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13
일요일 오후. 몸은 편의점에 왔지만, 생각은 아직 집에 머물러 있다. 이사가 다가올수록 할 일도, 신경 쓸 것도 많아진다. 온갖 사이트를 돌며 주소 이전도 해야 하고, 전기세와 가스요금 등 명의 변경과 동시에 자동이체도 해지해야 한다. 오직 아파트 관리비 이체를 위해 개설한 통장과 카드는 아예 없애기로 했다. 월요일 오전 강의 끝나고 은행에 들르면 되겠지. 또 뭐가 있더라...
머리를 많이 써서인지 자꾸 배가 고팠다. 5시부터 6시까지는 잠시 매장이 한가한 시간대다. 이때 재빨리 밥을 먹어야 한다. 잠시 후부턴 손님이 줄을 설 테고 저녁 물류도 들어오기 때문에 자칫 때를 놓칠 수 있다.
매장 출입문을 살피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반찬은 생 오이와 맛간장을 뿌린 두부. 젓가락 없이 숟가락만으로 떠먹을 수 있고, 냄새가 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 도시락 준비에 시간이 들지 않으면서도 내 입맛에 맞으니 이래저래 좋다.
밥 한 술에 두부 한 조각을 입에 막 넣었을 때였다. 출입구에 매달린 종이 ‘댕그렁’ 울렸다. 희한하게도 손님은 꼭 이렇게 중대한 순간에 등장한다. 별 수 없이, 벗었던 마스크를 얼른 다시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서 오세요.
눈앞에 회색 옷을 입은 중년의 스님이 한 분 서 계셨다.
- 안녕하신가요. 시주 좀 해 주시지요.
스님은 동그랗고 선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본 후 두 손을 합장한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얼떨결에 인사를 또 했다. 나는 무교다. 그래도 타계하신 법정스님을 한때 좋아했고 여전히 존경심을 품고 있다. 금욕을 실천하고자 자선에 기대는 탁발 수행의 의미도 평소 높이 사 왔다. 3천 원쯤 시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내겐 현금이 없었다. 물론 바로 옆에 현금출납기가 있으니 체크카드로 돈을 뽑아도 된다. 하지만 내 입에는 이제 막 넣은 밥과 두부가 가득 들었고, 나는 이것을 포함해 나머지 도시락통의 음식을 어서 씹어 삼키는 게 중하다. 손님이 뜸한 이 시간이라면 특히나 더욱.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 저, 죄송한데 지금 가진 현금이 없습니다.
-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스님은 이런 거절이 익숙하다는 듯 금방 알겠다며 물러섰다. 다시 밥을 먹으려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스님이 밖으로 나가는 대신 에너지바와 초콜릿이 진열된 곳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서 한참 서 있는 모습을, 나도 선 채로 바라봤다.
그가 다시 내게 걸어왔다.
- 교통카드로도 물건을 살 수 있지요?
당연히 살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교통카드 충전만 할 줄 알았지 그걸로 결재까지 가능한 줄은 몰랐다. 인수인계 당시 찍은 영상에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 교통카드에 얼마 남았는지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오, 그건 나도 할 수 있다. 그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걸 단말기에 올리려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내민 카드에 분홍색 헬로키티가 그려져 있었던 거다. 스님과 헬로키티라니,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스님이라고 해서 헬로키티를 좋아하지 말란 법이 없는 데도 머릿속으론 자꾸 둘의 관계를 따져 보고 있었다.
- 860원 남아 있네요.
그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곧바로 뒤를 돌아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에너지바를 두 개 집어 왔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또 다른 카드를 꺼냈다.
- 이거 체크카드인데, 이거랑 교통카드 합하면 돈이 될 거예요.
사용 흔적 많은 이 분홍 헬로키티 카드의 잔액을 모조리 쓰시겠다는 스님. 나는 어쩐지 이 카드가 스님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생겼다. 스님의 교통카드라면 충전을 하지는 못할망정 잔액을 다 쓰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카드는 주운 것이라고! 금욕을 실천해야 하는 스님께서 학생의 카드를 줍다니, 그걸로 에너지바를 사려하다니. 이건 떳떳하지 못한 일 아닌가?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고 스님께 말했다.
