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두 살 터울의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다. 오빠가 먹으면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도 먹었다. 엄마는 내가 밥을 안 먹을 때마다 오빠를 칭찬했다. "성재가 잘 먹네" 하면서 나를 쳐다보면, 나는 오빠와 엄마를 번갈아보다가 나도 먹겠다고 숟가락을 들었다. 오빠가 동화책을 보고 있으면 나도 비슷한 책을 꺼내 들었다. 우리 키만 한 책장이 금방 채워졌다. 나는 손이 어설어서 잡고 있는 걸 자주 놓쳤고 장난감을 고장내기 일쑤였다. 오빠는 뚝딱뚝딱 잘 고쳤다. 내 인형의 머리가 돌아간 것도, 팔이 빠진 것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나는 잠자코 숨죽여 앉아 오빠의 척척 손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3살 무렵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엄마, 아빠, 오빠, 나는 한 방을 썼다. 장롱과 화장대가 있는 방에 요를 두 개 깔면 꽉 찼다. 주말 아침 해가 방 안쪽에 스밀 때까지 잤는데 오빠가 누워있으면 나도 더 잤다. 오빠는 일어나면서 나를 깨웠으므로 혼자 방에 누워있었던 적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둘이 자주 하는 놀이는 쥐잡기였다. 베개를 쌓은 뒤 이불로 덮고 오빠가 "쥐 나왔다!!" 소리치면 야구방망이, 잠자리채 꽁무니 같은 것으로 마구 두드리는 게임이었다. 엄마가 아침을 먹자고 불러야 끝이 났다. 어느 날 내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요 안 쪽에서 기어 나오자 둘 다 동작이 멈췄다. 바퀴벌레가 장롱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오빠와 내가 큰 소리를 내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놀다 보면 밥맛이 생겼다. 무얼 먹어도 맛있었다.
초등학교 등교도 오빠와 함께였다. 오빠가 신발주머니를 들고 나서면 헐레벌떡 따라나섰다. 학교는 집에서 마을버스를 타야 갈 수 있었다. 오빠가 마을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도 나에겐 따라보고 배울 거리였다.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고 오빠도 고학년이 되어, 더 이상 둘이 다닐 일이 없었다. 집에선 눈만 마주쳐도 싸우기 시작했다. TV 채널로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오빠가 보고 싶은 거만 보냐"라고 말하다가 언제 맞을지 몰라 내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 문을 잠갔다. 오빠는 씩씩거리며 내 방을 두어 번 걷어찬 뒤에야 돌아갔다. '어릴 땐 잘해줬는데 왜 저렇게 변했을까'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낯설었다. 전쟁 같은 시간은 내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잠잠해졌다.
대학에 들어와서 사이가 나아졌다. 24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오빠와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오빠가 1년 간 미국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파리에서 만났다. 반가운 마음도 금세, 만나자마자 싸웠다. 오빠는 외국 생활이 익숙해서 예약한 숙소를 곧잘 찾아갔고 외국인들을 만나면 대화했다. 나는 오빠가 없으면 손발이 없어지는 것 같아 의지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다 보니 싸울 이유가 늘어났다. 내가 답답했던 오빠와 나름 해명하려는 나는 에펠탑 앞에서, 알프스 중턱에서, 로마 길거리에서 싸워댔다. 그래도 금방 풀렸다. 한참 싸우다가도 "저녁은 뭐 먹을까?" "로마에 왔으니 젤라토로 때우자" "그럼 두 개씩 먹자" 이런 식이었다. 다녀와서 유럽의 근사한 풍경보다 오빠와 싸우고 대화한 장면이 훨씬 기억에 남았다. 이후 우리는 자주 산책하고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가 된 셈이다.
그런 오빠는 곧 결혼을 한다. 결혼 준비로 분주한 오빠를 보면서 괜히 서운한 마음에 투덜댔다. "오빠가 손해 보는 것 같으면 결혼하지 마"라고. 엄마는 혀를 내두르며 "어디서 시누이 노릇 하냐, 데려가 줘서 고맙습니다 해도 모자랄 판에"고 말해서 온 가족이 푸핫 웃었다. 수다쟁이 오빠가 결혼하는 것도, 새 언니가 생기는 것도, 내가 시누이가 되는 것도 신기할 뿐이다. 가족을 통해 새로운 관계로 번진다. 이번 추석에 언니가 놀러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별 얘기 안 했는데 웃음보가 터진 시간이었다. 결혼하면 남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형태의 관계로 전환되는 것임을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앞으로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