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로 잠시 물 밖으로 나왔다가 이내 가라앉길 수차례, 서울이라는 곳에서 도망쳐 시골로 내려오면서 밟은 땅. 가족이 있는 안정적이고 탄탄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게 되면서, 그 뒤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언제까지도 어디까지도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던 '엄마'라는 존재가 무너지면서 밟고 있는 이 땅이, 정착한 이 섬이 통째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신애는 지울 수 없었다.
신애는 약봉투에 담긴 알약들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이든 나를, 아니 엄마를 구해줄 수 있다면. 자신을 살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약을 복용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변화가 생겼다.
"나, 요즘 확실히 짜증을 덜 내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신애는 들떠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그러한 신애의 변화에 신기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신애 몰래 그녀의 방에서 약봉지 하나를 챙겨 남편과 함께 동네 병원에 가서 이 약이 괜찮은지 물었다. 신애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떤 약이든 부작용이 있어. 오래 먹으면 안 좋아."
"엄마, 전문가는 의사 선생님이야.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지."
신애는 의사 선생님도, 변화를 준 약도 전적으로 믿었다. 예민함이 줄어들면서, 질투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불안한 상상도, 극단적인 감정변화도 많이 좋아졌다.
"졸려."
하루종일 잠을 잤다. 아침 산책 후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잘 때도 허다했다.
"약 때문인 것 같아, 아무래도."
"의사 선생님한테 말했는데, 약 때문 아니래. 봄이라 그래."
그도 그럴 게 신애는 해야 할 일이 없으면 한없이 늘어지곤 했다. 약을 먹기 전에도 잠은 많았다.
"우울하면 잠이 많대."
그냥 그런 줄 알고 지냈다. 집에 내려오고 10kg가 쪘다. 인생 최대 몸무게를 갱신했다. 먹고 자니 배가 나왔다. 목 뒤에 살인지 뼈인지 뭔지 모를 게 불룩 튀어나왔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버섯목증후군이란다. 거북목이 심해지면 생기는 거란다. 엄마는 신애의 볼록 나온 목 뒤를, 배를 쿡쿡 찌르며 한숨을 쉬었다.
"신애야, 어쩌려고 그래."
"뭐가."
"이거(거북목, 배) 어떡할 거야, 이거!"
"몰라."
엄마는 충격이라고 했고, 신애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이 관심이 없었다.
"니 몸인데 걱정되지도 않아?"
"응. 별로."
신애는 웃음으로 넘어가려는 듯 헤헤하고 웃었다. 엄마의 한숨소리만 커져갔다.
일이 생기면 일을 하고, 저녁 모임에 나가고, 하루에 한 번 강아지들 산책을 했다. 가끔씩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기가 되면, 운동을 했다. 하지만 다시 '무기력'은 돌아왔다. 약을 꾸준히 먹는 한 죽고 싶은 생각은 거의 들지 않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회사 다닐 때 들었던 연금을 개인사업자가 되면서 끊어버렸다. 당장 하루하루 살 생각이 우선이었지, 먼 미래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할머니가 된 자신의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고, 엄마도 가족들도 없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엄마 장례는 치러드려야 하니까, 3일 뒤에 죽으면 좋겠다. 아니면 한 날 한 시에 죽는 건?'
철없는 생각에 엄마는 불효라고 말했다. 아빠는 신애에게 항상 '철없는 딸아'라고 말했다. 신애는 이미 삼십 대가 되었지만, 어른이 되기 싫었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이를 먹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