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무 살이 된 1월, 대입 논술고사를 보러 서울에 왔다. 시험을 보려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 1년 선배의 하숙방에서 하루 얻어 자기로 했다. 학교는 서울, 고향은 서울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의 소도시. 그냥 시험날 아침 일찍 기차로 올라가도 되는데 굳이 전날 저녁에 서울로 올라갔다. 불필요한 리스크를 안고 가는 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나 합격하면 다니게 될) 캠퍼스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도 하루 먼저 올라가게 된 이유였다.
하룻밤 방을 빌려준 선배는 자기는 집(하숙방)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흔쾌히 자고 가라고 했다. 물론 밤 중에 전화를 걸어 본인 세탁물을 돌리고 건조대에 널어달라는 부탁을 하긴 했지만, 특별히 친하지도 않은 후배에게 고맙게도 자신의 공간을 내줬다.
차가운 겨울, 경부선 무궁화호를 타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전철을 갈아타고 대학교가 있는 역에 내렸다. 학교 정문을 찾아 걷고, 캠퍼스로 들어가 서문을 찾고, 주변을 기웃거리며 선배의 하숙집을 찾았다. 하룻밤을 보내고,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논술고사를 치르고, 무궁화호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개월 후 신입생으로 학교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선배가 살던 하숙집 빈방에 거처를 마련했다.
선배는 별난 구석이 제법 있지만 부러운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집도 잘 살고(나는 매우 속된 인간이다), 피아노도 잘 치고(우리가 살던 광역지자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이었다),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좋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잘 보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니었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그래서 꼭 기타를 언젠가 배우고 싶다), 아등바등해도 성적은 그냥 그렇고, 무엇보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인간이었다. 때문에 선배를 종종 곁눈질하며 살았다. 특별히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등산길에 나보다 몇 발 앞에 있는 사람 같았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제법 따라갈 만해 보이는 곳에 있는 사람. 물론 등산 장비는 차이가 많지만.
“언니는 내 삶의 해답지 같아”
어디에선가 이런 문장을 읽었다. 해답지라......
나는 그런 경험이 있었을까. 없는 것 같다. 늘 나는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선험자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건 물어볼 사람이 없을까. 다른 애들은 여기저기 도움도 잘 받던데.’ 불평만 많았다.
주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도 없고(지나고 나면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학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그래서 무작정 엉덩이 오래 깔고 앉는 무식한 방법으로 덤볐다). 자소서는 어떻게 쓰는지, 면접은 어떤 질문을 하는지, 대기업 회사원의 생활은 어떤지 물어볼 선배가 의외로 없었다(당시 다른 방향으로 꿈을 찾아 떠난 선배가 많아 소위 말하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사람이 드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볼 곳이 별로 없는 인생 같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원도 졸업하기까지 과정이 궁금한 게 많은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사이버대학이 된 연유로) 구전으로 알려줄 이가 없다.
쉴 새 없이 징징거린 것처럼 나는 꽤 의존적인 인간이다. 문제집을 채점하고 틀린 문제가 나오면 이 문제를 왜 틀렸는지, 정답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지 않는다. 해답부터 찾아본다. 해설에서 문제를 푸는 방법과 가이드를 찾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살면서도 늘 해답지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삶에도 해답지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과연. 가만히 보니 해답지는 아니더라고 각주처럼 페이지 아래 숨어 힌트를 주는 사람은 고비마다 있었던 것 같다. 아니다. 있었다. 분명히.
좋은 대학에 가는 방법(그런 방법은 있지도 않지만)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어도 좋은 대학에 진학한 선배들은 많았다. 저 정도 성적이 나와야 저 정도 학교에 갈 수 있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잘 챙겨주셨다. 아이템풀 학습지, 윤선생 영어교실, 피아노 학원 이론 수업 2개월, 수학의 정석 과외 2개월 등. 지나고 보니 귀신같은 타이밍에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을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챙겨주셨다. 취직할 시기가 되어보니 나보다 먼저 대기업에 취직한 동기도 있었고, 봄과 가을마다 학교에 찾아오는 취업설명회도 있었다. 대학원을 고민하던 시기에도 (먼저 대학원에 다니던) 같이 일하던 후배가 가이드를 주기도 했다. 이직과 인사발령 때문에 고민하던 최근에는 나와 같은 시기에 이직했던 전 직장 선배가 명쾌한 내용으로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풀어졌다.
이제 와 생각하니 세상 사는데 해답지가 꼭 필요한 것인지 하는 생각도 든다. 같은 문제를 풀고 사는 것도 아닌데 해답지가 어디 있을까. 대체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니 타인의 행동에서, 선험자의 지혜 속에서 팁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하나의 해를 찾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해답이 있다 하더라도 해답을 적용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기숙사, 같은 대학, 같은 전공을 공부한 선배와는 이제 인생 경로가 많이 달라졌다. 선배는 대학원을 거쳐 고시를 보고 높은 관직에 올랐다. 나는 스물일곱에 취직을 하고 이직을 하며 10년 넘게 회사를 다닌 직장인이 됐다. 나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고 선배는 아직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 지금은 고향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경기도 모처에서 길을 마주 보고 근무하고 있다. 이제는 하룻밤 방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선배에게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 선배가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면 오히려 내가 해줄 말이 있을 수도 있다. 조만간 점심이라도 한번 보자고 물어봐야겠다. 계산도 내가 해야지.