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되는 가로등 조명이 눈에 쌓이면 마치 백야를 맞이한 밤처럼 평소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고 잠들었는데 왜인지 지나치게 어둡고 스산하며, 공기마다 찬 기운이 느껴져 잠에서 깼다. 두런두런 창문 밖에서 이웃 할머니 목소리도 들린다.
‘몇 시지? 할머니 벌써 눈 치우시나?’
충전기를 꽂아둔 핸드폰 배터리가 69%, 밤새 충전해 둔 것치곤 저조하다. 자다가 선이라도 건드렸을까? 시간은 5시를 조금 넘겼다. 아직 가로등 불빛이 밝을 시간인데 전에 없이 캄캄한 새벽이다. 그래도 6시는 넘기고 해 나오면 치우지, 지금은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조금 더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아이고, 젊은 년이 독하다’ 소리라도 들을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잠바 하나 손에 닿는 대로 걸치고 현관문 앞에서 불을 켠다. 어?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 보일러 실내온도가 표시되고 있지 않다. 털이 부숭부숭한 실내화를 벗고 맨바닥을 발로 디딘다. 얼음장같이 차 발이 시리다. 몇 차례 화장실 스위치, 거실 등 스위치를 딸깍거렸으나 어느 것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전이다.
68% 남은 핸드폰 후면 플래시를 켜고 두꺼비 집을 들여다보았다. 정상이다. 잠시 집 안 공기처럼 얼어 서 있었다. 잠이 덜 깬 머릿속에 어제보다 몇 프로는 더 차가운 기운이 들이친다. 기억을 더듬어 정전이 되면 엄마가 하던 일을 떠올려 한전에 신고부터 했다.
“이 근처에 혹시 정전 신고 들어온 거 없나요?”
정전된 가구가 이 낡은 9평 반뿐인지, 혹은 동네 전체가 정전인지 아주 중요하다. 이 집만 정전이라면 혹한기를 앞두고 낡은 집의 대공사가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30분 전 신고 한 건이 있었다. 번지수가 이 근방이다. 일말의 안도도 잠시 또다시 얼어 우왕좌왕했다.
하루 연차를 내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사고를 수습하는 게 어떨까? 싶었으나, 당일에 하루 쉬겠다는 말에 내키지 않는 속내를 구태여 감추지 않을 상사도 맘에 걸리고, 언제 복구될지 모르는 어두컴컴한 굴 같은 집에서 배터리 60% 남은 핸드폰 하나만 가지고 마냥 기다리는 건 그리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상하의를 주워 걸치고 선크림 하나만 대충 발랐다. 얼음장 같은 물로 더듬더듬 양치질을 하고 현관문을 나서니, 열리는 문틈 사이로 하얀빛이 컴컴한 굴속으로 쏟아졌다.
9평 반을 선택했던 유일한 하잘것없는 이유, 비 내리던 지난봄,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인 날, 마당에 서서 머릿속으로 그려본 눈 내리는 겨울의 풍경과 꼭 맞아떨어졌다.
그런 걸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일 년에 몇 안 되는 날 일 테지만 그런 겨울을 이 집에서 맞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이사 후 처음으로 그 풍경을 마주 하고 있다.
눈 쌓이지 않은 처마 밑으로 어기적 걸음을 옮겨 대문을 열었다. 기다리던 풍경을 홀로 조용히 눈에 담는다. 대문 앞 골목길은 그늘지고 다니는 사람도 적은 탓에 꽤 많은 양의 눈이 쌓여있다. 발자국이 닿지 않은 하얀 눈을 푸욱푸욱 밟아가며 미끄러지지 않게 길을 내려왔다.
온몸의 무게를 신중하고 단단하게 두 발에 싣고 조심스레 아직 치우지 못한 골목길과 계단을 내려왔다.
“그 댁도 정전이죠?”
큰길 빨간 벽돌집 앞을 쓸던 이웃이 물었다.
이웃은 정전 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뭔가 자꾸 모바일 앱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신고를 하지 못했단다. 이제는 ARS 음성도 자칫하면 헤매는 나이가 되었다. 말로 하는 ARS, 보이는 ARS, 그냥 귀를 기울여 잘 듣고 버튼을 누르는 안내 음성이 익숙한 사람에게 쉬운 것은 역시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다. “네, 신고했어요. 인력 투입해서 고쳐준데요.”
