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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린 Jun 18. 2024

도망쳐 온 곳에 낙원은 없다

우리는 삶의 터전을 찾아서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했다.

대를 이어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은 더 이상 우리를 품어주지 않았다. 곡물창고에 있던 수많은 식량은 어느새인가 거덜 났고, 무시무시한 맹수가 우리들을 습격했다. 굶주림으로 아사한 자와 맹수의 발톱에 희생된 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우리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다. 살갗을 채찍처럼 때려대는 툰드라의 매서운 칼바람을 뚫으며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 와중에도 적지 않은 희생이 따랐다. 설원의 추위는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여정이 시작된 지 며칠째인지도 헷갈릴 무렵, 우리들은 마음마저 차차 얼어붙고 있었다. 여정의 초반부만 해도 새로운 터전을 향한 기대감이 맥동하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온몸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날카로운 얼음결정 같은 절망에 상처 입고 멈추어버린 지 오래다.

이 가혹한 기후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은 눈꺼풀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다. 한이 맺힌 채 죽으면 눈을 감지도 못한다던데, 부디 한이 맺힌 것이 아니라, 그저 눈꺼풀이 감기기 전에 얼어버려서 그랬다고 믿고 싶다. 추위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얼어버린 몇몇은 이상행동을 보였다. 꽁꽁 얼어 부서져 나간 자기 꼬리를 보며 뱀이라고 놀라는 이도 있었고, 감각이 이상해져 너무 덥고 뜨겁다며 눈 속으로 파고드는 이도 있었다. 어릴적 마을 대모님께서 극한의 추위 속에서 착란이 오면 추위를 뜨거움이라고 착각한다고 알려주신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지옥에서 무너져가는 동지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여정을 포기하고 싶지만, 이제는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졌다. 우리가 떠나온 터전에 남아있는 것은 없을뿐더러, 여태껏 이동한 거리를 생각하면 도저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이 여정을 출발할 때의 마음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냉혹한 대자연의 학대 속에서 식어버렸다. 떠나온 목적도, 생존을 향한 열망도 모두 얼어버렸다. 이제는 단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다. 지금은 그저 따듯한 보금자리에서 치즈를 갉아 먹던 행복한 순간이 그리울 뿐이다.

다 틀렸다. 슬슬 절반도 채 남지 않은 동지들과 함께 다가오는 끝을 맞이해야 하겠지. 시간조차 얼어붙은 이 차가운 설원 속에서 석상처럼 잠들 일만 남았다.



‘어?’

선두그룹에 있던 누군가가 외마디와 함께 우뚝 멈춰 섰다. 반쯤 넋을 놓은 채 걷고 있던 다른 이들은 뒤늦게 변화를 알아차리는 바람에 멈춰있던 이들을 피하다가 발이 엉켜 넘어졌다.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고 탄성을 내지르는 동지, 넘어져서 비명을 지르는 동지의 소리가 섞여 고요한 설원에 울려 퍼졌다. 근래 느껴보는 가장 큰 소란이었다. 그리고 그 소란은 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광경에 이내 사그라들었다.

극한의 추위에 눈마저 얼어붙어 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 눈앞에 서 있는 그것은 분명 요새의 형상을 저마다의 안구에 새기고 있었다.


요새는 웅장했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선 침엽수림 사이로 우뚝 솟은 모습은 대지를 짓누르며 장엄한 거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들의 고된 여정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 거대한 요새는 모든 인원을 수용하고도 남을만한 규모였다. 마치 신께서 우리를 위해 내려주신 것처럼, 생존을 위해 헌신한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요새는 자리 잡고 있었다.

요새는 특이했다. 성채를 구성하는 것은 돌이 아닌 강철이었다. 겨울 호수를 뒤덮은 얼음처럼 두껍고 매끈한 철판이 오밀조밀하게 엮여있었다. 철판으로 된 성채의 한가운데에는 우뚝 솟아있는 성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성탑에서는 기다란 기둥 같은 것이 해가 뜨는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 굴뚝인듯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런 연기를 뿜어내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그 요새가 텅텅 비어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이 한파 속에서 불을 때우지 않고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 비어있는 성채. 그것은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간접적인 신호처럼 보였다.

