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쌓인 선물

by 재은

중학교 3학년, 나는 무던한 학생이었다. 매사 마음가짐은 '대충 해도 된다, 무리할 필요 없다'였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인지 성적에 미련이 없었다. 친구들과 노는 낙으로 학교에 갔다. 쉬는 시간에 낄낄거리며 떠들거나 하교길에 불량식품을 사먹었다. 집에선 라디오를 자주 들었다. 방 문을 닫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없어지고 나면 DJ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요즘 어떤지’ 사람들 사연에 공감했다.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이 장면으로 그려졌다. 마음이 놓였다. 그때부터 혼자만의 꿈이 생겼다. 무수한 사연을 들여다보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수업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국어 첫 시간,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까무잡잡하고 단단한 느낌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금방 조용해졌다. 우리와 천천히 눈 맞추더니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검지가 굽혀지지 않는지 엄지와 중지로 분필을 잡았다. 특이해서 눈이 갔다.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저는 기본에 충실한 수업을 하려고 합니다. 교과서에 좋은 지문들이 많은데요. 시험 위주로 공부하다 보면 놓치기가 쉽죠. 우리는 1년 간 독해능력을 기를 것입니다. 대신 과제가 많아요." 회초리를 들지 않아도 카리스마가 도드라졌다. 친구들은 숙제를 걱정했지만 나는 괜히 설렜다.


매일매일 과제가 주어졌다. 교과서에 실린 글을 요약해야 했다. 문단별로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쳤다. 그렇게 밑줄 친 문장들을 노트에 받아 적은 뒤, 그중에서도 핵심문장을 한 줄로 정리했다. 교과서 3-4페이지에 해당하는 글이 한 줄로 정리되는 게 신기했다. 게임처럼 느껴졌다. 꼼꼼하게 읽다가 '이거다, 찾았다!' 통쾌함이 있었다.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실린 날은 내용 이어쓰기가 과제였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장면을 곱씹었다. 사랑방 손님이 돌아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무리짓고 보니 흐뭇했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내 이름을 언급했다. "이번 과제를 재은이가 가장 잘했어. 어색하지 않게 연결했고 감정표현이 섬세했거든. 다들 읽어보면 좋겠다."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구들이 보여달라고 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노트를 건넸다. 웃음을 참아도 새어 나왔다.


어느새 마지막 수업이었다. 1년 간 성실하게 과제를 한 학생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나를 부르셨다. 교탁으로 걸어갔다. 친구들 시선을 의식해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문구류 몇 개가 있었는데 나는 포스트잇을 골랐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문장을 받아 적을 셈이었다. 선생님은 열심히 참여해주어 고마웠다고, 글씨가 예뻐서 보기 좋았다고, 노트 정리를 잘하는 것도 기술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의 박수를 받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이 해온 연습은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긴 글이어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겠죠?" 정말 그랬다. 전보다 글이 빠르게 읽혔고 이해가 쉬웠다. 앞으로 읽을 글들이 기대됐다.


고등학교를 지역으로 가게 되고 선생님도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면서 찾아뵙기 어려워졌다. 주고받았던 공책만 간직하고 있다. 공책은 선생님에게 1년 동안 받은 선물의 흔적이다. 처음엔 사심으로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칭찬을 받을수록 내 안에 숨은 보석을 찾았다. 나는 특별한 거 없이 애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먼지를 털 듯 살살 걷어내니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요즘 들어 기억을 짚어내는 글을 쓸수록 그때가 생각난다. 라디오 작가가 되지 않았지만 내 안에 담긴 무수함을 살피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중학교 3학년 단짝들. 불량식품을 자주 먹어서, 우리는 스스로 ‘불클(불량식품 클럽)’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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