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초여름 산책

by 재은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목동에서 보냈다. 학교가 끝나고 밤 10시까지 학원을 다녔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시험 점수에 대한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에게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엄마는 막 붐이 일던 대안학교를 추천해줬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목동만 아니면 됐다. 그래서 전라북도 무주에 있는 푸른꿈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학교는 시골 한 가운데 있었다. 읍내는 걸어서 1시간, 주변은 논과 밭이 전부였고 나지막한 뒷산도 있었다. 교사 열댓 명, 전교생 75명으로 전체가 100명을 넘지 않는 학교였다.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상이었다.


우리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누군가의 새근거림이 어색해 잠을 뒤척였다. 같은 방 친구가 허락 없이 내 물건을 써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기숙사 생활은 버겁고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학생 규모가 적다보니 한 사람과 갈등을 겪어도 모두의 사건이 됐다. 우리는 작은 것에 예민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들에게 예쁨 받는 ‘착한’ 학생이었고 또래 친구들에겐 시기의 대상이었다.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했다. 뭘 어떻게 해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잔뜩 움츠러들었다. 혼자 숨어있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산책했다.


17살의 초여름을 이승환 노래로 견뎠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수업이 없는 주간을 ‘귀가주’라 불렀는데 주로 서울집에 갔다. 남부터미널에 도착해서 광화문 교보문고를 들렀다. 핫트랙스에서 새로 나온 앨범을 고심하며 듣고 샀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선물 받은 CD플레이어로 듣기 위해서였다. 이승환의 발라드2집 앨범은 내 생애 첫 CD였다. 첫 학기가 겨우 끝나가던 참, 수업이 끝나고 혼자 나왔다. 풍물, 농업 등 특성화 수업이 없는 날은 4시 전에 일과가 끝났다. CD플레이어와 CD를 챙겨 학교 뒷산 쪽으로 걸었다. 뒷산 어느 샛길로 빠지면 아래에 하천이 보이는 평상으로 갔다. 산책하다 발견한 아지트였는데 누울 수도 있고 오래 앉아있어도 아무런 방해받지 않았다.


편하게 앉아 트랙1을 꾸욱 눌렀다. '꽃'이 흘러나왔다. 관악기로 시작되는 멜로디와 읊조리는 이승환의 음색, 세차게 흐르는 하천의 쏴아 물소리가 어울렸다. 가사는 이랬다. ‘내 오랜 낡은 수첩, 빛바래진 종이 위에. 분홍 글씨 그대 이름 내게 남아서 안 되는. 그 뒷모습 따라가 보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엄마 잃은’ 부분에서 눈물이 툭 터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고 집에 가고 싶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엉엉 소리 내어 울어도 주변 소리에 묻혔다. 마음이 놓였다. 실컷 울고 난 다음에야 일어났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어스름하게 해 저무는 시간의 고요함이 좋았다. 붉은 노을과 초록이 퍼지는 색감이 아름다웠다. 힘차게 우는 개구리와 온갖 곤충들의 합창에 든든해졌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다. 아지트를 공유했고 가끔씩 함께 산책했다. 함께 산책하면서 속으로 질문한 것들을 꺼냈다.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왜 가식적이라고 하는 걸까. 진짜 나는 누구인가’ 각자는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는지 대화했다. 내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미지의 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 친구들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였다. 각자 방식대로 치열했고 우리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서툴기에 나눌 수 있었다. 혼자 산책할 땐 노래로, 함께 산책할 땐 이야기로 채웠다. 실컷 울거나 말하고 난 뒤의 개운함은 비슷했다.


‘나’는 별 거 없었다. 내가 비비댈 수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불안에서 조금 편해졌다. 고등학교에서 여러 경험을 하고, 졸업한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함께 산책하던 친구들과 이승환의 노래를 듣던 산책길이 남았다. 지금도 가끔 이승환의 노래를 듣는다. 그때만큼의 감흥은 없지만 아련해진다. 여름밤을 산책하면서 들었던 여러 질문과 풍경이 내 안에 담겨있다.


photo_2017-07-31_20-53-30.jpg 고등학교 입학식. 엄마와 나.



이전 08화1년 동안 쌓인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