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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Dec 25. 2023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부 다른 사람이고 결국 같은 사람





가장 선명한 성탄절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나는 어느 경로당에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이 다니던 S 교회 성도들과 함께.



대개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이벤트를 연다. 노래하고 춤추고 인형극을 하고 별의별 장기자랑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진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나 홀로 집에> 케빈처럼 낭만적인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못하는 것도 서러워 죽겠구만, 심지어 연예대상 시상식도 보지 말라고? 교회에 갇혀서 재미없는 남들 재롱잔치만 봐야 하는 게 고역이었다. 이해가 안 됐다. 예수님 탄생 축하하는 거랑 지들끼리 웃고 떠드는 거랑 뭔 상관이람. 그땐 화가 많았다. 특히 말과 행동이 다르고 앞과 뒤가 딴판인 한국 교회의 행태는 질풍노도 고딩에게 그저 경멸의 대상이었다.



S 교회는 좀 달랐다. 정확히는 L 목사님이 달랐지. 그녀는 내 의견을 귓등으로 넘기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예수님 탄생을 제대로 기념하려면 그날만이라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우리끼리 먹고 마시고 놀아요. 도움 필요한 사람들 널리고 널렸을 텐데. 불만을 토하듯 던진 말이다. 유의미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진지했고, 고민했고, 곧 통보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교회 밖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독거노인분들을 만나 준비한 선물과 음식을 나눴다.






그날 이후로 가끔 생각했다. ‘해피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에 담긴 풍경은 어느 하나 같은 게 없다고.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는 크리스마스도, 호텔 바에서 위스키와 와인을 홀짝이는 크리스마스도, 홀로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는 크리스마스도, 클럽 무료입장 시간에 들어가 새벽까지 죽치며 빵댕이 흔드는 크리스마스도, 집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귤 까먹는 크리스마스도,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절대 사수해야 하는 마감날일 뿐이라는 크리스마스도 있다. 그리고…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가장 잔인한 날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특별한 이유는 이걸로 충분하다. 당신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 다르고, 나의 불행 역시 당신의 불행과 같지 않다는 진실을 일깨워 주는 날. 그럼에도 우리는 나란히 함박눈을 맞으며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날. 우리는 전부 다른 사람이고 결국 같은 사람이다. 이제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예수가 내게 선물한 이 마음만큼은 여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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