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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22. 2021

이런 거울같은 자식을 보았나

소주잔을 앞에 두고 선배가 한숨을 쉰다. 선배는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했다. 내가 OJT를 받았던 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수는 아니었지만 이내 회사에 궁금한 걸 물어보는 사람이 됐다. 어느 해에는 직전 연도에 선배가 하던 일을 내가 인수인계받기도 했다. 선배는 나보다 결혼도 먼저 하고 아이도 먼저 낳았다. 내가 5살, 3살 딸 둘을 키울 때 선배는 6살, 4살 딸 둘을 키우고 있었다. 회사 일로, 그리고 아이들 일로 나보다 한 챕터씩 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 선배가 술잔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야, 애들이 정말 부모를 닮는다는 걸 요즘 심하게 느껴. 며칠 전에는 집에서 애들 둘이 싸우는데 첫째가 둘째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저리 비켜, 너 같은 새끼 필요 없어. 이러더라고. 근데 그게 내가 애들한테 화낼 때 하던 대사다. 신기하지. 내가 한 말을 내가 다시 듣게 되더라. 그 소리를 듣고 화를 낼 수도 없고...”  

   

나도 1년 뒤에 선배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충격과 공포의 전주곡일까. 선배는 내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담장 너머를 배트로 가리키며 홈런을 예고하는 베이브 루스의 마음이라고 했다.     


다섯 살 무렵인가. 뭔가를 기억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릴 때지만 선명한 기억이 몇 개 있다. 하루는 집 근처 대학 캠퍼스를 엄마, 아빠와 산책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캠퍼스에서 가장 큰 건물 옆 도로에 출입금지를 의미하는, 노란색과 검은색이 사선으로 번갈아 칠해져 있는, 차단봉이 두 개 있고 차단봉에는 철제 사슬이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하루하루 튼튼해지는 다리가 무척이나 뿌듯했는지 나는 사슬 앞으로 달려가 폴짝폴짝 뛰어넘었다(고 한다). 높이가 가장 낮은 사슬의 가운데 부분을 앞에 두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뛰던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아빠가 다치니 그만하라고 했다(고 한다).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 태어나서 늙어 비틀어질 때까지 부모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 존재 아닌가. 태어나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말을 안 듣고, 조금 크면 컸다고 말을 안 듣고, 머리가 굵어지면 이내 말을 무시하고, 성인이 돼서 출가까지 하면 부모 말과 상관없이 의사결정을 독립해야 한다.     


이것만 뛰고 가야지. 하고 마음먹고 마지막 점프를 했는데 리듬이 이상했다. ‘폴짝’ 다음에는 '착' 또는 ‘사뿐’으로 마무리돼야 하는데 어깨는 앞으로 쏠리고 다리는 뒤에 그대로 있었다. 쿵. 고르지 못한 시멘트 바닥에 턱부터 착지했다. 턱은 바닥에 쓸려 피가 났고(평생 흉터로 남았다), 무릎도 함께 까졌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는데 뭔가 번쩍! 했다. 아빠가 힘껏 내 뺨을 후려 쳤다. 그다음 기억은 별로 없다.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까. 뺨 이후 아마도 아빠는 분을 못 이기며 혼자 집으로 향했을 테고, 옆에서 깜짝 놀란 엄마는 넘어지고 뺨까지 맞은 나를 달래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선배의 씁쓸한 넋두리를 듣고 1년이 지났다. 우리 집 아이들도 한 살씩 더 자랐다. 베이브 루스처럼 내 미래를 예견한 선배는 과연 홈런을 쳤을까. 둘째도 커서 제법 뛰어다니고 나니 아이들끼리 알아서 놀기 시작했다. 때리고 넘어지고 싸우고 웃고 떠드는 상황이 롤러코스터처럼 변하다 첫째가 둘째를 혼냈다.     


“왜 이러케 언니 마를 안드러. 이 노무 자시기. 쯧”     


원본은 이렇다. “왜 이렇게 아빠 말을 안 들어 이놈의 자식이, 쯧”


아이는 어깨너머로 배운 문장을 정확히 구사했다. ‘아빠’를 ‘언니’로 바꾸며 화자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마지막 혀 차는 소리 ‘쯧’도 빼먹지 않고 완벽한 리듬으로 혀를 찼다. 그 뒤로 첫째는 내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보여줬다. 아이를 혼낼 때 엉덩이를 때리던 모습을 배워 동생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고, 시끄럽다고 울지 말라고 소리치는 아빠를 따라 자신의 동생이 넘어져 한참 울고 있자 울지 말라고 크게 소리쳤다.  


30대 후반이 되니 멀쩡하던 두피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 지루성 두피염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도 지금 내 나이쯤 두피가 항상 이랬다(고 한다). 정수리에 머리가 드문 드문 했던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도 똑같이 정수리에 머리가 제법 사라졌고 이제는 내 남동생 정수리에 모발 밀도가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동생에게 전화를 했는데 동생은 내 목소리를 듣고 아빠가 전화를 한 줄 알고 한참이나 존댓말로 대답을 했다.      


아이는 성별이 나와 다르니 정수리가 빠진다거나 목소리가 비슷하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무엇이 나와 닮을지 갈수록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혹시 뭔가 닮게 되는 것이 있다면 나중에 ‘아빠의 이 모습은 닮아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맞췄다. 첫째에게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고 했다. 동생에게 소리도 지르면 안 된다고 부탁했다. 동생 앞에서 혀를 차는 ‘쯧’ 소리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첫째는 알았는지 모르는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하고 팔을 뿌리치며 뛰어갔다. 결국 이 부탁과 당부는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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