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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라떼 Jun 29. 2018

독일 소도시 여행기 1 - 칼프(Calw)

헤르만 헤세의 고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데미안>,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등의 소설을 집필했고,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 사는 내내 끊임없이 인간 심연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독일 남부의 소도시 칼프는 바로 그 헤르만 헤세의 고향이자 그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도 등장하는 마을 초입의 니콜라우스 다리(Nikolausbrücke)에는 헤르만 헤세의 동상이 서있다. 그는 이 다리를 그가 그의 고향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가 사랑했던 고향 칼프,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 위에서 그는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소년 한스가 아닌,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서있었다.  


 



 나는 인근 대도시 슈투트가르트에 묵으면서 칼프에 다녀왔는데, 슈투트가르트에서 칼프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아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30분이면 어느새 헤세의 고향에 도착한다. 마을의 전반적인 풍경은 여느 독일 소도시와 다를 바가 없지만 헤르멘 헤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관광객이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 그러나 내가 갔던 12월 중순에는 겨울이기도 했고, 마침 헤르만 헤세 박물관도 문을 닫아서인지 관광객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문을 연 카페 한 곳에 들어갔다. 어설픈 독일어로 카푸치노 한 잔과 사과주스를 시켰는데 잠시 후 직원이 테이블로 가져다준 것은 카푸치노와 손바닥보다 큰 사과케이크였다. 나는 원래 못 먹을 음식이 나온 것만 아니라면 잘못 나온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온 대로 먹는 편이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했으니 그냥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커피는 맛이 없었고 케이크는 오래된 것 마냥 푸석푸석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또 어떠랴. 나는 케이크가 맛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전부 먹어 치우고는 카페에서 나와 헤르만 헤세의 도시, 칼프를 다시 걸었다. 





 나는 대구 변두리의 어느 작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이웃이 어떤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지, 앞집의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인지, 같은 학교지만 친한 사이는 아닌 아이가 무슨 빌라 몇 동에 사는지, 그 친구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혹은 종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작은 동네였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 동네는 나에게는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나와 친구들은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녔고, 학교가 끝나면 해 질 녘까지 동네 놀이터에서 매일같이 놀았으며, 동네 밖을 벗어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세가 니콜라우스 다리를 고향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라고 말했듯 나에게도 우리 동네 중에서도 내가 유난히 사랑하는 장소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살던 집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에 건너가야 하는 작은 다리나(비가 오면 잠겨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산책하러 자주 갔었던 집 근처 저수지라던가 혹은 친구들과 많이 걷곤 했던 동네 뒤쪽 논두렁을 따라 나있는 흙길 같은 장소들 말이다. 

그리고 그 장소들을 떠올리면 공간 그 자체뿐 아니라 어린 시절 겁은 없고 꿈은 많던 나의 모습과, 한때는 정말 친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멀어진 친구들과, 또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낼 수 있을 것 같던 어린 시절의 용기 같은 것들이 함께 떠오른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데 언제 이렇게 멀어져 버린 걸까. 큰 비가 내려서 잠겨버린 다리 위를 겁도 없이 헤엄쳐 건너려던 8살 어린아이는 어느샌가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 살 지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다른 지방의 대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해외를 자주 떠돌아다녔으며, 학교를 졸업한지도 이미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다. 스무 살이 된 이후로는 줄곧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물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삶이 좋아서 그렇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 대한 향수만큼은 쉽게 떨쳐지지가 않았다.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던 저녁 무렵 그 골목길을 서른의 문턱에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라고 추억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면,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일상 중 하나인 것 같은 어떤 순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한 추억으로 변해있는 경험을 종종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당시에 내가 오랜 시간 뒤에 이 순간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는 어쩌면 일상은 매 순간이 마치 마법 같아서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만끽하며 살다 보면 나중에는 그 모든 순간들이 선물이 되어서 돌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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