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낍이 한 장, 5만낍이 두 장, 2만낍이 다섯 장,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1000낍과 500낍을 뭉텅이로 내민다. 총 80만낍을 받아야 하는 내게 건네는 돈뭉치 치고는 많아 보이나, 눈짐작으로도 80만낍에는 꽤 모자랄, 단위가 작은 지폐들이 대부분이었다. 5만낍이나 2만낍 짜리로 바꿔 달라고 하자,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 자리에서 돈을 세려고 하자 낚아채서 본인이 센다. 돈을 세다가 접었다가 혼을 쏘옥 빼놓는 그 현란함에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이 가진 지폐가 이것뿐이라면 다른 데서 환전하겠다고, 남자는 빈정이 상한 듯 무어라 중얼거리며 내가 낸 100달러를 한참 찾는 척하다 손을 저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내가 준 그 100달러'를 가리키자 던지듯 내밀었다.
그의 뒤통수를 한 대 탁 치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다른 곳에 가서 환전했다.
'팍 씨'
두 번째 '팍 씨'는 아마도 농 키아우 터미널의 '유 바이 티켓 나우 고 나우' 가 아니었을까 싶다.
'팍 씨'
세 번째 '팍 씨'는 바로 지금이다. 툭툭에 타자마자 얼마 안 가 라오스 국경이라며 날 내려주고 시커먼 매연을 풀풀 날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저 툭툭, 이 정도 거리라면 살짜쿵 바가지요금이다. 뭐, 그래 봤자 몇 천원이니 깨끗하게 잊는 편이 좋다.
만낍 국수, 만 오천낍 뷔페를 생각하면 당연히 짜증이 휘몰아친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떠 올리면 몇 백 원어치, 몇 천 원어치의 돈이라도 역시 바가지는 짜증 난다.
자, 이제 태국으로 돌아가자, 국경만 건너면 나는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 가격을 미리 계산하지 않고 밥을 사 먹고 싶다. 태국의 편의점에서 요구르트부터 사 먹어야겠다. 아니, 커피? 에너지 드링크?
에이 뭐, 다 사 먹지 뭘 고민해.
이른 시간이라 국경을 넘는데도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냥 무작정 기다리기, 나는 다행히 이것을 아주 잘 한다. 앞 줄의 중국 아주머니와 표정으로 수다를 떨고, 태국 청년들에게 터미널의 위치를 물었다. 태국 국경에서 툭툭을 타면 터미널에 데려다준다고 한다. 그래, 기다리자.
사람들이 하나 둘, 여권을 가지고 출국심사대를 통과한다. 잘생긴 라오스 청년이 7년 전에 찍은 내 여권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눈을 또렷하게 뜨고 웃었다.
'누나 맞아'
잘생긴 라오스 청년이 도장을 쾅쾅 찍으며 말했다.
-만 낍, 버스비는 밖에서 내세요. 다음에 라오스에 또 와요-
출국세를 지불하고 여권을 돌려받았다. 태국 국경까지 가는 셔틀버스표를 사고 라오스 낍을 태국 바트로 환전했다. 이제 막 라오스 낍에 좀 적응이 됐는데 다시 바트로 계산해야 한다.
라오스 낍은 나누기 7.5
태국 바트는 곱하기 33.5
셔틀버스가 태국 국경에 도착했다. 하루 만에 늘어난 도장이 괜히 뿌듯하다. 내 여권에는 동남아시아 도장만 반복되어 찍혀있다. 우리나라 출국 도장, 필리핀 입국 출국. 우리나라 출국 도장, 태국 입국 출국 도장, 또 필리핀, 또 태국, 어쩌다가 베트남, 또 필리핀, 또 태국 그리고 라오스.왜인지 조금 볼품이 없는 여권인 것 같다. 전혀 다채롭지 못하다.
좀 더 멀리 배낭을 메고 이 나라 국경에서 저 나라로, 또다시 저 나라 국경에서 그 옆 나라로, 나는 이런 여행을 10년쯤 전에 했어야 했다. 여행에도 때가 있다. 나이에 맞는 장소가 있다.
친구, 우린 왜 10년 전에 떠나지 않은거지?
우린 여유가 없었잖아.
맞아, 그땐 저가 항공도 없었어.
'지금이라도 더 멀리 나가도 될까'
물론 다음 기회도 있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낯익은 사람이 국경의 연못에 물고기 밥을 주고 있었다. 라오스로 건너오기 전 치앙 콩에서 하루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아저씨였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반갑게 인사하자 아저씨도 반갑게 물었다.
-돌아왔구나! 라오스는 어땠어?-
단 세 번의 '팍 씨'와 그밖에 좋았던 수많은 순간을 뭐라고 함축해야 할까,
-나이스?-
아저씨가 웃었다. 치앙 콩에 더 있을 거냐고 물으시기에 오늘 당장 치앙마이로 갈 거라고 말씀드렸다. 아저씨가 툭툭 기사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빈 툭툭이 오고, 60바트짜리 툭툭 티켓을 받았다.
-아이, 라이드 유 투 터미널-
툭툭을 타려는데 아저씨가 나를 데려다주신다고 하셨다.
-아저씨, 전 툭툭 티켓 이미 샀는데요?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차표를 쭈욱 찢으라는 시늉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so cool! 멋지다. 어쩜 저렇게 멋있는 태국 아저씨가 이 작은 국경마을에 계시는 거지? 신나게 트럭에 가방을 싣고 짐칸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곧장 달렸다. 바람을 맞으며 자유로운 영혼, 이 시대 '마지막 히피'라도 되는 냥 이 기분을 만끽하려는 찰나, 아 이거 또 의심이 들지 뭔가?
'여자 혼자 뭘 믿고, 딱 하루 묵은 숙소 주인 차를 겁도 없이 탔지?'
'차비를 아주 비싸게 부르시면 어쩌지?'
'어머머 유턴은 왜 하시는 거지?'
'이 길이 터미널 가는 거 맞나?'
유턴을 하자마자 도착한 곳은 태국 국영 버스 '그린 버스 예약소' 앞이었다.
'야 이 똥개야'
'마지막 히피'가 될 뻔한 내 자아가 소리쳤다.
아저씨는 예약소 직원에게 치앙마이행 버스에 자리가 있는지 묻고 티켓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아, 이럴 때는 얼마라도 드려야 하는건가, 얼마가 적당한가, 오히려 내가 순수한 호의를 왜곡하고 있는건가'라는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는 찰나 아저씨는 내게 도너츠 봉투를 내밀더니, '바이' 하고는 쏘 쿨 하게 사라지려는 게 아닌가!
'야 이 똥개야'
여전히 나 때문에 자유로울 수없는 그녀가 나에게 소리쳤다. 다급히 아저씨를 쫓아나가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씨 유 넥스트 이어-
아저씨가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겠다고 아저씨와 약속했다.
치앙마이행 버스가 예약소 앞에 도착했다. 스르르륵, 고급스런 버스의 초록색 문이 열렸다. 에어컨도 잘 나오고 자리도 넓다. 차장 언니가 간식과 물도 준다. 하지만 난 이렇게 맛있는 도넛이 있으니, 일단 이것부터 좀 먹어야겠다. 하루 만에 먹는 마른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