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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Mar 08. 2022

주먹밥과 밀푀유나베

2월 3주차_혼자의 일상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는 요즘

#1 냉동밥과 볶음김치


  격리 7일차이자 마지막 날. 지난밤 약 먹고 따뜻하게 하고 푹 잤더니 몸이 한껏 개운하다. 아직 목 상태가 깨끗이 회복되지 않아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지만, 그래도 감기 증상이 거의 사라지고 몸도 가벼워졌다.


  오늘부로 죽만 먹던 생활을 청산하고 오랜만에 냉동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지난주에 얼려 둔 된장찌개와 소시지야채볶음도 데우고, 누나가 준 볶음김치와 열무김치도 꺼내고, 배달음식 먹고 남은 새우장도 그릇에 담고, 하나 남은 바나나도 썰고, 사과즙도 컵에 따르니 이게 바로 진수성찬.


  밥맛 돌아온 거 보니 안심이 되고, 갑자기 할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설거지는 쌓여 있고, 출장 가야 한다는 카톡이 오고, 한 주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악보를 펼쳐보고, 집안 소독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고, 격리해제 통지서는 어떻게 발급하는지 검색해 보다가. 건강한 몸이 허락하는 하루가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 격리해제 앞둔 환자의 소감.(22.02.14)


검은콩밥, 차돌된장찌개, 소시지야채볶음, 볶음김치, 열무김치, 새우장, 바나나, 사과즙


#2 검은콩밥과 황태미역국


  일주일 만에 출근이다. 자전거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는 기분이 낯설고도 상쾌하다. 바깥은 이렇게나 추웠구나 싶어 집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어제는 자축하며 치킨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아침 먹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지만, 그래도 먹어야지 하고.


  지난밤 해동시킨 검은콩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매형이 만들었다는 볶음김치를 꺼내고, 열무김치도 꺼내고, 동결건조 국블록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황태미역국이 완성되고, 사과즙을 유리컵에 따르고, 하나 남은 그릭요거트와 사과버터잼을 올려놓으니 아침상이 뜨든.


  든든하게 배 채우고 출근하는 이 시간이 아주 조금은 그리웠던 것도 같고. 에이 물론 금세 출근하기 싫다고 불평불만 쏟아낼 테지만. 아무튼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고,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신선한 봄이 곧 찾아올 거라고.(22.02.15)


검은콩밥, 황태미역국, 볶음김치, 열무김치, 그릭요거트, 사과버터잼, 사과즙


#3 북엇국과 전복장


  격리해제 후 첫 출근에 이어 첫 출장인 아침, 30분 더 자고 일어나 느긋한 마음으로 늑장 좀 부리다가. 아침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서둘러 가방 챙기고, 아침거리를 신속하게 꺼내보는데.


  냉동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고모가 주셨다는 전복장을 꺼내고, 고추장아찌와 열무김치도 내놓고, 동결건조 국블록에 뜨거운 물 부어 북엇국을 끓여내고, 샤인머스캣 몇 알 따고, 아몬드우유를 컵에 따르니 오늘의 아침밥 완성.


  보일러를 틀어도 실내온도가 쉬이 오르지 않던 지난밤과 다르지 않은 오늘 아침, 따숩게 털옷을 걸치고 체크목도리를 두르고 나서는 아침, 자전거 손잡이 잡은 손이 시리고, 뜨거운 입김에 안경엔 물이 맺히니 겨울이 진하게 실감나고. 허나 나는 이제 곧 조금은 따뜻한 남쪽으로.(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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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크램블에그와 무채꿀절임


  요즘은 저녁마다 올림픽을 보는데, 금세 열두 시가 되곤 한다. 출장 후 지친 몸을 소파에 누이고, 최선을 다해 멋진 결과를 만드는 선수들을 보노라면 짜릿한 기분이 들어 역시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며칠째 티브이만 보는 나를 보고 후회하는 쳇바퀴.


  그럼에도 빼먹지 않고, 냉동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시래기해장국을 만들고, 계란 두 알로 스크램블에그를 만들고, 늘 먹던 고추장아찌와 열무김치를 꺼내고, 엄마가 만드신 무꿀절임을 그릇에 담고, 아몬드우유를 한 잔 가득 따른다.


  시차 적응(?) 중인 건지, 속도 더부룩하고 걷는 것도 힘겹고 바깥은 또 왜 이리 추운지. 물론 적응도 해야 하지만, 디폴트 값은 버티는 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작금의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거기에 아침밥 먹는 습관을 살짝 얹은 채로.(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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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먹밥과 밀푀유나베


  후유증인지 아직 깨끗지 않은 건지, 이따금씩 심한 기침을 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이 마스크도 잘 쓰고, 점심도 혼자 따로 떨어져서 먹고, 집에도 일찍 귀가한다. 혼자의 일상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는 요즘. 때로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순간이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아득하다.


  지난밤 알배추로 만든 밀푀유나베와 알배추구이 남은 걸 꺼내고, 역시 늘 먹던 고추장아찌와 열무김치도 내놓고, 냉동밥이 다 떨어져 전자레인지에 돌린 냉동주먹밥 3개를 밥 한 공기마냥 슥슥 비벼놓고, 엄마가 보내주신 한라봉 한 개를 까서 오늘의 아침을 차려냈다.


  요즘은 또 속도 그리 좋지가 않다. 죽만 먹다가 오랜만에 햄버거, 치킨, 피자 같은 고칼로리 음식을 뱃속에 많이 집어넣은 탓인지, 그동안 너무 움직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를 일. 회복이 더디다고 느끼는 게 나이 탓인가 싶어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의 나를 실감하며 좀 더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찬 공기에 옷깃을 여미는 아침의 출근길.(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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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이 허락하는 하루가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
격리해제 앞둔
환자의 소감.






글, 사진 / 나무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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