이웃은 언제쯤 복구가 될지도 물었으나, 한전도 원인을 모르기에 복구 또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들은 대로 이웃에게 알려주었다. “고마워요.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정전 때문에 열선이 제 일을 하지 않은 탓인지, 원래 열선이라는 건 없는 길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비탈길에서 이웃은 얼른 눈을 치우는 일에 다시 몰두했다.
게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주며 길을 내려갔다.
사람은 눈 쌓인 비탈길이 두렵다. 넘어져 다치는 것도 아플까 무섭고 병원비도 무섭다. 사람은 오늘 하루도 먹고살자고 정전된 집에서, 냉수에 손과 얼굴을 씻고 찬 기운이 깃든 옷을 입고, 미끄러져 어디가 부러질까 두려운 경사진 내리막길을 꾸역꾸역 걸어 내려왔다. 신이 난 것은 동네 강아지뿐이다.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과 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리트리버가 당황스러운 보호자도 조금은 신이 나 보였다.
사람들이 아직 밟지 않은 새 눈을 밟으며 일터로 재촉했다. 손타지 않은 새 눈을 밟는 것이 덜 미끄럽다. 남의 발자국이 남지 않은 길을 골라 천천히 무게를 싣고 할 수 있는 한 단단히 걸었다.
분명히 도심 속에 살고 있지만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혼자서 덩그러니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것도 같다. 집의 나이만큼 나의 생활도 저 뒤 켠에 남겨진 과거만치 낡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에 쌓인 눈을, 단풍 위에 터를 잡고 다른 세상처럼 쌓인 눈을 훔쳐보며 걸었다. 실망스러운 것도, 딱히 시시해 보인 것도 아니다.
매일 어른이 되어간다.
원하던 것이 손에 쥐어졌을 때,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열 살에 설레던 눈이 여전히 그만한 힘을 가지고 나를 흔들어 놓기에 나는 너무 비대해진 것이다. 단단히 걷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 쉬이 흔들리지 않은 어른이 되어, 매일 기대하던 것이 끝내 못 미치는 아쉬움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또렷하고 강렬한 즐거움은 줄어들고 기억으로 오래 남는 행복은 매일 쌓인 노역의 피로에 찾을 기력도 없다.
좋아하던 눈이다.
귀한 손님이 온 듯, 강아지처럼 우산도 없이 신이 나 돌아다니던 나는종일 책상 앞에 앉아 하루치 할당량의 노역을 마치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침에 내려왔던 얼은 길을 대수롭지 않게 오른다. 아침에 미뤄둔 대문 앞을, 골목길을 쓸어야 한다. 게으른 나를 누군가 욕하며 치우지 않았길 바라며 아침보다 과감하게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왔다.
다 떨어져 낡아 빠진 빗자루를 들고 슬금슬금 대문 앞 골목길을 쓸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조심조심 몇 가닥 안 남은 빗자루를 들고 힘차게 길을 텄다.
솔이 다 닳아 빠져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나무 막대는 꽤 무거워 비질이 버거웠다. 올 겨울에는 눈이 얼마나 자주 내릴까? 적어도 한 두 차례는 더 내리겠지. 눈삽이나 넉가래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쌓인 눈을 한 번에 밀어내면 속이 다 시원할 것이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골목길과 계단에 쌓인 눈을 대충 정리하자 다시 눈발이 흩날렸다. 여름이 지나고 미리 구비해 두었던 염화칼슘을 엉겨 붙은 얼음길 위에 솔솔 뿌렸다. 숨이 차고 열이 오른다. 딱히 나쁘지 않았다.
정전은 어느새 복구되어 실내온도는 10도를 가리키고 있다. 난방을 가동시키고 뜨거운 물에 차가워지는 목덜미의 소금기를 덜어낸다.
큼지막한 눈이 내리더니 한 시간이 흐르자 터 놓았던 길은 다시 보이지 않는다.
현관 위 차양에 눈이 20센티는 쌓인 것 같다. 밤 사이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질세라 빗자루를 들고 조심스레 차양 위에 쌓인 눈을 털었다. 잠옷 바람에 맨다리 위로 사나운 눈보라가 날리는 것이 여름 더위 내내 참고 죽어지내던 모양새보다 나았다.
집안으로 들어와 한 겹 옷을 더 껴입고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얼은 손을 녹이며 창 밖을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