ'이라는 소리가 주는 느낌, '나눔'이 가지는 사랑의 의미,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은 당신의 얼굴에서 피어납니다.'라는 문구에 담긴 따뜻함이 티셔츠 위에서 탄생됐다. 2014년 처음 선보여진 이 티셔츠들은 한 시간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보여주며 기염을 토했다.

2014년 베이직 하우스 한글 패션 디자인 기획전에서 만들어진 티셔츠 (c) http://blog.naver.com/j_pinky/220009992958


한글 레터링 티셔츠 문화 부재

 몇몇 개인 쇼핑몰, 디자이너 브랜드, 대기업들은 한글을 패션화하려는 노력을 시도해왔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 브랜드들의 이름은 영어 표기가 많고, 길거리에서 한글 레터링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다.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선호되는 국제 정세,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의류 기업, 딱히 티셔츠에 표현하고 싶은 문구가 없는 자기 메시지의 부재 등. 이런저런 상황에 갇혀 진퇴양난이 된 한글은 어느 누구의 티셔츠 위에서도 활짝 필 수가 없다.


 한글 레터링 티셔츠 문화가 부재한 모습을 보면 매우 아쉽다. 한글은 영어와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훌륭하게 진화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음소들이 모여 음절을 이루고, 다시 음절이 모여서 형태소를 이루며, 형태소들이 모여 문장과 글을 만든다. 한글은 레고처럼 원하는 대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상상할 수 있는 레터링의 세계를 넓다. 예를 들어서 초성으로 대화하는 한국 문화로 볼 때, 한글 레터링은 음소 하나만으로도 디자인 될 수 있다. 한글은 다른 표음 문자와 같이 병행 표기할 수 있고, 상형 문자처럼 표현될 수도 있다. 한글이 조합되는 방식의 수많은 경우의 수는 한글 레터링이 무궁무진하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올림픽 종목들을 한글을 이용해서 상형 문자처럼 이용한 사례 (c) 베이직 하우스

 

 한글은 영어와 다르게 좌우뿐만이 아니라 상하로도 읽힐 수 있어서 배치 방식에서도 다양성을 가진다. 원래 한글은 창제될 때부터 위에서 아래로 쓰였지 않았던가. 즉, 한글이 배치되는 자유도는 영어보다 높다. 위와 아래, 대각선 방향으로 한글은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는 동력을 가졌다. 노트의 필기, 컴퓨터 디스플레이에 주로 등장하는 한글은 주로 선형으로 배열된다. 하지만 티셔츠의 넓은 면 위에서 글자는 선이 주는 제약을 훨씬 덜 받는다. 따라서 한글은 티셔츠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마음껏 헤엄치듯 여러 위치와 방향으로 배치될 수 있다. 글의 배치가 좌우로 한정된 영어보다, 면 위에서 자유로운 한글이 티셔츠 레터링으로써 더 많은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 왼쪽 열부터 시작해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 (c) study.zum.com

 한글이 종이와 디스플레이가 아닌 천 위에 쓰였을 때의 특징을 더 고민하고 싶다면 홍익대학교 유지원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유지원 교수님의 페이스북은 무료인 것이 이상할 정도로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좋은 견해가 많이 실린 명서이다. 필자가 쓴 한글 레터링에 대한 의견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자세한 식견을 얻을 수 있다. 비록 교수님의 긴 타임라인에서 직물 위의 한글이 가지는 특수한 장점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서 올리는 여러 다른 이야기들은 한글 패션 디자인에 대해서 고민할 때 필요한 좋은 양질의 비료가 될 것이다.


 한글 형태 그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이용한 레터링 티셔츠가 한 철 유행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레터링이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역사로 남기는 힘들다. 맥락은 레터링이 탄생된 시대 사람들의 공감, 열망, 의식 등을 담은 메시지를 말한다. 앞서 소개했던 한글 티셔츠들은 시각적으로 훌륭하지만 추상적인 이미지 속에 메시지를 숨긴다. 글자들은 한 번에 형태를 파악해서 읽기가 힘들다. 불분명함 속에 의미를 숨기게 되는 이유가 뭘까. 바로 메시지가 전달하는 힘, 맥락이 없기 때문에 그 단점을 숨기기 위함이다. 메시지 만으로 입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의미는 형상 속에 가려진다. 한국에서 레터링이 품을 맥락이 빈곤한 이유는 맥락이 만들어질 환경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오직 한국 기자들을 위해서 질문할 기회를 주었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없는 환경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수능과 관계없는 질문은 불필요하다고 자르고, 회사 사람들은 상사의 기분을 살피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하며, 조금의 실수나 남들과 다른 발언이 큰 비난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 속에서는 침묵이 정답일 때가 많다.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분명하고,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은 레터링의 맥락을 탄생시키는 힘인데 한국에서는 그 힘을 자꾸 억압한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에 속에 있어야만 당당하고, 강한 글귀를 만들어낸다.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그런 환경에 있을 때, 사람들은 레터링이 적힌 티셔츠로 자기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진다.


 시대의 맥락에 맞는 문구에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이 더해졌을 때, 그 레터링 티셔츠는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즉, 한글 레터링 티셔츠 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맥락을 만드는 환경 조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호 노란 리본, 위안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담은 팔찌 등을 통해서 역사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인들이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과 옷으로 표현하는 문화가 언젠가는 융성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한글 레터링 티셔츠를 입는 것을 익숙하게 여기는 날이 오면, 역사를 가진 한글 티셔츠가 여기저기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 가슴 위에서 한글이 피어나는 풍경은 블랙리스트를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와 함께 찾아올 것이다.

세월호 뱃지 (c) twitter.com/whitejun12






<참고>

1. 조은주, 2013, 티셔츠 프린트에 담긴 사회 문화적 의미 분석,  힌국디자인트렌드학회, p125-126

2. 앤드루 해슬럼, 2014, 레터링 교과서, 안그라픽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소재가 뭐길래: 겨울 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