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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30. 2021

노란띠를 꿈꾸는 아이

4월. 우리 회사 임직원들에게는 평가의 계절이다.(일본식 회계연도 방식의 흔적 같은데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어쨌든 4월부터 평가에 따른 새로운 급여가 적용된다) 평가를 없앤 회사, 직원들을 절대평가하는 회사, 평가가 필요 없는 회사, 동료들이 평가하는 회사 등 여러 방향으로 평가기준이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회사들이 성과를 기준으로 직원들을 평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학창 시절 등수로 세세하게 나뉘던 평가가 알파벳 등급으로 덩어리 져 나뉜다는 것 정도일까. 

    

여러 회사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대체로 직원 평가는 S, A, B, C 등급으로 나뉜다. (경우에 따라 D 등급이 추가돼 5단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10년 차 직장인으로서 지금까지 9번 평가를 거치며 그야말로 모든 등급을 받아봤다. 어느 해는 D 등급과 함께 인사평가 경고를 받아 연봉이 10% 삭감되기도 했고, 또 어떤 해에는 S 등급을 받고 연봉의 10%를 성과급으로 받기도 했다. 연차가 낮을 때는 그 알파벳이 뭐라고 마음고생도 많았다. 연봉이 깎인 해에는 월급날마다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우울했고, (하필 결혼한 직후라 저절로 ‘능력 없는 가장’ 코스프레가 가능해졌다.) 좋은 평가로 월급이 올랐을 때는 소고기도 턱턱 사 먹으며 씀씀이도 덩달아 넉넉해졌다. 10년 정도 다녀보니 평가는 내가 잘한다고 얻는 것도, 내가 못한다고 잃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알파벳 하나에 일희일비했다. 사실 지금도 의연해진 척 표정 짓지만 여전히 알파벳에 신경이 쓰인다.   


큰아이가 얼마 전부터 태권도 학원을 다니고 있다. 어린이집에 도복을 입고 와 “태! 권! 도!”를 외치며 주먹을 내지르는 남자아이들이 부러웠나 보다. 집에서는 아무래도 활동량이 적기 때문에 팔다리라도 열심히 휘두르고 오라는 생각에 집 근처 태권도 학원을 끊어줬다. 며칠 다니고 심드렁해지겠지 생각했는데 아이는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는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으로 달려갔다. 집에 와서도 앞차기, 옆차기, 아래막기, 정권지르기 등 그날 배운 동작을 시키지 않아도 연습했다. 통통하던 체중도 줄었다. 퇴근이 이른 날에 학원으로 직접 데리러 가곤 했는데 존댓말로 “사범님, 안녕히 계십시오!” 외치며 인사도 잘하고 씩씩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권도를 배운 지 3주 정도 지났을까. 학원에서 승급심사가 있었다. 큰애를 제외한 다른 흰띠 아이들은 학원에 다닌 지 한 달이 지나 승급심사 자격이 주어졌고 자랑스럽게 노란띠를 받았다. 내 아이만 승급심사를 보지 못해 혼자 멀뚱히 심사장에 앉아있었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허리에 노란띠를 매고 집으로 향했지만 내 딸만 흰띠를 맨 채 집으로 왔다. 현관을 열며 웃는 표정으로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다른 친구들은 노란띠를 받았어!”

잠시 뜸을 들이고는,

“(울먹) 나만 흰색이야”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대체 노란띠가 뭐라고...     


인근 학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해 한동안 영업을 중단했던 태권도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한 수업에 9명 미만만 참여하는 조건으로 운영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여전히 흰띠인 큰애도 오늘 다시 태권도 학원으로 향했다. 아빠로서 바람이 있다면 학원 영업도 중단되지 않고, 아이가 빨리 노란띠를 받아오면 좋겠다. ‘노란띠 그까짓 게 뭐라고’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처음 집 밖에서 스스로 성취하고 인정받는 성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째 아이는 요즘 신중한 호흡으로 여기저기 쓰인 글씨도 읽어보려고 하고, 간단한 산수도 손가락을 요리조리 굽혀가며 해보려 한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게으른 부모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어느덧 글씨가 궁금해져 하나씩 깨치고 있다. 책을 읽을 때, 간판을 읽을 때, 내가 읽는 수업교재 제목을 읽을 때마다 몇 글자씩 틀려도 “우와, 백점이야~ 잘했어!”하고 말해준다.(그러고 나서 틀린 부분은 다시 읽어준다.) 이후 몇 번을 백점이라고 불러줬더니 요즘은 당당히 백점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림책에 적힌 몇 줄 안 되는 문장을 여러 번 틀리게 읽으면서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내게 “백점이라고 해야지~” 이야기한다. 이어서 내가 “백점이네” 말해주면 다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책을 읽는다. 백점이 좋은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일까. 아니면 유튜브에서 본 것일까. ‘백점’이라는 말로 하루하루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발산하는 중이다. 결국 아이도 나처럼 평가에 흔들리는 인격체가 되어 버렸다.      


평가 절차가 끝나면 직원들은 네 가지 알파벳 중 하나씩 부여받게 된다. 2020년, 365일의 업무, 노력, 태도가 알파벳 한 개로 결정된다. 하루 종일 괴로움에 시달리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몇 분이면 S, A, B, C의 의미를 금방 잊고 말 것이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다. B나 C를 받아서 상심한 후배에게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조언을 할 수도 있고, S나 A를 받고 흐뭇해하는 동료에게 한껏 축하를 하고 점심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짬’이 생겼다. 누군가로 인해 발생한 평가와 평가를 받는 당사자의 행복 사이에는 특별히 큰 상관관계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큰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노란띠를 받았으면 좋겠다. 노란띠를 허리에 매고 현관문을 열며 함박웃음 짓는 모습을 보고 싶다. 회사에서 내게 주는 평가는 내 행복과 상관없지만 어쩌면 아이의 노란띠는 내 행복과 높은 수준의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권도 학원에서, 어린이집에서, 내년부터는 학교에서, 앞으로 본인에게 주어지는 시스템 안에서 스스로 원하는 결과를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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