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늘보 Oct 30. 2022

에필로그_내일의 아침밥

하루의 끝에서 내일의 아침밥을 생각한다

  2021년 12월 31일, 새해 전야에 친구들과 부루마블을 하고 있었다. 둘씩 편 먹고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한 번 이겨보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하지만 통행료가 비싼 상대팀 나라에만 계속 걸렸고,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비록 게임은 졌지만, 우리의 말을 '새해'라는 출발점에 다시 두었다. 그리고 빈 종이 한 장씩 서로 나눠 갖고, 3X3 새해 빙고를 만들었다. 우리는 각자 빙고 한 줄을 완성시키면, 함께 모여 서로를 축하해주기로 약속했다. '근골격량 1.5kg 증가', '부모님과 여행 가기' 등으로 한 칸씩 채워 나갔다. 그중에 '일기 쓰기 6개월'도 빙고 한 칸에 담았다.


  일기장에 아침밥 기록을 채우겠다던 새해 다짐은 어느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르렀다. 그동안 일기장에 아침밥 기록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카이브된 인스타 계정의 게시물이 200개를 돌파했고, 첫 게시물을 보려면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했다. 사진만 보아도 그날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코로나에 걸려 고생하며 죽만 먹던 날, 숙취로 밥이 들어가지 않아 간신히 빵과 우유를 입안에 욱여넣던 날, 지방 출장 가서 복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던 날, 한동안 베이글에 꽂혀 호텔 조식 느낌을 내보던 날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단 하루도 똑같은 아침밥이 없었다. 아침밥 변주 한 꼬집 덕분에 반복되는 끼니를 질리지 않고 재밌게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꼬박꼬박 아침밥을 챙겨 먹는 노력에 비해 건강은 그리 좋진 않았다. 어떤 달에는 종일 술 약속에 몸이 찌들었고, 모든 게 귀찮아 누워만 있다가 최고 몸무게를 경신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질병에 꼼짝없이 누운 채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평소에 적당히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술을 먹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서는 그게 또 맘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하게 되곤 한다. 혹자가 구차한 핑계라며 호되게 다그친다면, 나는 쭈그려 앉아 울면서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무너진 나를 다시금 일으켜 준 팔 할이 아침밥이었다. 아침밥 마저 안 챙겨 먹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피곤한 저녁에 배달음식만 시켜 먹던 날이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무기력한 몸과 마음으로 소파에 누워있었고, 쌀국수, 족발, 피자 같은 것들을 시켜 먹으며 하루를 꾸역꾸역 넘겼다.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냉장고로 직행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용할 양식이 되어 잔반 걱정이 없었고, 어제의 후회를 기록하며 저녁을 가볍게 먹기로 다짐하는 날도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한가득 챙겨주시는 엄마의 반찬을 기꺼운 마음으로 양손 가득 받아오곤 한다. 그동안 냉장고 안에서 상해가던 엄마의 반찬 때문에 죄책감으로 지내던 시간들이여 이제는 안녕! 매일 아침, 부모님에게 아침밥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는 일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3X3 새해 빙고


  출발점에 세워둔 내 말이 어느새 후반부에 들어섰고, 다시 새로운 출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새해 빙고는 단 한 줄의 빙고도 만들지 못했다. 올해가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빙고 한 줄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 내년 빙고는 어떻게 채울지 벌써부터 고민되지만, 역시나 '오늘의 아침밥'은 2023년 새해 빙고에서 부동의 센터다. 그만큼 '아침밥'은 올해 나에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나는 요리를 잘하지도 않고, 똑소리 나게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음식 사진을 맛깔나게 찍을 줄도 모르고, 글을 유려하게 잘 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아침밥 챙겨 먹는 일에 무슨 대단한 비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아침밥 챙겨 먹기 위해 30분 일찍 일어나고, 귀찮아도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아침밥 일기를 쓰고, 용기 내어 부끄러운 아침밥 사진을 인스타 계정에 올리면 된다. 다이어트나 금연처럼 드라마틱한 목표가 아니었고, 그저 끼니를 챙기는 단순한 리추얼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먹고 있고, 하루의 끝에서 내일의 아침밥을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먹고 있고,
하루의 끝에서
내일의 아침밥을
생각한다. 







글, 사진 / 나무늘보
이전 28화 연두부와 미나리오징어초무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