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디자이너는 프로젝트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
"A안은 이렇고, B안은 이렇고, 마지막으로 C안입니다."
"어? 이건 뭔가요?"
"아 네, 그냥 스케치해본 내용인데 바탕에 깔아봤습니다."
"E거 괜찮은데요."
"네..."
디자인 회의에서 흔히 몇 가지 안을 디자인 결과물로서 제시했을 때,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엉뚱한 결과물이 느닷없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종종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비일비재하다. 이 때 디자이너들은 고민하게 된다. 고집대로 갈 것인가, 결과물의 방향을 뒤집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답은 없다.
디자이너의 관점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디자이너 개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있는 줄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대안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에. A안이라는 디자인 결과물에 공을 들이고 내심 만족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딘가 부족해보이는 디자인 시안을 고르는 '안목'을 마음속으로 욕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자이너 개인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디자인에 '정답'이란 없다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디자인은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수많은 대안들 중,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안을 제안하는 심미적인 계획이다. 즉, 안목이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기준일 뿐, 최적의 디자인을 이성적으로 기획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디자이너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A안에 대한 자신의 지지가 개인적인 기호에 의한 것인지를 고려해야한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A안이 어떻게 인식될지, 혹은 소비자의 시각을 무시한채 작업 자체에 너무 심취해있지 않았는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안과 A안을 곰곰히 비교해보면서 E안이 어떤 점에서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안목과 개인적 기호에 지나치게 빠지게 되면 그 결과물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애플은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예술적 가치를 존중하는 위대한 기업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랑받는 아이템이 많았던 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디자인 제품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맥 프로(Mac pro)가 그들 중 하나이다.
'쓰레기통'같다는 말까지 들으며 논란이 되었던 이 디자인은, 개발 부서나 마케팅 부서에서 추진했다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미니멀하다. (즉, 디자인 부서에서 강하게 추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도 애플의 마니아층조차 구매를 꺼리는 감이 있는 이 제품은 뭔가 애매하다는 평가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A안(으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디자인에 기능성이나 사용성을 맞추다보니 제품 자체가 모호해진 것으로 보인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선택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A안이 객관적인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에도 최적안이라고 판단된다면, E안을 선택한 배경이 클라이언트의 개인적 기호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E안이 좋지 않다고 보류하게 된 디자이너의 판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깊게깊게 파고들어 객관적인 데이터로 정리해야 한다. 생산성, 보관성, 유통성, 조립성 등 현실적인 조건들이나 소비자 층의 감성적 기호 등과 같은 정성적인 자료들이 이러한 데이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절대로 주관적인 느낌 등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클라이언트의 선택이 정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이유와 태도로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렌드 조사나 생산 공정에 대한 자료 등, 객관적인 자료를 최대한 뒷받침하여 분명하게 E안이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야 한다. 즉, 디자인 프로젝트가 진행된 배경, 기획 시에 설정된 목표 등을 고려했을 때 A안이 갖는 당위성을 합리적으로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글들 모두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지만, 특히 아래의 글을 첨부한다.)
디자이너는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
분명한 점은, 디자이너는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디자인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즉, 다른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면, 디자이너가 너무 강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자칫 사업의 방향을 흔들어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학교나 회사 등에서 디자인 감각을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고집스러워지기 쉽다. 아니, 모든 직군에서 일정 수준 경력을 쌓게 되면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 다만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특성 상 주관적인 판단에 속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더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디자이너가 속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디자인이 밀리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디자인이 자신의 작품으로 남게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디자이너들은 항상 자신만의 A안들을 모아두는 스케치북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사업을 이끌어가는 것은 클라이언트 측이다.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결과물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은 결국 구매되고 사용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찾는다. 나의 훈련된 시각과 감 만이 100% 옳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사업의 성사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디자인 감성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고집을 부리면서 밀어붙일 수만은 없다.
정리하면, 전문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의견을 피력하되, 다른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함께 옳은 방향을 찾아 가는 것이 디자이너가 가져야 하는 고집일 것이다. 디자이너는 좋은 등대의 역할을 하면 된다. 선장이 배를 옳은 곳으로 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