성채에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요새의 아랫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요새를 덮고 있는 두꺼운 성벽 아래에는 성문 대신 여러 개의 수레바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수레바퀴들을 여러 장의 철판을 엮어 만든 팔찌 모양의 띠 같은 것이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띠도 한데 묶여서 같이 움직일 것 같이 긴밀하게 엮여있었다. 도대체 이 거대한 요새에 왜 이런 수레바퀴 같은 것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이 거대한 성채가 굴러가기도 한단 말인가?’라는 생각까지 떠오르자 나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망상이 지나치다. 지나친 추위로 인해 이성이 얼어붙고 상상력이 커진 탓이리라.


아무튼간에 이 요새는 구조로 보나, 완성도로 보나 우리의 문명이 가진 기술로 만든 물건은 아닌 듯 했다. 우리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위대한 존재가 만들어낸 구조물이었다. 이 요새라면 어떠한 광풍도, 천재지변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미개한 우리들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를 가엾게 여긴 신께서 내리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읊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삶의 터전을 내리시니, 이곳에서 번성하여 신의 전능함을 널리 알리겠나이다’




우리는 그 요새에서 겨우내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내며 번창할 수 있었다. 비록 가혹한 여정을 보내며 생긴 부상이나, 친지의 죽음 등으로 인해 아직도 상흔에 시달리는 자들이 존재했지만, 반면에 새로운 생명도 태어났다.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앞날을 꿈꿀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들 그렇게 희망을 노래하며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봄이 다가왔다.


동지들을 앗아간 가혹한 추위는 잦아들고, 하얀 눈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침엽수림은 푸릇한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이제는 눈밭에서 나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겨우내 항상 동물들의 얼어 죽은 시체만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그들을 보니 반가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만의 동지애가 느껴졌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하늘은 청명하게 개어있는 이 와중에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멀리서 보이는 또 다른 움직임이었다. 겨우내 고생했던 탓일까? 온갖 시달림에 의해 날카롭고 예민해졌던 감각은 평화롭게 터전을 가꾸어나가던 중에도 완전히 중화되지 못한 듯했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뒤통수를 간지럽혀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꾸물거리는 낯선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높고 거대한 형상들이 이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옛 터전에서 우리를 공격했던 고양이나 족제비 같은 맹수들과는 달리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기괴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두 발에는 검은 발굽이 있었고, 온몸을 칙칙한 녹회색의 털이 뒤덮고 있었으며 동시에 털이 없는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한들 설마 이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따라왔다. 겨울 동안 먹이를 찾아다니던 굶주린 호랑이나 여우 등이 우리들의 냄새를 맡고 이 요새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맹수인 그들이라도 이 요새를 향해 다가올 때는 경계심을 품고 조심조심 다가왔었고, 한참을 둘러본 다음에야 이곳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점을 깨닫고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저 정체불명의 두발짐승들은 이곳을 향해서 겁 없이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열 마리가 넘는 두발짐승들은 요새를 침략할 듯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몰려왔지만,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딱히 요새를 때려서 부수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독특한 울음소리로 떠들면서 요새 앞에서 서성거렸는데, 곧 그들 중에 있던 한 마리가 요새를 타 넘기 시작했다. 두발짐승의 키는 요새의 절반이 넘을 만큼 거대했기에 성채를 타고 오르는 동작은 그다지 버거워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불길하게 ‘끼이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연달아 터덩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요새가 크게 흔들렸다. 비록 두발짐승들에게 들킬까 봐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바라보건대 성탑의 윗부분을 뜯어낸 듯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호랑이조차도 해내지 못한 것을, 훨씬 작은 몸집의 그들이 손쉽게 해내는 것을 보고 이 요새가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리 뛴다. 여기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부르릉’