- 죄송해요. 제가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교통카드로 계산하는 법을 몰라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일단 시간을 벌어볼 요량이었다. 포스기 화면을 구석구석 살피며 뭘 눌러야 할지 찾고 있을 때였다. 댕그렁, 종이 울리더니 중년 남성이 매대로 걸어왔다. 스님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섰다.
- 골드 담배 하나.
- 저... 골드가 뭐죠?
- 아, 말보로 골드 있잖아!
- (에쎄 골드도 있거든(요)!!)
이어서 젊은 남자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와 맥주를 한가득 바구니에 담아왔다. 다음엔 어린이 셋이 매대 앞에서 츄파춥스를 한참 골랐다. 스님은 다시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순서상으론 스님의 에너지바를 먼저 계산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난 계산할 줄 모르고, 하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다시 댕그렁 종소리가 들렸을 때, 스님은 에너지바를 제자리에 두고 매장을 떠났다.
- 휴...
스님이 더 버티지 않아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10분이 지나 있었다. 고요해진 매장 안에서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이 밥을 먹어야 밤까지 일할 수 있으니. 그러면서 계속 스님과 헬로키티의 부조화에 대해 생각했다. 참 웃기지. 스님을 좀 더 비웃으며 오이를 씹었다.
무사히 도시락을 비웠다. 중요한 미션을 마쳤으니 일을 할 차례다. 조금 전 손님이 잔뜩 사 간 맥주를 채우려고 워크인으로 향했다. 스님이 쥐었다 내려놓은 에너지바 매대를 지나갔다. 스님도 배가 고프셨을까? 그러고 보니 스님 입장도 조금 이해가 갔다. 그래, 배가 고프면 그럴 수도 있지. 스님도 밥을 드셔야지, 사람인데. 스님, 밥, 사람... 그러네. 스님도 때가 되면 배고픈 사람이었지.
근데 잠깐. 헬로키티 카드가 스님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가? 주웠다는 근거가 뭐였지? 갑자기 여러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카드가 스님의 손에 들어갈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내가 결코 짐작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그 많은 가능성들이 빗줄기 쏟아지듯 나를 막아섰다. 아득한 막막함을 느꼈다.
당시 나는 1600원을 860원과 740원으로 나눠 계산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 앞에 있었다. 교통카드 하나로 결재할 줄도 모르는데 카드 두 개를 사용하는 법은 더더욱 알 리가 없었다. 점장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지만, 택배 사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물어보기 싫었다. 무엇보다 어서 빨리 밥을 해치우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스님은 내 편의상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나는 헬로키티라는 조잡한 근거를 끌어들였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라도 결재를 해야 마땅했으나 나는 오히려 스님을 탓하며 매장 밖으로 밀어냈다. 업무 미숙 알바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지른 미성숙한 대처에 스님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아무 탓도 안 하고 조용히 떠나준 것이 부처님의 커다란 품을 보여준 것 같아서 미안함과 감사함이 몰려왔다. 나를 비웃게 만들었던 뻔뻔한 가짜 스님은 이번엔 진정한 불자가 되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집에 가자마자 유튜브에서 교통카드로 계산하는 법을 검색해 몇 번이나 반복해 봤다. 다음날 밥을 먹을 땐 에너지바와 헬로키티가 저절로 떠올랐다. 나 때문에 배고프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며칠 후 길을 지나다가 내가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매장에서 바로 길을 건너면 편의점이, 거기서 100미터쯤 가면 또 다른 편의점이, 길 곳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스님은 나의 냉대를 뒤로하고 곧바로 다음 편의점에 들어가 능숙한 직원 앞에 에너지바 두 개와 카드 두 개를 당당히 내밀었을 거다. 교통카드 잔액은 물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왜 그걸 이제야 알았지? 하나의 생각에 꽂히는 게 제일 미련하고도 무서운 일이라고 입으론 말하면서 정작 내가 그런 줄은 몰랐다. 세상엔 편의점이 많고, 헬로키티를 좋아하는 스님도 있다는 걸, 나는 언제쯤 제대로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