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방'이란 개념이 없었다. 집이 곧 방이었다. 엄마, 아빠, 오빠와 넷이 옹기종기 숨소리를 들으며 잤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면서 거실이 오빠와 내 방이 되었다. 거실은 장점이 많았다. 일요일 아침엔 오빠가 특선 만화 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음껏 굴러다녀도 제약이 없었다. 현관 앞까지 굴러가서 아침에 눈을 뜨면 신발이 보이기도 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눈을 뜨기도 했다. 이불 더미를 팔짝거리며 오빠랑 노는 재미가 있었다. 깔깔거리면 금세 잠이 왔는데 오빠는 새근새근 나보다 먼저 잠에 들었다. 오빠 숨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잠에 빠졌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각자의 방이 생겼다. 오빠는 이유 없이 씩씩거리고 방문을 닫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뭔가가 나올 것 같아 꿈뻑거리는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결국 불을 켜고 자는 걸 택했다. 방이 환해지면 그나마 나았다. 내 방의 불을 끄고 잘 수 있게 된 건 이모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되면서부터다.
이모와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한 방을 썼다. 결혼하지 않은 둘째 이모가 서울에서 지내게 됐는데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내 방은 침대와 책상으로 꽉 찼지만 이불을 깔면 한 사람은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속으로 귀찮은 마음도 있었는데 엄마는 이모가 밤늦게 들어와 새벽에 나간다고,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이모는 특이했다. 30대 후반인데 결혼을 안 했다는 것도,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청바지를 잘 입는 것도 그랬다. TV 드라마나 만화영화에서 보는 '여자 어른'이 아니었다. 이모가 함께 지낸 뒤로 책장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시몬느 베이유, 버지니아 울프, 혁명 어쩌고 하는 책들이 한 켠을 차지했다. 빛바랜 책등에 눈길이 갔다.
이모가 온다는 이유로 불을 켜놓고 자는 건 여전했다. 새벽녘 이모 기척에 어설프게 깼다가 캄캄해도 누군가가 있음을 안도하며 잤다. 가끔 이모가 일찍 들어오거나 늦게 나가는 날 이모는 왜 그렇게 바쁘냐고 물으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세상이 나아지려는지 할 일이 많네" 말했다. 엄마 말로는 이모가 노동운동을 한다고 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온 뒤로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한다고. 노동운동, 이주노동자 같은 말들은 생소했지만 이모가 종종 동남아시아로 출장을 다녀오면서 선물 사오는 게 좋았다. 이모가 없는 밤에는 '이모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모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고 있겠지'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이모가 활동하는 단체 근처로 집을 구하면서 독립을 했다. 신기하게 깜깜한 밤이 덜 무서웠다.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으며 밤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기숙형 대안학교로 가면서 가장 기대했던 건 누군가와 방을 같이 쓴다는 점이었다. 기숙사 생활에 적응할 무렵, 이모의 암 소식을 접했다. 말기여서 시간이 얼마 없다고, 어서 인사하러 오라는 말에 뻘쭘히 병원으로 향했다. 예전에 함께 누워 수다 떨던 이모 얼굴이 아니었다. 이모는 빼짝 마른 얼굴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눈을 크게 뜨며 나에게 아는 체 했다. 눈을 마주치면 울 것 같아서 '울면 이모가 슬퍼할 테니 울면 안 돼' 속으로 다짐했다. 주먹을 꾹 쥔 채 하얀 시트를 보며 오렌지 주스만 마시다 병원을 나섰다. 이별이 서툴렀다.
나는 이제 혼자서 불을 끄고 잔다. 나이가 30이 넘어서 당연한 소리지, 싶다가도 가끔은 무섭게 본 영화 장면이 생각나면 여러 번 뒤척인다. 그러다 문득 밤을 함께 보낸 사람들의 숨소리를 떠올린다. 그중에서 이모의 숨소리를 기억하며 잔다. 이모가 살아있다면 우린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눌까. 내 손을 잡고 잘하고 있다고, 내 등을 다독이며 괜찮다고 말해줄 것만 같다. 잠이 잘 온다. 이모가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