폭풍 같은 소리가 난다. 그리고 갑자기 이 요새 전체에 미칠듯한 진동과 굉음이 지속해서 들려왔다. 나는 마을에 있는 동지들에게 위험을 알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관찰을 그만두고 마을로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차라리 바깥에서 불어오는 눈 폭풍이었다면, 천둥과 벼락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소리는 요새 내부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들이 무엇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안쪽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니 동지들은 이미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었다. 요새의 심장부에서 나오는 열기는 새카만 연기와 함께 우리 모두를 태우고 질식시켰다. 겨우내 버텨왔던 추위보다도 폭발적인 속도로 동지들의 목숨을 빠르게 앗아가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건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불어닥친 열풍과 연기에 몸이 날아가 버렸다.

경고. 쥐를 무서워하는 분은 영상을 재생하지 마세요.



한참을 날아간 후 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요새의 입구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아련하게 보일 뿐이었다. 신의 천벌일까? 다른 문명의 침공?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지금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쫓겨나 버렸다. 마을 안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 폭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요새 밖으로 어떻게든 나왔지만, 밖에서는 두발짐승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무어라 울부짖으며 발길질을 해대었다. 마을 안쪽에서는 연기와 열기가, 바깥쪽에서는 두발짐승들이 우리 동족들을 학살하고 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두 눈에는 서러운 눈물이 차올랐다.

여태껏 했던 모든 고생이 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무했다. 우리는 옛 터전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서 후회를 뒤로하고 떠나왔다. 새로운 터전에서는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폭설과 맹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비록 희생이 따랐어도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행의 끝에서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를 발견해서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따사로운 봄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다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내일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고 여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심으로 행복하고 안정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독수리는 사냥한 먹이를 죽이기 위해 높은 곳까지 날아오른 뒤 던져버린다고 대모께 들은 기억이 났다. 우리 모두는 독수리에게 잡힌지도 모른 채 드높은 창공을 구경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하늘의 끝에서 날개 없는 비루한 몸으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요새는 그저 함정이었고, 우리는 순진한 희생양에 불과했던 걸까. 이것마저도 신께서 내리신 필수 불가결한 시련인 걸까? 아니면 신을 가장한 악마가 파 놓은 함정이었던 걸까.

눈물을 훔치며 뛰어가는 와중에 갑자기 하늘이 어둡게 변한다. 나는 직감했다. 이건 두발짐승의 발굽이다. 나는 더 이상 피해 도망칠 곳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제는 지친다. 여태껏 감내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이 신의 시험이 아니라, 악마의 함정이라 한들 이젠 저항할 수 없다. 






헤드라인: “발렌타인 데이에 승리를 안겨준 제 3여단의 영광스러운 전선 회복"


날짜: 193X년 2월 14일


오늘 제 3여단이 전선을 성공적으로 회복하며, 적군은 혼란 속에서 빠르게 후퇴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적군은 다수의 장비와 물자를 방치하고 도주하였으며, 이는 제 3여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취되었습니다.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이번 전투는 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자유국가 연합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며, 적들은 명확한 패퇴를 양상을 보였습니다. 방치된 전차들 중 몇 대에서는 추위를 피해 숨어든 쥐들이 발견될 정도로, 적들은 전쟁물자를 제대로 유용하지 못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한 이날, 제 3여단은 영광스러운 성과를 거두며, 전선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는 제 3여단뿐만 아니라 우리 자유국가 연합에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기자: [XXX]

[자유일보]







어느 날 수 백 마리의 생쥐가 버려진 탱크에서 끝도 없이 기어나오는 짧은 동영상을 보고 불현듯 소재 하나가 떠올랐다.


'저 생쥐들은 과연 탱크가 무엇인지 알기나 했을까?'


자연물이 아니기에 이질감은 들테지만, 그 사용 용도를 또렷하게 알 수는 없었을 거다. 거대한 몸체의 일부만 사용해도 그들에게는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세상 무엇보다도 단단한데, 외부의 침입자도 들어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그들이 그 요새의 실체를 알았을 때의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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