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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13. 2024

미련과 후련 사이

봄 12

이삿짐 싸는 일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책과 옷 몇 벌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11년 결혼 생활이 남긴 묵은 살림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삿날을 정한 직후부터 틈틈이 책과 옷을 정리하고 수납장의 안 쓰는 살림 도구들을 내다 버렸는데도 왜 이리 손댈 곳이 많이 남은 건지. 특히 베란다 한쪽 끝을 점령한 캠핑 장비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택배 상자를 모아 옷과 살림 도구를 차곡차곡 담았다.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 짐은 커다란 쇼핑백과 비닐봉투에 넣었다. 이사까지 남은 시간은 2주. 시간은 충분했으나 문제는 체력이었다. 서너 시간 짐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금방 피곤해졌다. 두툼한 면장갑을 벗지도 않고 먼지가 뒹구는 거실 바닥에 잠시 누웠다가 깜빡 잠들기도 했다. 피로가 쌓일수록 짐 상자도 늘어갔다. 거실 한쪽 벽 전체가 상자로 가려지는 걸 보면서 곧 다가올 이 공간과의 이별을 드디어 실감했다.


어느 아침, 남편이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오늘 출근 안 해?

- 몸이 안 좋아서 반차냈어.     


점심 무렵 출근한 남편은 술을 마시고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그때부터 남편 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같이 산 11년 동안 감기에 걸린 게 두세 번일 정도로 남편은 건강 체질이다. 그의 아픈 모습이 낯설어서일까. 기침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잠귀가 어두워 웬만한 소음에도 잘 자는 나였지만, 게다가 알바와 강의와 이사 준비로 체력이 바닥나 침대에 등만 대면 잠이 들곤 했지만, 남편 방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콜록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한참 몸을 뒤척였다. 방문을 닫고 싶어도 고양이들 때문에 그럴 수 없으니 그 밤은 꽤 괴로웠다. 남편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술에 취한 채 늦게 들어와 기침을 했다.     


이사를 일주일 앞둔 날, 강의가 없어 온종일 주방 수납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라면이나 국수, 캔 등 가공식품과 미역, 건표고 같은 마른 먹거리들을 나는 늘 여러 개 사서 쟁여두었다. 그래서 식재료를 넣어두는 서랍은 늘 빈 곳이 없었다. 남편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고 라면이나 캔도 거의 먹지 않으니 내가 먹든, 버리든, 가져가든 해야만 했다.     


아껴 먹다가 유통기한을 넘긴 크림소스 연어 통조림, 너무 매워서 먹지 못한 국물 라면, 선물 받은 색색깔의 파스타 면... 그동안 아까운 생각, 죄짓는 듯한 기분 때문에 처리하지 못한 것들. 캔을 열고 봉지를 털어 묵은 것을 버리고 서랍을 비워가니 묘한 쾌감이 올라왔다. 어차피 버릴 거, 진작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 이 수고를 안 할 텐데. 미련 없이 버리고 후련하게 살 걸.     


그러나 이런 기분도 잠시. 오래된 것들을 들출 때마다 지난 삶도 함께 딸려 왔다. 맥주 안주로 통조림 먹으며 그와 이런 이야길 나눴었지, 둘이 며칠 여행 다녀온 날 매운 라면에 열무김치 먹으며 느끼한 속을 달랬었지...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추억마저 버려질 것 같아 자꾸만 손이 느려졌다.     


어느새 서랍 마지막 칸만 남았다. 맨 아래 유통기한이 지난 국수를 들어내니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뭔가가 보였다. 제주순메밀국수. 2020년 제조, 사용기한은 2022년. 메밀 100퍼센트 꽤 비싼 면이라 아껴둔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4년 동안 그곳에 있었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것.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바닥의 존재들.


순간 툭 눈물이 터졌다. 나는 남편의 기침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게 아니다. 그가 이혼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이곳저곳이 비워지고 상자가 쌓여가는 어수선한 집안에서 그라고 어찌 마음이 편했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건강과 마음 상태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지금은 내 감정, 내 할 일만으로도 무너지도록 힘드니까. 내가 겉으로나마 의연하게 갈 길을 가려 애쓰듯 그도 약해진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래 줄 순 없을까? 이제 일주일만 참으면 끝인데. 마지막까지 바닥에 남을 미련 같은 건, 끝까지 서로에게 들키지 말아야지.     


다행히 남편은 곧 기력을 되찾았다. 다음 날, 모처럼 일찍 들어온 그의 손에 참외 봉지가 들려 있었다. 모른 척하고 방에 들어와 책상을 정리하는데 그가 “참외 먹을래?” 했다. 나가보니 싱크대 앞에 서서 참외 껍질을 정리하고 있었다.     


- 이제 껍질도 바로바로 치우네?

- 나 원래 잘 치웠어. 몰랐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가 장난스레 눈을 찡끗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엔 껍질을 벗긴 뽀얀 참외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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