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10
지금 내 앞의 이 눈빛들.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몇 해 전 초등학교에서 3, 4학년 아이들 네 명과 글쓰기 수업을 했던 날.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점으로 찍고 연결해 인생 곡선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늘 정신없던 아이들이 그날따라 얌전해서였을까. 나는 미리 그려놓은 내 인생 곡선을 예시로 보여주다가 웬만해선 입 밖에 꺼내지 않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빠에게 대들다가 크게 혼났던 일을 아이들 앞에 툭 내놓았다. 스무 살 이전까지의 삶에서 맨 밑바닥을 찍을 만한 부끄러운 가족사였다.
말을 해놓고 내가 더 놀랐다. 까불이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야기 속의 중학생 아이가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하는 표정들. 여리고 슬프고 따뜻한 그 눈빛들에 감동해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다 큰 어른이 아이들 앞에서 울다니. 얼핏 생각하면 코미디 같지만, 지금도 이따금 그 얼굴들이 떠오를 때면 눈물이 핑 돌면서 마음에 힘이 생기곤 한다.
지금 이 강의실에서 다시 그 눈빛들을 본다.
“한 주 잘 보내셨나요? 사실 저는 좀 피곤한 상태예요. 지난 주말에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거든요...”
알바, 이혼, 이사 이야기를 이어 가는 사이 강의실의 빈자리가 하나둘 채워진다. 분위기는 무거운 듯하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말한다. 한부모 가정으로 아이를 키워온 자신의 삶을. 또 한 사람이 말을 받는다. 결혼하지 않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상을. 침묵하던 어떤 이가 속삭인다. 저도 알바 알아보는데 자꾸 떨어져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자꾸 침을 삼킨다. 그러지 않으면 그날처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울어도 되지만, 오늘만큼은 웃고 싶다. 연민보다는 공감을 원하기 때문에.
몸의 피로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해지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수강생들이 써온 글을 집중해 읽었고 투박한 문장 속에 숨어든 그들의 진심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인사하는 내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순해져 있었으리라.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하늘과 햇볕은 똑같이 밝고 환했다. 느티나무도 싱그러웠다. 그러나 나는 꽤 달라져 있었다. 시원했고, 편안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되겠지. 새로운 삶으로 드디어 첫발을 뗀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점장이었다.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그냥 씨! 어제 손님한테 택배 받은 거 있죠? 그거 어디에 뒀어요?”
“아.. 그거 택배 바구니에 잘 뒀는데요?”
“그걸 거기에 두면 어떡해요! 벽쪽 보관함에 갖다 놔야지! 택배가 잘못 갔잖아요. 그거 어떻게 찾을 거예요? 정신 똑바로 안 차려요,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점장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만치 지하철이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