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둘러앉은 밤

by 재은

20살이 되고 며칠 되지 않아 인도로 향했다. 불교단체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봉사활동에 한 달간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80명이나 되는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나는 예비 대학생이었다. 신분은 고등학생이었지만 대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으쓱했다. 인도 콜카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쿰쿰한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곳을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의 땀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거리를 거닐면 삐쩍 마른 사람들이 뭔가를 달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봉사활동을 위해 인도 북동부, 부다가야 근처 둥게스와리라는 마을로 향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흙집이 군데군데 이어졌고 흙먼지가 자욱했다. 짐을 끌어안은 채 덜컹거리는 택시를 타고 한참 달렸다. 인도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집에 가고 싶어졌다.


아침 5시가 되면 108배와 명상으로 하루를 열었다. 아침을 먹고 열댓 명으로 조를 나눠 마을별로 움직였다. 우리는 우물에 오물이 들어가지 않게 시멘트로 우물 입구를 무릎만큼 높이는 작업을 했다. 갓난아기를 들춰 업은 꼬마부터 새까만 할아버지까지, 마을 사람들이 우리가 뭐 하려는 건지 궁금한 듯 주변을 에워쌓다. 가끔은 아껴둔 초콜릿을 건네기도 하고 맨발로 다니다가 다친 아이의 발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땀범벅이 되어 숙소로 돌아와도 물이 부족해서 씻지 못했다(인도의 건기는 건조하기 그지없다). 세수만 한 뒤 조별로 모여 오늘 어땠는지 마음을 나눴다.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몸이 힘드니 조장오빠에게 짜증이 났다, 저녁메뉴가 궁금하다 등'을 이야기했다. 하루 동안 변화무쌍했던 마음을 꺼내놓으면 맑은 물에 씻은 것처럼 개운해졌다.


취침 전 전체가 모이는 시간, 캄캄한 강당에 촛불이 듬성듬성 빛났다. 서로 알아야 할 내용을 공유했고 생일인 사람이 있으면 축하를 했다. 마침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은 오빠 생일이었다. 오빠가 소감을 이야기하려 일어서자 다들 한 뜻으로 외쳤다. "노래해, 노래해!" 쑥스럽게 웃으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시작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민중가요였다. 옆에 앉은 언니, 오빠들과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고 한 목소리로 함께 불렀다.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앵콜곡은 '광야에서'였다.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모두들 강당이 떠나가라 목청껏 불렀다.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가 뜨거움으로 가득 찼다.


이후 자주 흥얼거렸다. 한 사람만 흥얼거려도 모두에게 번졌다. 작업하다가 힘에 부치면 노래했고 다시 기운이 났다. 마을 꼬마들에게 한국 동요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이주쯤 지나니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하나 걸리는 건 있었다. 머리를 못 감아서 간지럽다 못해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하얀 가루가 있는 채로 굳어버렸다. "재은아 그냥 깎아. 훨씬 편해" 먼저 삭발한 언니들 꼬드김에 넘어갔다. 바리깡 소리에 맞춰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막 깎은 잔디처럼 까슬거린 느낌이 어색해서 머리통을 만졌다. 너도나도 귀엽다며, 잘 어울린다며 내 머리를 비비댔다. 손톱 길이의 머리털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삭발을 기념하며 해질 무렵 옥상에 둘러앉았다. 붉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구경하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아무 걸림 없이 자유로웠다.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로 바빠지면서 인도에서의 기억을 잊은 지 오래였다. 글을 쓰면서 다시 가고 싶었다. 그 시절에 느낀 감정들이 그리웠다. 지금은 미적지근하고 머물러있는 것 같았다. 다시 간다면 어떨까? 그때 나는 '지금'을 살았다. 눈을 뜨면 시작되는 일상에 온전히 집중했고 별 거 아닌 것들에 충만했다. 매 순간이 흐르듯 이어졌다. 사실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딜 가든 안 가든, 일을 하든 안 하든 지금을 살아야겠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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