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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27. 2024

다 말해버리자

봄 9

처음으로 토, 일 연속으로 일한 다음 날. 하필이면 월요일 아침 10시에 강의가 잡혀 있었다. 알람은 울리는데 눈은 계속 감기고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피로가 풀릴 리 없으니 몸은 천근만근. “읏차”하는 작은 기합으로 침대에 들러붙은 등을 겨우 떼어 냈다.     


강의실로 이동하는 전철 안에서 맞은편 유리창에 비친 내가 보였다. 도무지 아침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금요일 밤 막차 타고 귀가하는 직장인의 낯빛이 이러하지 않을까.   

  

이날 강의는 한 중학교의 학부모 독서 동아리 대상 글쓰기 수업이었다. 전체 7차시 수업 중 이미 두 번을 진행한 상태였다. 수강생들이 대부분 내 또래여서 그런지 친근감이 들고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날 아침엔 기분이 달랐다. 편의점 알바에서 강사로 모드 전환이 안 됐달까. 기분이 가라앉아 수강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인사로 수업을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몸으로, 이런 기분으로 수강생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웃을 수 있을까. 강의하러 가는 마음이 이랬던 적이 없는데...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키 큰 느티나무가 늘어선 공원을 지나야 한다. 그날따라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선명하게 예뻤다.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빛이 스며드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날씨 때문인지 햇빛 덕분인지,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금 기분이 착 가라앉은 이유가 단지 피곤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수강생들이 내 피곤한 기색을 알아채고 이유를 물어볼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대답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뭔가가 까발려질지도 모른다. 그들이 모르길 바라는 내 상황이란 무엇인가. 이혼? 어느 정도는 맞지만, 핵심 이유는 아니다. 나는 어려운 경제 사정을 들키기 싫었던 것 같다. 먹고 살 염려 때문에 편의점 알바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노동을 하는 나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토록 무능한 무명 작가에게서 앞으로 남은 다섯 번의 강의를 계속 듣고 싶어 할까.     


복닥거리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서는데 주차장 쪽에서 동아리 회장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 지난주에 책임감 강한 장녀로 사느라 팍팍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글로 써냈지.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당당히 드러낼 줄 아는 이라면 지금 내 사정도 이해해 줄 지  모른다. 그의 옆자리에 앉는 단짝 친구는 또 어떻고. 늘 남을 먼저 챙기는 사려 깊은 그가 내게 실망하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내 걱정은 어쩌면 지나친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냥... 말해버릴까.’


어차피 수강생들이 다 모일 때까지 나는 바람잡이처럼 썰을 풀며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내야 한다. 화장도 안 하고 다니는 내 얼굴에선 피곤한 티가 팍팍 날 테고, 지금 내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건 편의점에서의 장면들이고, 난 그 장면들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들 빙빙 겉돌 게 분명하지. 피로와 경계심에 잔뜩 예민해진 에너지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야기를 해버리자. 각진 마음을 허물어 버리자. 나는 지금 이혼하는 중이고, 곧 이사를 할 예정이고, 그래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난 주말 편의점에서 첫 근무를 했다고. 나는 이혼을 앞둔 편의점 시간제 노동자라고.


학교 현관으로 들어서는 동아리 회장의 뒤를 쫓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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