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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06. 2024

마음에 묻은 말

봄 11

한낮인데도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틈바구니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다섯 번쯤 하고서야 겨우 전화를 끊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점장 말에 의하면 편의점에서 취급하는 택배엔 일반과 할인이 있다. 일반 택배는 택배 회사 직원이 가져가고, 할인 택배는 편의점 물류 기사님이 가져간다. 그 두 가지를 잘 구분해 정해진 자리에 둬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었는데,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거였다.     


일주일 내내 그렇게 영상을 보고 또 봤는데 내가 놓친 게 있었던 걸까. 물론 영상 속 내용을 완벽하게 익힌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 택배에 대한 내용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손님이 믿고 맡긴 택배를 못 찾으면 어쩌나, 택배에 급하고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면, 그래서 고객에게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면 나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이 폭발할 것처럼 마구 뛰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아야 책임을 지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차근차근 다시 핸드폰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점장 말대로 그는 분명히 두 가지 택배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러나 내용은 그가 주장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일반 택배는 고객님들이 알아서 보관함에 넣기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돼요. 우리는 ‘할인 택배’를 손님이 가져온 것과 손님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만 각각 구분해서 선반이랑 바구니에 올려두면 돼요. 이거 섞이면 진짜 큰일나요. 알았죠? 이거 정말 구분 잘하셔야 돼요!”


점장은 분명히 ‘일반 택배’엔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가뜩이나 외우고 익혀야 할 정보가 넘쳐 힘든데 나의 뇌가 이걸 기억하지 않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나는 점장이 말한 ‘벽쪽 보관함’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점장이 내게 그 보관함을 보여줬다면 영상에 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 업무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점장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 크게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점장에게 내가 찍은 영상을 보내볼까. 아니면 문자로 조목조목 따질까. 글로 쓰는 거라면 자신있는데. 그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억울함을 항변하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정신차려라”고 호통을 치려면 적어도 내 잘못임이 분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여도 되는 걸까. 그것도 이제 겨우 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한테.


어떻게 따질까.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도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온종일 이 일에 신경을 쓰느라 머리도 아프고 뱃속까지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편히 쉬어도 시원찮을 판에 나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천천히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의 의견과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는 누구인가. 남편, 그 사람이다. 평소 말이 없고 진중한 성격인 그는 화르륵 쉽게 달아올랐다 금세 꺼지는 행동파인 내가 뭔가를 선택하기 전 조언을 구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제안은 꽤 적절해서 더 큰 감정 소모를 막거나 복잡한 상황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오직 나와의 갈등을 가장 이해하고 풀어내기 어려워했다.


그날 계속 그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는 내 얘기를 묵묵히 다 들은 후 평소처럼 가볍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슬몃 보탤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그만둘 때가 됐다. 이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게다가 그다음 주엔 가정법원에 협의이혼 서류를 내기로 하지 않았나.


그라면 내게 어떤 말을 건넬까.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그와의 대화를 상상해 보았다.


- 거기서 계속 일 할 거야?

- 그럼, 당연하지. 내 나이에 어디 들어갈 데도 없잖아.

- 너 앞으로 실수 안 할 수 있어?

- 아니! 어떻게 실수를 안 해. 편의점 일이 얼마나 복잡한데. 아직 모르는 거 천지야.

- 그럼 점장한테 따져봤자 너한테 좋을 게 뭐 있냐. 이번엔 점장 잘못으로 치더라도 다음에 실수하면 더 심하게 뭐라고 할 텐데.

- 그런가? 오, 정말 그렇겠네…


그래, 나를 위해 그냥 가만히 있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억울함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점장의 사나운 말들은 마음에 묻어 두기로 했다. 상상  남편과의 대화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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