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학교가 재미없었다. 이유를 모른 채 선생님에게 회초리로 맞았고 화장실을 가려면 손을 들고 허락을 구해야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시끄러웠다. 쉬는 시간만 되면 시끌벅적한 소리가 적응이 안 됐다. 시멘트바닥과 나무의자의 냉기도 별로였다. 밖은 봄이었지만 교실은 언제나 춥고 낯설었다. 학교가 끝나면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서웠다. 화장실에 귀신이 있는 것 같았고 장롱에 뭔가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무섭다고 말하고 나서, 학교가 끝나면 엄마 사무실로 가게 됐다. 학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20분 정도 목동아파트를 구불구불 지나 엄마 사무실이 나왔다. 엄마는 지역 내에서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혼자 마을버스를 타고 엄마 사무실로 가는 길이 적응이 되던 참이었다. 어른들도 버스를 기다렸기에 그들이 탈 때 나도 꽁지에서 열심히 버스에 올랐다. 앞자리에 앉아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날은 정류장에 아무도 없었다. 정류장 초록표지판 아래에 우두커니 섰다. 마을버스 한 대가 그냥 지나쳤다. '내가 작아서 안 보였나.'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기다렸다. 곧이어 다른 마을버스가 보였다. 손을 번쩍 들었으나 또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리다고 얏 보는 건가' 분한 마음이 들었다. '걸어서 갈 수 있거든!'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다부지게 잡았다. 아파트 단지 사이, 마을버스 정류장을 표지판 삼아 걷기 시작했다.
화는 금방 누그러졌다. 구경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마을버스에서 보던 세상과 확연히 달랐다. 모든 것이 크고 넓었지만 그만큼 작은 것들이 잘 보였고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 키까지 자란 가로 화단에 손을 대고 걸었다. 잎사귀들이 나에게 뭐라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아 간질간질했다. 멈춰 서서 고개를 들면 가로수가 푸르게 흔들렸다. 손가락 길이의 초록색 벌레가 나뭇가지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너도 애쓰는구나! 힘내!" 외쳤다. 횡단보도에선 손을 들어 학교에서 배운 걸 써먹었고, 어떨 땐 하얀색 라인만 밟으면서 번쩍번쩍 뛰어 건넜다. 지루해질만 하면 무릎으로 신발주머니를 툭툭 쳤고, 만화주제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걷는 자체가 놀이였다.
엄마 사무실까지 절반 정도 걸었을 때 변수가 생겼다. 눈앞에 터널이 보였다. 터널 앞에 다다르자 막막했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어쩌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아줌마에게 길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터널을 갈 수 있어요?" 아줌마는 나를 보더니 어디 가려고 그러냐고 했다. 늘 내리던 정류장 이름을 댔다. 아줌마는 내 눈높이에 맞게 쭈그리더니,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터널은 자동차들이 방해 없이 달리려고 땅을 판 거라 사람은 그 위를 걸어야 해. 저기 터널 옆에 있는 길로 직진해서 쭉 걸으면 돼"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알려준 방향대로 다시 걸었다. 내 발 밑에 터널이 있다니, 신기한 일 투성이었다.
마을버스가 내려주는 정류장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감,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엄마 사무실까지 냅다 달렸다. 엄마가 "오늘은 한시간 반이나 늦었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질문으로 맞아주셨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왔다고 말하면서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엄마가 놀라서 말했다. "학교에서 여기까지? 우리 딸 대단하다, 어른 됐네."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 품에서 긴장이 풀렸다. 정말 한 뼘 자란 것 같았다. 한 두발 내딛으며 어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울 게 없어졌다. 혼자여도 괜찮았다.
지금도 걷는 걸 좋아한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가도 걷다보면 돋아난 싹에 감탄하느라, 볕을 쬐느라 생각이 흩어진다.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많은 시간을 산책하며 보내고 있다. 봄을 잔뜩 느낄 수 있어,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그 동네에 여전히 살고 있기에 씩씩하게 걷던 길을 다시 걸었다. 매번 새롭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나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