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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y 21. 2021

아빠는 배크맨이야

힘이 이 정도 생겼어.”     


새로 지급받은 업무용 노트북에는 신기한 기능이 있다. (LG와 삼성 중 삼성 노트북으로 신청했더니) 마우스패드로 무선충전이 된다.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펑션 키를 누르고 배터리 모양이 그려진 F11 키를 함께 누르면 마우스패드에 무선충전 기능이 활성화된다. 옆자리 차장님도 신기해하자 나는 이게 뭐라고 으쓱하며 펑션을 해제하고 다시 활성화했다. 마침 사용하는 핸드폰도 갤럭시, 이어폰도 버즈였다. 신기한 마음에 핸드폰도 올려보고 이어폰도 올려봤다. 생각보다 충전 속도도 빨랐다. 13인치 노트북 치고는 꽤 넓은 마우스패드 위에서 핸드폰 화면의 숫자가 100을 향해 하나씩 올라갔다.


띠로롱 완료 소리와 함께 건조기 작동이 끝났다. 베란다 문을 열고, 건조기 입구를 열어 방 안으로 빨래를 가득 꺼냈다. 뜨거운 김이 확 안경을 덮친다. 넣을 땐 탈수로 쪼그라들었던 빨래들이 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거실에서 놀던 첫째가 어느 순간 달려와 빨래 더미 위로 점프를 했다.

“아, 따뜻하다.”

잠시 누워있던 아이는 배꼽을 손으로 가리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힘이 이 정도 생겼어.”

뜨거운 방바닥에 지지는 게 좋은 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일까. 아이는 무선충전 패드 위에 놓인 핸드폰처럼 한참을 누워있었다.


요즘 저녁마다 첫째가 힘들다는 투정을 종종 한다. 몸이 힘들다는 얘기겠지. 아이의 하루 일정은 7세의 사회생활치고는 제법 터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사교육에 관심과 열정이 없어서 다른 집 아이들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잘 모르지만) 어린이집,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을 매일 오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따님의 정규교육과 사교육 일정을 마치면 저녁 6시가 된다. 퇴근 후 목격하는 아이들의 상태를 보면 배터리가 방전까지 한참 남은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 다리에 매달려 바깥 활동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자식놈도 점점 사람이 되어 가고 있구나 느낀다.


그래도 (아내의 전언에 따르면) 아침에는 벌떡 일어나서 친구들 만나러 우다다다 어린이집으로 뛰어간다고 하니 배터리 효율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아이가 빨래 더미 위에서 조금 더 누워있도록 해줄까 망설였지만 이내 아이 밑에 깔린 수건을 빼내 아이를 방바닥으로 굴려버렸다.



엄마, 내가 보여요?”     


둘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내가 보여요?”      

전후 맥락을 모르니 둘째가 저 대사를 왜 날렸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솔직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아내도 잘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며 아이를 지켜봤다. 결론은 여전히 모르겠다.


5세 시즌을 보내고 있는 둘째는 이제 슬슬 다른 이에게 본인이 ‘보인다’는 의미를 알아가는 것 같다.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어린이집 휴원일이 많아서 사실상 거의 집에만 있었는데, 올해는 그래도 어찌 저찌 꾸역꾸역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진 것 같다(는 추측이다).


외출을 준비하면 혼자 옷장을 열고 잠바를 꺼내어 옷걸이만 다시 걸어 놓는다. 꺼내는 잠바가 때에 따라 다르다. 트렌치코트 타입의 잠바, 노란색의 등산복 같은 잠바, 체크 패턴의 블루종 스타일의 잠바 등 그때그때 본인이 입고 싶은 잠바가 있는 듯하다. 어제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데 더울까 봐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겼더니 다시 입히라고 떼쓰며 드러눕기도 했다.


이제 둘째의 의사도 존중해 드려야겠다. (그런데 왜 다른 아이들을 밀고 다니니......)



"아빠는 배크맨이야"


언제까지 동요 속 아빠 곰은 뚱뚱해야 하는가. 숱한 의문을 가진 질문이지만 나도 점점 스테레오 타입의 아빠 곰이 되어가고 있다. 매년 이전보다 한 치수씩 큰 바지를 사며 ‘올해는 꼭’이라는 다짐을 하지만 그 꿈은 연금복권 당첨보다도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아빠는 배가 크니까 배크맨이야.”

내 배 위에 머리를 두고 누워있던 자식놈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뭐가 갑자기 웃겼을까. 순식간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건강검진 결과표마다 ‘비만’이라는 결과가 적힌, 부인할 수 없는 의료기관 공인 비만인으로서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짐짓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잊고자 아이의 조어 능력에 집중해 감탄하고자 노력했다.


배크맨이라니. 배트맨도 아니고, 배가 커서 배크맨이라니. 혹시 아이가 보는 유튜버들이 쓰는 단어인가. 고인물답게 유튜브 말고 네이버에 ‘배크맨’을 검색하니 ‘배트맨’으로 검색한 결과를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중요한 홍보업무를 할 때 나는 이 정도 창의력이 없었는데, 아이는 너무 쉽게 말을 만들었다. 베고 누운 아빠의 배가 넓고 푹신하고 꿀렁거려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아빠에게 수치심을 주다니...... 뺀다. 살. 아빠가.


목욕을 시키고 겨우 아이들을 재웠다. 어둠 속에서 배크맨은 가만히 아이들 배 위에 귀를 댔다. 첫째의 배 위에, 둘째의 배 위에 번갈아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일정 간격의 박동 소리가 들린다. 별다른 신체 활동이 없는 상황에서 성인의 평균 심박수는 분당 70회 전후라고 한다. 반면 신생아는 140~150 bpm 수준이 평균 심박수라고 한다. 심장이 뛰는 속도는 아이가 크면서 점차 줄어든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종종 심장 소리를 들어보는데 정말 그랬다. 이렇게 빨리 뛰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마치 힘껏 달리기를 한 사람 같았다. 이전 심박은 ‘당당당당당’이었다면 첫째는 제법 어른에 가까워져 ‘당-당-당-당-당’ 정도로 속도가 줄었다. 둘째도 제법 어린이가 됐는지 심박수 속도가 줄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잘 크고 있나 보다.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나 보다. 안도한 배크맨은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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